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하는 네크로맨서-87화 (87/200)

제87화

눈을 깜빡이는 순간,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상하좌우. 위, 아래까지.

모든 것을 특정할 수 없는 이곳을 가득 메운 것은 빛 한 점 존재하지 않는 어둠이었다.

제로는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하기를 잠시, 곧 죽음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힘을 원하지 않아?]

재차 이어진 죽음의 질문에 제로는 침묵했다.

힘을 원하냐고?

물론 원한다.

가깝게는 눈앞에 있었던 아크 리치를 죽일 수 있는 힘을 원한다.

멀게는 확정된 미래인, 지구에 쳐들어오는 허상괴들을. 그리고 그런 허상괴들의 왕을 죽일 수 있는 힘을 원한다.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을 때, 주변의 풍경이 또 한 번 변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제로의 시야에 흑골의 육체가 들어섰다.

제로가 순식간에 만들어진 육체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을 때, 그러한 제로의 발밑으로 무수히 많은 시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시체는 유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어떤 시체는 몬스터나 허상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종다양한 시체들의 등장에 제로가 당황하고 있을 때, 죽음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힘을 원한다면 증명해.]

“무…!”

죽음의 말에 뭐라 말하려던 제로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시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천, 수만. 수억을 뛰어넘는 숫자의 시체들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제로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싫어. 무서워.

죽고 싶지 않아.

왜 내가 죽어야만 해?

어째서 날 죽인 거야?

엄마가 보고 싶어.

괴로워. 무서워.

살고 싶어.

제로의 머릿속으로 공포와 절망. 슬픔과 원망 따위가 뒤섞인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제로는 정신을 넘어, 영혼 그 자체마저 뒤흔드는 것만 같은 시체의 목소리에 ‘큭!’ 하며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내가 왜 죽어야 돼?

어째서 날 죽인 거야?

왜 너만 살아 있는 거야?

너도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으아아아아아악-!”

시체들의 원념 어린 목소리에 제로가 비명을 내질렀다.

괴롭다는 듯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은 제로는 몸부림치며, 어떻게든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떨쳐 내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소용없었다.

그것들의 목소리는 더욱 강해지고, 그것들이 품고 있는 부정적인 것들은 제로의 정신을 뒤흔들다 못해 조금씩 갉아먹고. 침식하여 들어갔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제로는 스스로가 부리던 단순한 망자로 변해 버릴 것이다.

한편 제로가 수많은 시체에 뒤덮여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런 제로의 머리 위로 공간이 갈라지며 하나의 붉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흉흉한 붉은 안광을 토해 내는 하나의 눈동자, 죽음은 괴로워하는 제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증명해.]

[그리고 뛰어넘어.]

[이 시련을 극복하면, 너는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 될 수 있어.]

* * *

어둠을 가득 메우던 시체들이 녹아내리며 잿빛의 기류가 되어 제로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는 죽음에 갇힌 제로의 정신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지금까지 죽여 왔던 수많은 생명들의 원망 어린 절규`.

로스트 월드에서 무수히 죽여 온 유저나 몬스터는 물론, 현실에서 죽여 온 허상괴와 지금까지 스쳐 지나온 모든 죽음.

그것들이 뒤섞인 절규는 제로가 버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제로가 가장 버틸 수 없는 것은, 허상괴와의 전투에서 죽어간 동료들의 원망 어린 목소리였다.

어째서 혼자 살아 있는 거야?

우리는 죽었는데.

너도 죽어.

같이 가자.

한때 동료였기에 더더욱 그들이 내뱉는 원망은 제로의 정신을 크게 뒤흔들었다.

그렇게 원망과 절규가 뒤섞인 죽음에 얼마나 휘둘렸을까.

‘그냥… 포기할까.’

제로가 두 눈을 감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로는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고통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것뿐.

그렇게 제로가 끝없는 고통에서 도망치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그때….

[포기하지 마.]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자신을 죽인 제로를 향한 원망 어린 목소리도, 죽음 속에서 고통받는 절규도 아니었다.

도리어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정신이 편안해지는 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넌 누구야…?”

눈을 뜬 제로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슬그머니 뜨여진 제로의 눈에 비쳐진 것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원망을 토해 내는 죽음의 덩어리였다.

그렇게 눈을 뜬 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몸뚱어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허나 시야를 이리저리 움직여도 보이는 것이라곤 죽음 덩어리에 불과한 잿빛의 기류뿐.

방금 들려왔던, 정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목소리의 주인은 찾을 수 없었다.

“잘못… 들은 건가.”

끝없는 원망과 절규에 정신은 흔들릴 대로 흔들렸다.

아니, 지금 제로의 정신은 무너지고, 박살 나지 않은 것이 도리어 의문일 정도였다.

그러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었기에, 제로는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 생각하며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다시 한번 제로의 두 눈이 감기는 순간….

[정말 이대로 포기할 거야?]

또 한 번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아까와 달리 무척이나 명확하게 들려왔다.

“넌 누구야…?”

[지금까지 노력했잖아.]

[정말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할 거야?]

상대는 제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말만 내뱉을 뿐이었음에도, 그러한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 한구석에서 짙은 슬픔이 밀려 올라왔다.

“넌 누구야….”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걸?]

파앗-!

마지막으로 이어진 질문에 대답이 들려왔다.

동시에 휘몰아치는 죽음이 갈라지며, 빛의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음을 몰아내며 모습을 드러낸 빛은 말 그대로 덩어리였다.

그것은 인간의 형태도, 로스트 월드에서 볼 수 있는 몬스터의 형태도 아니다.

하다못해 현실에 나타났던 허상괴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덩어리.

구체의 형태를 띠고 있는 덩어리였다.

하지만 왜일까.

어째서…, 저 빛의 덩어리를 보고 있자면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는 것일까.

어째서 빛의 덩어리를 보고 있으면 숨길 수 없는 외로움이 솟구치는 것일까.

도대체….

도대체….

도대체…!

“넌 누구야….”

뚝. 뚝뚝.

쥐어짜듯 억지로 말을 내뱉은 제로의 두 눈구멍에서 붉은 피가 눈물처럼 주륵 흘러내렸다.

[내가 알고 있는 강한은 고작 이 정도에 무너질 사람이 아니야.]

“내 이름을 어떻게?”

한창 밀려오는 슬픔과 외로움. 아련함 따위에 눈물을 흘리던 제로가 당황하며 말했다.

저 빛의 덩어리는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로스트 월드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이 아닌, 현실의 이름을.

제로가 그러한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덩어리의 외형이 점차 변화했다.

여전히 빛 그 자체라 눈이나 코 따위의 이목구비는 알아볼 수 없지만, 그것이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니 무너지지 마.]

[날 위해서라도.]

파앗-!

그 말을 끝으로 빛의 덩어리가 폭발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따뜻한 빛은 휘몰아치는 죽음을 밀어내 제로의 마음을 잠시나마 따스함으로 가득 찰 수 있게 만들어 줬다.

“아아….”

빛에 파묻힌 제로가 낮은 울림을 토해 냈다.

기억났다.

아니, 자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싸늘한 죽음을 밀어내고, 자신의 마음을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 준 저 빛의 덩어리가 누구인지.

“고마워.”

제로가 ‘그녀’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밝은 빛에 밀려났던 죽음이 거대한 해일이 되어 제로를 향해 쏟아졌다.

너도 죽어야 해.

너도 괴로워야 해.

나랑 같이 가자.

너 같은 놈은 지옥에 떨어져야 해.

순식간에 제로를 뒤덮은 죽음이 다시 한번 원망 어린 절규를 토해 냈다.

허나 그러한 절규는 지금의 제로의 정신을 조금도 뒤흔들지 못했다.

“알고 있어.”

몸을 일으킨 제로가 주변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살인마야. 강해지겠다는 일념 하나로. 지구를 지키겠다는 이유로 수많은 생명을 죽여 온 살인마이자 학살자.”

저벅.

말을 마친 제로가 한 발 내딛자, 휘몰아치던 죽음이 출렁이며 뒤로 밀려났다.

“변명은 하지 않을 거야. 내가 한 행동은 어떤 변명을 늘어놓든,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니깐.”

저벅.

제로가 앞으로 걸어 나갈수록, 죽음이 출렁이며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제로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죽음이 범접할 수 없는 자그마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아.”

살인자.

너도 죽어야 해.

왜 너만 살아 있는 거야.

우리랑 같이 가자.

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원망 어린 절규가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제로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죽음 속에서 대량의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팔과 다리를 붙잡으며 어떻게든 제로를 자신들과 같은 죽음 속에 처박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소용없어.”

끼아아아아아아악-!

공허한 두 눈구멍에서 검은 귀화가 피어오르기 무섭게 죽음 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이 들었다면 죽음에 다다를 정도로 흉악한 비명이었으나, 제로에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아니, 무언가 영향을 끼친 것을 넘어, 내뻗은 손을 시작으로 휘몰아치는 죽음이 제로에게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제로에게 빨려 들어가 흡수되는 죽음 속에서 다시 한번 비명이 울려 퍼졌다.

허나 그 비명은 아까의 그것과는 결이 다른, 말 그대로 ‘비명’이었다.

“내 안에서 지켜봐. 언젠가….”

그 말을 끝으로 제로는 휘몰아치는 죽음을 단 한 톨도 남김없이 먹어 치워 버렸다.

* * *

툭.

우당탕탕.

죽음의 거성 내부에 자리 잡은 홀 중앙에 흑골의 리치, 제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한 제로는 목이 잘려, 머리와 몸뚱어리가 분리되어 있었다.

한 편에는 양팔과 다리가 박살이 나 버린 저주왕 데이버그 또한 제로와 마찬가지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바닥을 나뒹구는 제로와 데이버그를 본 네크로맨서 한 명이 중얼거렸다.

제로를 먹어 치운 어둠이 사라지기 무섭게 흑골의 리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나타난 것을 넘어 의식이 없다는 듯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홀로 중얼거린 네크로맨서 외에도, 홀에 있는 모두에게 당혹감을 심어 주기에 적합했다.

[으음. 기우였던 것인가.]

아크 리치는 뼈로 된 옥좌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제로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은 아크 리치였다.

다만 무언가 기묘했다.

분명 자신의 마법으로 제로의 목을 날려 버렸으나….

‘애초에 본 왕이 목을 치기 전부터 의식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크 리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의아해하며 지켜보고 있을 때.

바닥을 나뒹굴던 제로에게서 변화가 일어났다.

머리를 잃어버린 몸뚱어리가 돌연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나뒹굴고 있던 머리통은 마치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려 잿빛의 기류가 되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난 몸뚱어리의 머리 부분에 모여들었다.

[무슨…!]

그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아크 리치가 놀라 외쳤다.

아니, 놀란 것은 뒤쪽의 네크로맨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편, 그렇게 모인 잿빛의 기류, 죽음은 곧 형태를 갖추며 다시 한번 머리가 되었다.

그렇게 새로이 생겨난 머리의 공허한 눈구멍에는….

번쩍-!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허나 흉흉한 붉은 안광을 토해 내는 흉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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