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후-.”
대통령과의 짧은 만남 이후, 제로는 다시 로스트 월드에 접속했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최하급이라고는 하지만, 벌써부터 수백. 수천의 허상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름의 정보를 풀고, 경고를 해 놨지만….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야 해.’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는 죽음의 땅이 자리 잡은 방향을 바라봤다.
10강의 마스터들과의 만남은 3일 뒤.
그동안 제로는 살아남은 네크로맨서들을 규합할 생각이었다.
“퀘스트도 받았고 말이야.”
그러한 중얼거림과 함께 제로의 몸이 환한 빛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한편, 제로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네크로맨서들은 죽음의 땅에서 또 한 번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죽음의 땅이 언데드의 천국임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것들이 충성하고 따르는 존재는 평범한 네크로맨서들이 아니었다.
불사왕.
불멸의 패왕.
죽음마저 지배하는 존재.
수많은 수식어가 붙지만,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는 당연 아크 리치라는 단어였다.
그것은 죽음의 땅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주인이자, 죽음의 땅에 존재하는 모든 언데드를 지배하는 군주였다.
“모두 조금만 힘들 내주시게나!”
“조금만 더 가면 불사왕을 만날 수 있다네!”
네크로맨서들은 서로를 다독이며 아크 리치를 향해 나아갔다.
허나 죽음의 땅에 기거하는 언데드의 숫자는 많았으며, 그것들의 강함은 평범한 네크로맨서들이 부리는 언데드를 한참 뛰어넘었다.
그렇게 끝없이 쏟아지는 언데드에 네크로맨서들이 하나둘씩 지쳐가고 있을 때였다.
“아직도 여기까지밖에 못 간 겁니까?”
살아남기 위해 발악에 발악을 거듭하던 네크로맨서들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하늘을 향한 그들의 눈동자에 흑골로 이루어진 말을 타고 있는 제로의 모습이 내비쳐졌다.
“살아 계셨군요!”
제로를 본 한 네크로맨서가 놀라 외쳤다.
그는. 아니, 이곳에 있는 모든 네크로맨서는 제로의 죽음을 확정 지은 지 오래였다.
적은 무척이나 강했으며, 그 숫자 또한 많았다.
그러한 적들 중에는 네크로맨서들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사제나 성기사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기에 네크로맨서들은 제로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제가 죽기를 바라셨습니까?”
“그, 그건 아닙니다.”
바닥에 내려선 제로의 말에 네크로맨서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제로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아크 리치에게 가야 합니다.”
스킬 발동, 외차원의 창고.
스킬 발동, 망자의 대군단.
스킬을 발동하자, 제로의 등 뒤로 외차원의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깊은 심연을 품은 외차원의 창고에선 흉흉한 붉은 안광을 터트리는 망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을 뚫어.”
끼기긱.
덜그럭덜그럭.
끼하하학!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외차원의 창고에서 기어 나온 망자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제로의 망자들과 죽음의 땅의 언데드가 충돌하자, 사방에서 뼈가 부서지는 소리. 살점이 터져 나가는 소리 등이 울려 퍼졌다.
“움직이죠.”
제로의 말에 네크로맨서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였다.
네크로맨서들이 제로의 도움을 받아 죽음의 땅의 언데드들을 돌파하며 얼마나 움직였을까.
죽음의 땅 중심부에 점차 가까워질수록, 언데드들의 강함은 증가했으나 그 숫자는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저곳이 망자의 거성.”
무너지는 본 골렘의 잔해 속에서 제로가 입을 열었다.
제로. 그리고 네크로맨서들의 시야 한구석에는 음울한 잿빛의 연기로 둘러싸인 하나의 거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망자의 거성.
그것은 죽음의 땅을 지배하는 아크 리치의 거주지였다.
아크 리치는 생전 한 왕국을 지배하는 왕이었는데, 망자의 거성은 그러한 아크 리치가 생전 사용했던 궁전이 죽음에 잠식되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한편, 제로가 쓰러트린 본 골렘이 마지막이었는지 망자의 거성으로 향하는 길목엔 더 이상 언데드가 등장하지 않았다.
그저 생명력을 단 한 줌도 찾아볼 수 없는, 말라비틀어져 음울한 죽음만을 내뿜는 고목만이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후-.”
죽음의 거성 입구에 도착한 제로가 낮고 깊은숨을 토해 냈다.
망자의 거성의 지배자 아크 리치의 레벨은 900에 가깝다.
그것의 강함은 성룡급 드래곤을 죽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무식한 강함을 제로는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제로를 비롯한 수많은 랭커들이 아크 리치 레이드에 도전했다 뼈아픈 패배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만일 아크 리치를 회유해 허상계와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인류의 승리는 과거보다 비약적으로 상승할지도 몰랐다.
“그럼 들어갑니다.”
제로는 자신의 말에 네크로맨서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소의 긴장감을 품으며 성문에 손을 올렸다.
* * *
“여기가 망자의 거성의 내부…!”
망자의 거성에 들어가기 무섭게 한 네크로맨서가 입을 열었다.
그는 아니, 그뿐만이 아닌 망자의 거성 내부에 들어온 모든 네크로맨서들이 신기하다는 듯 거성 내부를 둘러봤다.
그것은 나이가 많든, 적든.
경지가 높든, 낮든 상관이 없었다.
‘저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지.’
애초에 잿빛 마탑의 네크로맨서들에게도 망자의 거성은 일종의 범접 불가의 영역이었다.
아크 리치가 언데드이긴 하나 네크로맨서들과 딱히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꽤나 불편한 관계라고도 볼 수 있었다.
네크로맨서들이 종종 새로운 언데드를 연구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들의 경지를 올리기 위해서 죽음의 땅의 언데드를 실험 재료로 사용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 긴장하십쇼.”
끄덕.
제로의 말에 풀어져 있던 네크로맨서들의 긴장감이 한껏 끌어 올려졌다.
그들 또한 자신들과 아크 리치 간의 관계가 썩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도망칠 곳이 언데드들의 천국인 죽음의 땅이었기에.
그리고 아크 리치가 네크로맨서와 가장 친숙한 언데드였기에 미약한 희망을 품고 찾아왔을 뿐이다.
제로를 포함한 네크로맨서 전원이 긴장 어린 표정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그들의 앞으로 잿빛의 기류가 뭉쳐 들며 쇠를 긁는듯한 기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음 속에서 진리를 갈구하는 자들이여.]
[나의 성에는 어쩐 일로 찾아온 것인가?]
제로. 그리고 네크로맨서들은 뇌리를 뒤흔드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이 아크 리치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무구한 시간 속에서 마법의 진리를 깨우친 자여.”
“부디 우리들의 목소리를 들어 주길 희망하는 바이네.”
갑작스런 아크 리치의 등장에 몇몇의 네크로맨서들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러한 네크로맨서들의 말에 아크 리치가 돌연 크하핫!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목소리를 들어 달라. 참으로 우스운 말을 내뱉는구나.]
[그대들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권속들을 하찮은 실험에 소비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과거를 지니고 있음에도 감히 나에게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이더냐?]
쿠르르-!
고작 분신체일 뿐임에도 잿빛의 기류가 내뿜는 존재감에 거성 자체가 뒤흔들렸다.
그러한 아크 리치의 강함은 가히 반신의 영역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편 네크로맨서들은 아크 리치의 진노 어린 목소리에 당황한 표정을 내비쳤는데, 그에 제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크 리치.”
[호-! 이건 또 무언가.]
[자네는 평범한 네크로맨서가 아니구나.]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하는 제로에 아크 리치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제로가 ‘평범한 네크로맨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눈치챘다.
“나의 이름은 제로. 죽음과 계약한 죽음의 대리인이다. 네놈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끌. 죽음의 대리인이라.]
[참으로 오만하도다.]
제로의 말에 아크 리치가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현시점에서 제로를 제외한다면, 가장 죽음의 대리자에 가까운 것은 네크로맨서가 아닌, 아크 리치였다.
허나 제로는 아크 리치의 비웃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취하지 않았다.
애초에 반신의 영역에 도달한 강함을 가지고 있다 한들, 아크 리치의 본질 또한 단순한 언데드.
죽음에 종속된 존재임은 틀림이 없었다.
그렇게 제로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아크 리치는 약간의 흥미가 일어남을 느꼈다.
[좋다.]
[스스로를 죽음의 대리자라 칭하는 오만한 이방인이여.]
[그리고 죽음 속에서 진리를 갈구하는 어리석은 생자들이여.]
[그대들의 청을 들어주도록 하지.]
[물론 그대들이 본 왕의 앞에 도달한다면 말이다.]
끌끌끌-!
말을 마친 아크 리치의 분신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망자의 거성이 뒤흔들리고, 사방에서 대량의 언데드가 쏟아져 나왔다.
네크로맨서들은 아크 리치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 주겠다고 한 것에 한 줄기 희망을 품었다.
허나 그 희망은 곧 쏟아져 나오는 언데드에 의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아크 리치가 사라지고.
망자의 거성이 뒤흔들리며 쏟아져 나오는 언데드들은 무엇 하나 얕잡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가장 약한 언데드마저 중급 언데드로 분류되는 구울. 그것도 아크 리치에 의해 개량되고 개량된 구울이었다.
특히나 그러한 언데드들을 지휘하는 것은 죽음의 기사라 불리는 최상위 언데드, 데스 나이트.
그리고 죽은 자들의 대마법사라 불리는 리치였다.
“칫. 모두 준비하세요!”
제로는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언데드에 버럭 외쳤다.
그러한 제로의 외침에 네크로맨서들이 허둥지둥 각자의 언데드를 소환하기 시작했다.
“그래, 쉽게 만나 주지 않는다 이거지. 하지만 말이야. 나도 시간이 없거든.”
스킬 사용, 어보미네이션.
스킬 사용, 명왕의 번견.
스킬 사용, 더미 본 드래곤 나이트.
제로의 등 뒤로 공간이 갈라지며 세 구의 망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제로가 강해짐에 따라 본래의 힘을 온전히 품게 된, 언데드 계의 파괴 전차라 불리는 어보미네이션.
하나는 역천의 의복을 구하러 갈 때 입수했던 케르베로스의 시체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명왕의 번견.
하나는 한때 제국의 황성에서 날뛰었던 이력을 지녔던 더미 본 드래곤 나이트였다.
“최대한 빠르게 돌파하도록 하지.”
말을 마친 제로가 손을 내리긋자, 세 구의 망자들이 움직였다.
어보미네이션은 그 거체와 압도적인 힘을 통해 사방에서 쏟아지는 언데드들을 박살 냈다.
명왕의 번견은 입으로는 명계의 냉기를 토해 내고, 앞발에 달려 있는 날카로운 발톱으로는 언데드들을 학살했다.
더미 본 드래곤 나이트는 본 드래곤과 나이트. 양쪽으로 나뉘어져 날뛰었다.
전투 준비에 한창이었던 네크로맨서들은 제로가 꺼내 든 세 구의 망자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 * *
“어떻게 할 거야?”
바삐 움직이던 신성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본 신성의 눈에 내비친 것은 거대한 대궁을 맨 궁수, 루나였다.
“넌 정말 그놈이 우리를 찾아올 거라 생각해?”
“그렇게 생각해요.”
“하-.”
신성의 대답에 루나가 낮은 숨을 토해 냈다.
신성은 그런 루나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내비치며 입을 열었다.
“적어도 제가 본 제로라는 사람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거야…!”
신성의 말에 뭐라 반박하려던 루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다 좋다 이거야. 근데 나머지 10강의 마스터들은 어떻게 모을 생각이야?”
“그거야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긴장감 없는 신성의 대답에 루나가 다시 한번 깊은숨을 토해 냈다.
신성은 그런 루나를 향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제 추측에 불과하지만 제로. 그 사람은 현실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