제90화
시작의 도시 상업 지구에 위치한 한 고급 여관, 천상의 멜로디에 10명의 유저들이 모였다.
그들 개개인은 모두 랭커로서 이름과 명성을 떨치며, 10강이라 불리는 로스트 월드 최강의 길드의 마스터 자리에 앉아 있는 유저들이었다.
“그가 정말 올 거라 생각하십니까?”
전투와는 무관한, 대장장이 복장을 하고 있는 유저가 입을 열었다.
그는 오직 대장장이 유저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길드, 강철의 길드 마스터임과 동시에 로스트 월드 최고의 대장장이로 이름을 떨치는 강철이었다.
강철의 말에 순백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유저, 자애의 성자 신성이 입을 열었다.
“그는 반드시 옵니다.”
“신성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뭐….”
신성의 말에 강철이 한발 물러섰다.
허나 강철의 표정은 다소 못 미덥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굳이 강철이 아니더라도 여관에 모여 있는 나머지 9명의 유저들 모두가 그러했다.
애초에 제로는 최악의 PK 유저라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그런 유저의 말을 쉽사리 믿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현실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만나긴 해야겠지.”
말라비틀어진 나무로 만들어진 스태프를 매만지는 유저, 마도왕이 스쳐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에 모두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마도왕이 언급한 현실에서 벌어진 일. 그것은 느닷없이 나타난 괴물과, 그런 괴물을 처리한 제로의 언데드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제로의 언데드가 처리한 것은 서울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렇게 10강의 길드 마스터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을 때, 돌연 여관 구석에 잿빛의 기류가 휘몰아쳤다.
갑작스런 현상에 몇몇 유저들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늦어서 미안.”
휘몰아치는 잿빛의 기류가 뭉치며, 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언데드. 그것도 언데드계 최고봉이라 불리는 리치였다.
다만, 평범한 리치와는 다르게 그것의 몸체를 이루는 골격은 심연을 품은 듯 검게 물들어 있었다.
머리에는 뼈로 이루어진 왕관을 뒤집어쓰고, 미간에는 영롱한 붉은 보석이 반짝이고 있다.
공허해야 할 두 눈구멍에는 흉흉한 붉은 흉안이 번뜩였다.
게다가 흉흉한 칼날이 달린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그 안에는 역 십자가가 새겨진 검은 사제복을 걸쳤다.
오른손에는 보기만 해도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책을 쥐고 있었다.
그러한 괴물의 모습을 본 신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학살자 제로!”
저놈이 학살자 제로라고?
이종족 플레이어였어?
그것보다 리치라니. 누가 네크로맨서 아니랄까 봐 종족 봐라.
그나저나…, 저놈 상당히 강한데?
신성의 외침에 10강의 길드 마스터들이 술렁였다.
누구는 제로에게서 흘러나오는 힘에 긴장했으며, 누군가는 제로의 외형에 쯧쯧 혀를 찼다.
다만, 제로를 향한 모두의 시선에는 동일하게도 ‘적의’가 서려 있었다.
제로는 열 명. 아니, 신성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명의 길드 마스터들이 내뿜는 적의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니들이 날 싫어하는 것도 이해는 해. 그런데 말이야…, 상당히 불쾌하단 말이지. 내가 그렇게 싫으면 한 판 뜰까?”
쿠궁-!
제로의 말투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상당히 경박했다.
허나, 그러한 경박한 말투 속에 숨겨진 거대한 존재감은 스스로의 강함에 자부심을 가진 10강의 길드 마스터들을 짓눌렀다.
그렇게 제로와 길드 마스터들. 그들의 시선이 어느 정도 허공에서 교차했을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듯, 자애의 성자 신성이 입을 열었다.
“지금 뭣들 하시는 겁니까? 제로 당신도 진정하시죠.”
신성의 말에 그제야 10강의 길드 마스터들은 적의를 거두었다.
제로 또한 길드 마스터들을 압박하는 존재감을 거두어들였다.
“뭐, 나도 니들이랑 싸우러 온 것은 아니니깐. 그럼 대화를 시작해 볼까?”
* * *
“지금 그 말을 우리보고 믿으라는 거야?”
헌터 길드의 길드 마스터, 룬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몇몇 길드 마스터들 또한 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제로가 하…, 깊은숨을 토해 냈다.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제로가 뒷말을 흐리며 모여 있는 10명의 길드 마스터들의 면면을 훑어봤다.
그런 제로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길드 마스터들이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이미 너희들도 현실에서 마주했잖아? 허상괴를.”
…….
제로의 말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 말이 맞았다.
이곳에 모여 있는 모두가 현실에서 괴물, 허상괴를 마주했다.
누군가는 서울에서. 누군가는 다른 도시나 마을에서.
특히나 서울은 제로가 나서 순식간에 정리했지만, 그 외의 지역은 몇몇 길드 마스터들이 손수 허상괴를 처리하기도 했다.
그런 ‘사실’이 존재하기에, 제로의 말을 무작정 부정하고 외면하기에도 이상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놈들, 허상계의 침공은 시작됐어. 니들이 마주한 그놈들은 말 그대로 정찰병에 불과해. 허상괴 놈들의 등급으로 따지자면 최하급이지.”
그놈들이?
그런 괴물이 최하급이라니.
경찰의 총알도 통하지 않았다고.
제로의 말에 여관 내부가 술렁였다.
그들이 나서기 전, 가장 먼저 허상괴와 대치했던 것은 경찰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목격했다.
제로가 말한 허상괴라는 괴물들이, 경찰이 쏜 총알을 무시하는 모습을.
“그리고 니들도 사용했잖아? 로스트 월드에서 힘을 현실에서.”
“으음.”
이어진 제로의 말에 신성이 낮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지만, 뒤늦게 생각하면 할수록 괴물들을 상대했을 때 로스트 월드에서의 힘이 발현되었다.
다만, 그때 발현된 힘은 매우 미약했으며, 매우 미미했기에 저도 모르게 넘겼을 뿐이다.
특히나 제로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흩어져 있던 퍼즐이 딱딱 들어맞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후, 좋아. 네 말이 맞다 치자.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지?”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마도왕이었다.
그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마도왕의 질문에 제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
제로의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런 길드 마스터들의 반응에 제로가 후…, 하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토해 냈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는 너희들이 더 잘 알고 있잖아? 아니면 뭐, 내 밑에서 내 명령대로 움직이고 싶은 거야?”
씨익 웃으며 말하는 제로에 길드 마스터들 사이로 다시 한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로의 밑에서, 제로의 명령을 들으며 행동한다?
그건 죽어도 싫은 게 길드 마스터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애초에 10강이라는 거대 길드를 이끄는 길드 마스터들이다. 누군가의 밑에서 활동하거나, 누군가의 명령대로 움직일 족속들이 아니었다.
“뭐, 그래도 약간의 길을 제시하자면 이거지. 사람을 모아.”
“사람을… 모으라고?”
“현실에서도 로스트 월드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을 모아. 그리고 대비해. 허상계가 본격적으로 침공을 시작할 그 날을.”
그 말을 끝으로, 제로를 중심으로 잿빛의 기류, 죽음이 휘몰아쳤다.
제로의 육신은 휘몰아치는 죽음 속에서 점차 무너져내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제로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신성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면 당신은 앞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사라져 가는 제로의 붉은 흉안이 신성을 응시했다.
“난 내가 뿌린 씨앗을 회수하러 가야지.”
그 말을 끝으로, 제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제로가 사라지고, 강철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앞으로 어떡할 생각이지?”
“당연한 거 아니겠어? 살짝 기분 상하긴 하지만…, 제로의 말대로 대비를 해야지.”
강철의 질문에 룬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 *
천상의 멜로디에서 사라진 제로가 다시 나타난 장소는 시작의 도시의 슬럼가였다.
곳곳에 오물과 부랑자들이 널려 있는 슬럼가는 로스트 월드 특유의 리얼리티에 유저들이 접근하지 않는 장소였다.
“흠.”
잠시 주변을 살피던 제로가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슬럼가 특유의 미로와도 같은 골목을 헤집고 돌아다닌 제로는 하나의 문 앞에 멈춰 섰다.
“흠흠.”
똑똑.
다소 어색하다는 듯 헛기침을 터트린 제로가 노크하자 문 너머로 기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은 나비의 날갯짓은.
“황혼을 품은 폭풍이 되어 휘몰아친다.”
제로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문이 열렸다.
“오셨군요! 형님!”
열린 문에서 튀어나온 것은 스타툰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스타툰은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는 사냥을 통해 상당한 레벨 업을 거쳤으며, 그 이상으로 예이안의 유물을 획득해 ‘다크 로드’라는 직업명에 걸맞은 강함을 갖추었다.
다만….
“꼭 그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쳐야겠냐?”
“왜요?”
제로의 불평에 스타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음지의 비밀 조직 같아서 멋지지 않았어요?”
“멋지긴 개뿔. 손발이 다 오글거리더라.”
제로의 대답에도 스타툰은 그저 헤실헤실 웃었다.
“그나저나 내가 지시한 건 다 했냐?”
“아, 네! 이쪽으로 오세요.”
제로의 질문에 우렁찬 대답을 내뱉은 스타툰이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스타툰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장소는 건물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창고였는데, 스타툰은 그런 창고의 바닥에 숨겨진 비밀 문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열어젖혔다.
스타툰이 연 비밀 문 너머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로는 자랑스러운 표정의 스타툰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자자, 멍 때리지 말고 이쪽으로 오시죠.”
다시 한번 스타툰을 따라 내려간 계단의 끝에는 말 그대로 비밀 결사대가 사용할 법한 방이 존재했다.
사방이 꽉 막힌 방은 외부에서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으며, 오직 중앙에 놓여 있는 촛불의 일렁이는 불꽃만이 전부였다.
특히나 그런 촛불 주변에는 총 다섯 명의 유저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스타툰은 그들을 가리키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내비쳤다.
“형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최고의 동료를 준비했습니… 다…?”
자랑스레 말하던 스타툰의 입이 다물어졌다.
허나 암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섯 명의 유저도, 암실로 내려온 제로도. 그 누구 하나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니들이 왜 여기 있냐?”
“그, 그러는 제로 님이야말로 여기는 어쩐 일로…?”
스타툰이 준비했다는 최고의 동료는 켄달을 포함한 5인방이었다.
모두 제로를 통해 히든 클래스로 전직할 수 있었던 그들은 빠른 속도로 강해졌으며, 제로보다는 못하지만 나름의 악명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한편 제로와 5인방의 반응에 스타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제 친구들인데 형님은 벌써 알고 계셨습니까?”
“치, 친구?”
“너! 설마 형님이라는 분이 제로 님을 말하는 거였냐?”
스타툰의 말에 제로와 켄달이 동시에 버럭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