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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네크로맨서-88화 (88/200)

제88화

[분위기가 변했구…!]

파밧-!

머리가 재생된 제로를 바라보며 말하던 아크 리치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뼈의 창이 아크 리치가 앉아 있던 왕좌를 꿰뚫었다.

[으음.]

왕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나타난 아크 리치가 낮은 울림을 토해 냈다.

제로는 분위기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가 재생되고 난 뒤. 아니, 더욱 정확히는 공허한 눈구멍에 붉은 흉안이 개안된 뒤, 제로를 감싸고 있는 힘의 질이 달라졌다.

과거의 제로를 감싸고 있는 힘이 죽음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제로를 감싸고 있는 힘은 죽음 그 자체였다.

한편, 그러한 변화는 제로 또한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기분이 상쾌해.’

제로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은 맑았으며, 기분은 상쾌하고 전신에는 힘이 넘쳐흘렀다.

육체에 흐르는 거대한 힘은 과거 죽음의 옷자락을 구하기 위해 싸웠던 헬데이븐 때와 비슷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그때는 거대한 힘에 휩쓸렸다는 느낌이라면, 지금은 거대한 힘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윽.

한참 전신에 흐르는 거대한 힘을 음미하던 제로가 아크 리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2라운드를 시작해 볼까?”

* * *

콰가강-!

콰강!

콰아아아앙!

거대한 홀 이곳저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아크 리치와 제로가 발하는 마법의 충돌에 의한 폭발들이었다.

[이방인이란 참으로 신기한 존재로군.]

[어찌하여 그 짧은 시간 안에 이 정도로 강대한 힘을 취한 것이더냐.]

말을 마친 아크 리치의 손에서 거대한 화염구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평범한 선홍빛이 아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백열의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글쎄. 어떻게 취한 것일까.”

아크 리치의 말에 응답한 제로 또한 화염구를 만들어 냈다.

다만, 그것은 아크 리치의 것과는 다르게 짙은 심연을 품은 듯, 검게 물들어 있었다.

콰아아앙-!

아크 리치의 백색의 화염구와, 제로의 심연을 품은 화염구가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둘의 충돌로 휘몰아치는 열기에 네크로맨서들은 보호 마법을 사용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나저나 괜찮겠느냐.]

[비록 힘이 강해졌다고는 한들, 그대의 본질은 네크로맨서.]

[마도의 극치를 이룬 본 왕을 정면 대결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파지직!

콰가강!

아크 리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로의 머리 위로 한 줄기 낙뢰가 떨어졌다.

떨어진 낙뢰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었으나, 제로가 펼친 실드에 막히며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크 리치의 질문에 대답한 제로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의 뼈가 으스러져라 꽉 움켜쥐기 무섭게 제로의 등 뒤로 공간이 갈라지며 외차원의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널 위한 선물이야.”

괴로워. 괴로워. 괴로워. 괴로워.

더 이상은 싫어. 더 이상은 싫어. 더 이상은 싫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외차원의 창고에서 대량의 망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튀어나온 망자들의 외형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망자는 유저의 모습을 하기도 했으며, 어떤 망자는 몬스터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허상괴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외차원의 창고에서 쏟아져 나오는 망자들은 모두 과거의 잔재였다.

제로가 회귀 전부터. 그리고 회귀 후에도 수없이 죽여 온 모든 생명이 망자가 되어 있었다.

제로 또한 어째서 이러한 것들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그저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힘을 두려워할 것이다.

허나 제로는 달랐다.

‘다룰 수 있음에도 그것을 무서워해 사용하지 않는 것은 머저리나 다름없지.’

스스로의 지배하에 있음에도 그것을 두려워해 사용하지 않는다.

제로의 눈으로 보기에 그러한 것은 멍청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절규를 쏟아 내며 거대한 탁류가 된 망자들의 진격에 아크 리치가 두개골을 긁적였다.

[확실히 네놈은 평범한 네크로맨서가 아니로구나.]

“그걸 이제 알았어?”

[설마.]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제로에 아크 리치가 클클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나름 즐길 정도가 되었으니….]

[본 왕도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봐야겠구나.]

[부디…, 너무 쉽게 죽지는 말게나.]

파직-!

말을 마친 아크 리치가 손에 쥐고 있던 스태프를 내리찍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충돌한 스태프로부터 검은 스파크가 튀겼다.

‘2페이즈에 돌입했다!’

그 모습에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게임처럼 아크 리치는 프로그래밍 된 데이터 쪼가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2페이즈에 돌입했다라는 말은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아크 리치를 표현하기엔 그만한 단어가 없었다.

[그럼 놀아 보자꾸나.]

화륵!

아크 리치를 중심으로 검은 불꽃이 치솟았다.

얼핏 보면 아까 전 제로가 만들었던 화염구와 비슷한 불꽃이었으나, 그 본질은 달랐다.

제로가 만들어 냈던 화염구가 죽음을 머금어 검게 번들거렸다면, 저것은 지옥의 불꽃이다.

한번 붙으면 그 대상을 완전히 불태우기 전까진 절대 꺼지지 않는다는 지옥의 불꽃.

과거 스스로를 폭염의 지배자라 칭했던 헬데이븐마저 영창을 통해 불러냈던 그것을 아크 리치는 단순한 행동 하나로 일으켰다.

[쏟아져라. 불태워라.]

[그리고 꿰뚫어라.]

우웅-!

아크 리치의 말 한마디에 피어오른 지옥의 겁화가 화살의 형태가 되어 쏟아졌다.

‘언령! 벌써부터 사용하는 건가!’

언령.

드래곤의 용언과 같은 힘으로 일종의 권능이라 칭할 수 있었다.

목소리에 막대한 강제력을 부여해, 단어 하나로 삼라만상 모든 것을 다룰 수 있게 만드는 힘이었다.

다만, 언령은 인과율을 건드리는 행위로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선 막대한 페널티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한 것을 아크 리치는 아무렇지 않게 다루고 있었다.

한편, 지옥의 겁화로 이루어진 수백 개의 화살은 제로의 전신을 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제로가 블링크 마법 따위로 회피를 취해도, 순식간에 궤도를 수정해 끝까지 따라붙었다.

“칫. 막아!”

단 한마디에 창고에서 쏟아져 나온 망자들이 제로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로의 앞을 가로막은 수백, 수천, 수만의 망자들은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거대한 벽이 되었으나….

‘까다롭기는.’

지옥의 겁화로 만들어진 수백 발의 화살은 그러한 벽을 불태우며 제로의 목숨을 노렸다.

그에 제로가 쯧! 하며 혀를 차고는 또 다른 망자를 불러들였다.

“번견!”

크앙!

제로의 부름에 공간이 갈라지며 명왕의 번견이 튀어나왔다.

번견은 쏟아지는 화살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리고는, 명계의 냉기를 토해 냈다.

쩌저적!

쩌엉-!

제아무리 지옥의 불꽃이라 한들, 명계의 냉기는 버틸 수 없는 것일까.

제로를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기세로 쏘아지던 수백 발의 화살은 명왕의 번견이 토해 낸 냉기에 휩쓸리며 산산이 부서졌다.

[보면 볼수록 잘 만들어진 언데드로다.]

아크 리치는 지옥의 겁화로 만들어진 수백 개의 화살이 한순간에 사라졌음에도 당황한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명계의 냉기를 토해 내는 명왕의 번견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볼 뿐이다.

“왜, 너도 하나 가지고 싶냐?”

[본 왕에게 주겠느냐?]

[저 정도로 잘 만들어진 언데드라면 본 왕의 권속으로 받아들여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겠구나.]

“지랄. 너 같으면 쌔빠지게 고생해서 만든 걸 주겠냐.”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하는 제로에 아크 리치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렇겠지.]

딱-!

아크 리치가 다시 한번 스태프를 내리찍었다.

그에 또 한 번 스태프에서 검은 스파크가 파지직 거리고, 동시에….

후웅-!

스카가각!

날카로운 칼날로 이루어진 바람의 폭풍이 아크 리치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 보거라.]

[쏟아져라. 그리고 모든 것을 난도질해라.]

언령이 발동하며 날카로운 칼날로 이루어진 바람의 폭풍이 제로를 향해 쏟아졌다.

제로는 지옥의 겁화로 만들어진 화살을 막을 때와 동일하게 수만의 망자들을 뭉쳐 벽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역시나는 역시나인가.’

아크 리치가 쏘아 낸 칼날의 폭풍은 그러한 벽을 난도질해 흔적도 없이 지워 버렸다.

수만의 망자들이 뭉쳐 만들어진 벽에 한 번 막혔음에도 폭풍의 기세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그런 허술한 벽으로 본 왕의 공격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냐.]

아크 리치가 끌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제로와의 전투는 하나의 유희였다.

세계의 규칙에 의해 망자의 거성에서 움직일 수 없는 아크 리치에게 있어 몇 안 되는 즐길 거리.

그렇기에 아크 리치는 제로가 최대한 발악하며, 최대한 살아남아. 최대한 자신을 즐겁게 해 주기를 소망했다.

한편 제로는 망자의 벽을 뚫고 튀어나온 칼날의 폭풍에 인상을 찌푸렸다.

“까다롭기는.”

스킬 사용, 멸망의 폭풍.

콰가가가-!

제로의 앞으로 멸망이 휘몰아치며 아크 리치의 칼날의 폭풍을 막아섰다.

과거에는 한 번 사용하면 극심한 페널티를 지불해야 하는 마법이었지만, 지금은 별다른 영창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그렇게 휘몰아치는 멸망의 폭풍은 칼날의 폭풍과 얽히고설켜, 서로 공멸하며 사라졌다.

[끌끌, 재미있구나.]

[아주 재미있어.]

[어디 그럼 이것도 한번 막아 보거라.]

아크 리치의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불꽃. 두 번째는 바람.

그리고 세 번째는….

‘얼음인 거냐.’

얼음이었다.

허공에 생겨난 얼음덩어리는 곧 날카로운 예기를 흩뿌리는 거대한 창이 되었다.

[꿰뚫어라.]

쉐에에에에엑!

아크 리치가 손을 까딱이며 말하자, 거대한 얼음의 창이 제로를 향해 쏘아졌다.

날카로운 파공음을 동반하며 쏘아진 얼음의 창이 지나간 자리는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칫-!”

스킬 발동, 망자의 거신병.

쿠르르-!

제로의 앞으로 세 구의 망자의 거신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 구의 거신병들은 일렬로 서 몸을 웅크렸다.

[고작 골렘 따위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아크 리치는 망자의 거신병들을 방패로 세운 제로에 입을 열었다.

‘나도 알고 있어.’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크 리치의 공격은 망자의 거신병 세 구 정도로는 막아 낼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시간 벌이는 가능하지.’

카가각-!

속으로 중얼거리기 무섭게 얼음의 창이 첫 번째 거신병과 충돌했다.

소환될 때부터 온갖 버프를 두른 거신병이 얼음의 창을 막아 낸 시간은 단 2초.

한 구에 2초씩, 총 세 구의 거신병들이 벌어 낸 시간은 6초였다.

6초.

대다수에겐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겠지만, 제로 같은 존재에게 있어서 6초라는 시간은….

‘충분해.’

넘치도록 충분한 시간이었다.

스킬 발동, 명왕의 역린.

스킬이 발동하며 제로의 등 뒤로 한 자루 창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아크 리치가 만들어 낸 것과 같이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창을 구성하는 것은 명계의 냉기였다.

또한 그러한 창에는 농밀한 죽음이 물씬 배어 나오고 있었다.

“가라.”

쩌엉-!

콰가가가가가강!

제로의 짤막한 말과 함께 쏘아진 명왕의 역린이 아크 리치의 얼음의 창과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만들어 냈다.

사방으로 퍼지는 충격과 흩뿌려지는 막대한 냉기는 곧 거대한 홀을 뒤덮는 얼음 안개를 만들었다.

그러한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제로는….

‘조건은 갖춰졌어.’

블링크 마법을 통해 아크 리치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끌, 무슨 생각이더냐?]

아크 리치가 자신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낸 제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로는 그런 아크 리치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다.

“네가 지금까지 죽여 온 생명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그 무슨…?]

쿠궁-!

제로의 질문에 아크 리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나 곧, 아크 리치는 전신을 엄습하는 거대한 중압감에 몸을 비틀거렸다.

[이 무슨-!]

아크 리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제로를 바라보자, 제로가 다시 한번 씨익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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