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하는 네크로맨서-85화 (85/200)

제85화

“숫자에서 밀리네.”

전황을 지켜보던 제로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보미네이션과 명왕의 번견. 그리고 더미 본 드래곤 나이트까지.

하나하나가 괴물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망자들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아크 리치의 언데드에 차츰 밀리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숫자가 부족했을 뿐이다.

하나의 손이 열 개의 주먹을 이길 수 없듯이, 제아무리 강력한 제로의 망자들이라 한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물량을 상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숫자가 부족하다면 채우면 되지.”

제로 또한 크게 본다면 네크로맨서.

수천, 수만의 언데드를 지배하는 군주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생각을 품기 무섭게 제로의 등 뒤로 공간이 쩍! 하며 갈라졌다.

“나의 적을 쓸어버려라.”

스킬 발동, 망자의 대군단.

우루루-!

제로의 등 뒤로 나타난 외차원의 창고에서 수천의 언데드가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네크로맨서들은 하나같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잿빛 마탑의 마탑주이자 네크로 마스터였던 베드로조차 수백의 언데드를 다루는 것이 한계였다.

그런데 눈앞의 이방인, 제로는 그러한 베드로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천의 언데드를 꺼내 들었다.

그것도 마치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듯 무척이나 손쉽게.

그 모습에 네크로맨서들은 제로의 강함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했다.

[재미있구나.]

전장을 지켜보는 모두의 머릿속에 아크 리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과연 스스로를 죽음의 대리자라 칭할 만한 강함을 갖추고 있구나.]

“조금만 기다려. 후딱 달려가서 네놈의 그 잘난 머리통을 부숴 버릴 테니깐.”

제로는 마치 비꼬듯 말하는 아크 리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 제로의 등 뒤로는 여전히 열려 있는 외차원의 창고에서 다종다양한 망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 *

“이게 마지막인가?”

수백의 망자들의 틈에 섞여 걸어 나가던 제로가 입을 열었다.

그런 제로의 발밑에는 한때, 압도적인 검술로 망자들을 베어 넘겼던 데스 나이트의 부러진 검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럼 가겠습니다.”

그 말에 네크로맨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로는 한껏 긴장한 표정을 내비치고 있는 네크로맨서들을 뒤로하며, 눈앞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낡은 쇳소리와 함께 열린 문 너머에는 하나의 거대한 홀이 존재했다.

천장에는 은은한 불빛을 흩뿌리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고 바닥에는 문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붉은 융단이 깔려 있다.

그러한 붉은 융단의 양옆으로는 단순한 좀비와 스켈레톤을 시작으로 듀라한. 스켈레톤 나이트. 다크 나이트 등의 언데드들이 늘어서 있으며.

그 끝에 자리 잡은, 뼈로 만들어진 왕좌에는 아크 리치가 앉아 있었다.

[끌끌,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치고는 많이 늦었구나.]

“칫.”

비꼬는 아크 리치의 말에 제로가 혀를 찼다.

뒤쪽의 네크로맨서들만 없었어도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제로는 네크로맨서들을 보호하며 움직임으로써, 약간의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말을 내뱉은 제로가 손짓하자 그 뒤로 어보미네이션과 명왕의 번견. 더미 본 드래곤 나이트가 시립했다.

그것들은 멀리 떨어진 아크 리치를 향한 짙은 흉성을 숨기지 않았다.

[나름 쓸만한 언데드로구나.]

아크 리치가 제로의 뒤에 시립한 세 구의 망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동시에 아크 리치는 탐욕을 드러냈다.

제로의 등 뒤에 시립한 세 구의 망자는 아크 리치조차 소유하지 못한 것. 거기에 더불어 상당한 전투력 또한 보유하고 있었기에, 아크 리치가 탐욕을 드러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로는 그런 아크 리치를 향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괜히 혓바닥 굴리지 말고. 내가 말했지, 네놈의 머리통을 터트려 버리겠다고.”

푸확-!

말을 마친 제로의 몸에서 짙은 죽음이 뿜어져 나왔다.

제로를 중심으로 난폭하게 휘몰아치는 죽음은 그 농도가 짙어져, 어느새 안개의 형태로 홀 내부를 뒤덮었다.

[그렇지.]

[우리가 이렇게 담소를 나눌 사이는 아니었지.]

아크 리치 또한 왕좌에서 일어나며 힘을 개방했다.

그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거대한 힘의 탁류는 곧 제로가 만들어 낸 죽음의 안개를 밀어냈다.

[헌데…. 괜찮겠느냐?]

“뭘?”

[힘을 봉인한 상태로 본 왕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흠칫.

무심히 툭 내던지듯 말하는 아크 리치의 말에 제로가 몸을 떨었다.

아크 리치는 제로가 의태의 반지에 의해, 힘의 일부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한눈에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런 아크 리치의 말에 가장 놀란 것은 살아남은 네크로맨서들이었다.

자신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함을 발휘했던 제로가 힘의 일부분을 봉인하고 있는 상태였다니.

그렇다면 모든 힘을 발휘하면 제로의 강함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제로는 혹여 전설로만 여겨지던 데스 로드의 경지에 접어든 존재란 말인가?

그러한 생각으로 네크로맨서들이 술렁이고 있을 때, 제로가 쯧!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크 리치 정도라면 충분히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하지만….

‘저들 앞에서 그 힘을 드러낼 수는 없어.’

너무 강한 힘은 도리어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자신은 유저였다.

저들의 입장에선 배신자나 다름없는 이방인이 바로 자신의 현 위치였다.

특히나 잿빛 마탑에 소속되어 있던 모든 유저가 그들을 배신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도리어 같은 네크로맨서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수 있는 상황이 된다.

그러한 제로의 속마음을 꿰뚫어 봤다는 듯, 아크 리치가 끌끌!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지. 어리석은 인간들은 너무나도 강대한 힘을 두려워하는 법이지. 그렇다면….]

스킬 발동, 왕의 무대.

파앗-!

아크 리치가 허공에서 꺼내 든 스태프를 내리찍었다.

스태프가 바닥과 충돌하며 딱!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아크 리치를 중심으로 검은빛이 뿜어져 나와 홀 내부를 뒤덮었다.

제로는 갑작스레 자신을 휘감는 검은 빛에 당황했으나, 곧 그러한 빛에 일말의 적의나 살의 따위가 없다는 것에 긴장을 풀었다.

한편 홀 내부를 뒤덮은 검은빛은 순식간에 사라졌으며.

제로는….

“여긴?”

생전 처음 보는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은 하나의 초원이었다.

허나 그것은 푸른 초목으로 뒤덮인 초원이 아닌, 붉은 피와 시체들로 뒤덮인. 대기 중에 죽음이 만연한 초원이었다.

[어떠한가. 이곳이라면 마음껏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

“날 배려해 준 거냐?”

[끌, 배려라니.]

[본 왕은 그저 확실히 하고 싶었을 뿐이다.]

[괜히 네놈이 훗날 ‘사실 난 힘을 봉인하고 있었어! 이건 무효야!’라며 생트집을 잡을지 어떻게 알겠느냐.]

“…….”

아크 리치의 말에 제로는 으득! 거칠게 이를 갈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적을 상대해 오면서, 이런 모욕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그래.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전력을 다해 싸워 주마.”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제로는 망설임 없이 의태의 반지를 뽑았다.

그에 죽음이 폭발하며, 제로의 육체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피부와 살점, 근육과 장기 따위가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드러난 뼈는 심연을 머금은 흑골이었으며, 공허한 두 눈구멍에는 검은 귀화가 일렁였다.

미간에는 제로의 생명이 응축된 붉은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오른손에는 보기만 해도 불쾌함과 혐오감 따위를 불러일으키는 네크로노미콘이 쥐어졌다.

[호! 네놈 리치였던 것이… 음?]

[아니구나. 네놈은 리치가 아니야. 그 외형은 리치에 가까우나.]

[그 본질은 다르구나. 마치… 그래. 죽음. 죽음 그 자체를 보는 듯한 느낌이구나.]

[어찌하여 네놈이 스스로를 죽음의 대리자라 지칭했는지 이제야 좀 알겠구나.]

“말이 많아.”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쾅!

제로의 등 뒤에서 쏘아진 흑골의 창이 허공을 가르다 폭발했다.

아크 리치와 제로.

그 둘의 사이에는 데스 본 스피어의 파편과 불꽃의 파편이 흩날렸다.

‘무영창화한 파이어 스피어?’

마나의 흐름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데스 본 스피어를 파이어 스피어로 요격하는 아크 리치에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작 이 정도 재주에 그리 놀라면 쓰나.]

귓가에 아크 리치의 목소리가 틀어박히기 무섭게, 제로가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제로가 서 있던 자리에 수십 개의 아이스 스피어가 틀어박혔다.

“칫.”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제로를 중심으로 죽음의 탁류가 휘몰아치며 아크 리치를 향해 뿜어졌다.

아크 리치는 전신을 두드리는 죽음의 탁류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서 있었다.

‘괴물은 괴물이다, 이건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대는 괴물이다.

드래곤조차 손쉽게 죽여 버리는 괴물이며, 반신의 영역에 접어들었다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괴물이다.

그런 괴물을 상대로….

‘너무 안일했어.’

너무 안일했다.

너무 긴장감을 풀었다.

그것은 자신답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는 좀 다를 거야.”

[그거 좀 기대되는구나.]

아크 리치의 대답에 제로가 씨익 웃으며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발동, 명왕의 번견.

스킬 발동, 데스 솔져.

스킬 발동, 어보미네이션.

스킬 발….

다양한 스킬이 발동하며, 제로의 앞으로 다양한 망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는 백을 넘어섰는데, 그러한 망자 하나하나의 강함은 현 랭커들에 필적하는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너도 튀어나와.”

스킬 발동, 저주왕 데이버그.

마지막 스킬이 발동하며, 하나의 리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긴 것은 제로와 똑같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미간에 박혀 있는 보석이었다.

제로의 미간에 박혀 있는 보석은 피를 연상시키는 느낌이었다면.

그것의 미간에 박혀 있는 보석은 보랏빛 기류가 일렁이는 다이아몬드에 가까웠다.

한편, 그렇게 제로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낸 저주왕 데이버그는….

[네놈. 도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는 것이냐!]

눈앞의 아크 리치를 보기 무섭게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 냈다.

* * *

“신성. 네놈은 어떻게 생각하지.”

신성의 길드 하우스에 자리 잡은 대회의실.

그곳의 중심에 마련된 거대한 원형 탁자에는 신성을 포함한 열 명의 유저들이 앉아 있었다.

개중 로스트 월드 세계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양의 무사풍의 모습을 한 검사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할 것도 없이, 저는 그를 믿고 있습니다.”

“흐음.”

신성의 대답에 무사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저….”

……?

대회의실 내부가 무거운 침묵에 둘러싸여 있을 때, 한 여인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황금빛 수실이 새겨진 로브를 걸치고, 겉에는 다종다양한 효과의 포션을 달고 있는 유저, 알케미스트 첸첸이었다.

“그나저나 제로가 알려 주겠다고 말한 ‘진실’이 무엇일까요?”

“딱 봐도 그거지 않겠습니까. 현실에 나타난 괴물.”

첸첸의 말에 룬이 입을 열었다.

그러한 룬의 말에 다시 한번 대회의실 내부는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현실에 나타난 괴물.

그리고 로스트 월드 속의 힘을 사용해 그러한 괴물을 물리친 사람들.

개중에는 당연하게도 이곳에 모여 있는 열 명의 유저. 10강이라 불리는 열 개의 길드의 길드 마스터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유지될 때, 신성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은…, 제로가 알려 주지 않겠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