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이대로는 안 돼.”
서울 전역을 바삐 움직이며 허상괴들을 처리하던 강한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몸은 하나인데 허상괴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많이 잡아도 10초에 한 마리씩 허상괴들을 죽이고 있었지만, 그보다 빠른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렇게 강한이 초조해하고 있을 때, 돌연 머릿속으로 죽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멍청한 계약자 놈아.]
“왜 갑자기 시비야.”
죽음의 말에 제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하는 말이 뜬금없는 시비라니.
강한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죽음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네놈은 뭐냐?]
“뭐긴 뭐야. 나는….”
죽음의 말에 대답하던 강한이 입을 다물었다.
[너는 작게 보면 나 ‘죽음’의 계약자이며.]
[크고 넓게 보면 수천, 수만의 망자들을 거느리는 네크로맨서다.]
[설마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죽음의 말에 강한은 침묵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잊어버리고 있었다.’
갑작스런 허상괴의 침입에 강한은 자신이 네크로맨서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것을 죽음에 의해 깨닫게 되다니.
‘나도 아직 멀었네.’
[이제라도 알았으면 후딱 움직여.]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들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
“알고 있어.”
쩌억-!
짤막한 대답을 내뱉은 강한의 뒤로 공간이 갈라졌다.
짙은 심연을 품은 공간, 외차원의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 튀어나와 모든 ‘허상괴’들을 죽여 버려!”
강한이 외차원의 창고 내부를 바라보며 버럭 외치자, 짙은 심연 속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수천의 망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대한 빠르게 허상괴들을 정리하기 위해 꺼내든 망자들의 등급은 최소 준상급.
망자들은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서울 전역으로 퍼져 나가며 허상괴들을 사냥했다.
한편 허상괴들을 피해 도망치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언데드의 등장에 또 한 번 공포와 놀람 따위를 품었지만.
곧 그러한 언데드가 자신들을 지켜 주고 있다는 것에 의아함을 내비쳤다.
물론 모든 인간이 갑작스러운 언데드의 등장에 당황한 것은 아니었다.
“이건 학살자 제로의 언데드?”
넘어진 노파를 지키기 위해 허상괴와 사투를 벌이던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로스트 월드 내에서 랭커로서 나름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갑자기 등장한 언데드. 특히나 검은 뼈로 이루어진 스켈레톤이 최강의 유저라 불리는 학살자 제로의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역시 그 또한 로스트 월드 내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조용히 중얼거린 그가 털썩 주저앉았다.
학살자 제로가 얼마나 많은 언데드를 풀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움직였다면 더 이상 위협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서울 곳곳에 퍼져 사람들을 유린하고, 학살하던 허상괴들은 강한이 소환한 망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 * *
갑작스레 등장한 최하급 허상괴들이 모두 정리되고 반나절.
플라이 마법을 통해 구름 위에 서 있는 강한은 한 건물을 내려다봤다.
그 건물은 흔히 푸른 집이라 불리는, 대통령이 기거하는 청와대였다.
한참 동안 청와대를 내려다보던 강한은 다시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그런 강한의 두 눈에 내비친 것은 거대한 금이었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져 있는 그것은 무척이나 미세해 강한 정도가 아니라면 눈치조차 채지 못할 정도였다.
“너무 빨라.”
허공을 뒤덮은 금을 바라보며 강한이 중얼거렸다.
아직 허상계가 침공하기에는 시간이 남았다.
그럼에도 벌써 기백의 허상괴들이 지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백이란 숫자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한정했을 뿐, 전 세계적으로 보자면 수천의 허상괴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나 때문에 미래가 변했어.”
미래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작금의 상황은, 당장 내일이라도 본격적인 허상계의 침공이 시작된다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진실을… 알려야겠어.”
한참 허공에 새겨진 금을 지켜보던 강한의 몸이 훅! 하며 사라졌다.
플라이 마법을 풀어 버린 강한의 몸은 지상으로 추락하다 우뚝! 멈췄다.
그런 강한이 멈춰 선 장소는 청와대 입구였다.
“정지, 이곳은 외부인 출입 금…!”
강한이 청와대 내부로 들어가려 하자, 경비원이 다가와 제재했다.
허나 강한의 앞에 선 경비원은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멀리서 볼 땐, 단순히 빼빼 마른 사람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서 본 그 육신은 전혀 달랐다.
경비원이 본 제로는 피부와 근육. 살점 따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장기 또한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육신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단순히 검게 물든 뼈뿐이었다.
특히나 푹 눌러 쓴 후드 속은 짙은 잿빛의 연기가 뭉쳐 그 속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다만, 그 모습은 묘하게 익숙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학살자 제… 로…?”
경비원 또한 로스트 월드를 즐기던 한 명의 유저였던 것일까?
그는 갑작스레 나타난 괴한 아니, 괴물이 한창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한 ‘학살자 제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정말 학살자 제로 님이십니까?”
“그렇다면?”
이어진 경비원의 물음에 강한이 입을 열었다.
일부러 변조를 통해 쇠를 긁는 듯한 듣기 싫은 목소리가 강한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아! 그, 그게…! 사,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상에서 들었던 것과는 다른 목소리에 당황하기도 잠시. 경비원은 곧 고개를 숙이며 강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 또한 갑작스레 등장한 허상괴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강한이 소환한 망자들에 의해 목숨을 건진 사람이었다.
그런 경비원의 감사 인사에 강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되겠지?”
“죄송합니다. 아무리 제로 님이라고 한들, 청와대에는 들어오실 수 없습….”
털썩.
말을 하던 경비원이 돌연 쓰러졌다.
강한은 쓰러진 경비원을 지나쳐 청와대 내부로 들어갔다.
그를 죽인 것은 아니다. 그저 잠시 재웠을 뿐.
강한은 로스트 월드에서야 강해지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질렀지만, 현실에서까지 사람을 죽일 정도로 막나가지는 않았다.
청와대 내부에는 수많은 사람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갑작스러운 사태에 혼란스러워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개중 몇몇은 강한이 누구인지 알아봤으며, 몇몇은 강한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음에도 그 외형에 놀람을 표출했다.
강한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깔끔히 무시하며 걸어 나갔다.
강한의 목적지는 대통령이 있는 방.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흠.”
강한은 방의 입구에 도착하기 무섭게 슬쩍 자신의 몸을 훑어봤다.
내려다본 자신의 육신은 더 이상 인간이었을 때의 그것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나마 역천의 의복이라도 있었다면 다행이겠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죽음의 옷자락 외에는 로스트 월드 속 아이템을 구현할 수 없었다.
결국 강한은 현실에서조차 ‘인간’이 아닌, ‘망자’가 되어 버렸다.
“뭐 딱히 신경 쓰지는 않는다만…,”
애초에 인간이었을 때의 몸뚱어리에 큰 애착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몸뚱어리가 해골이 되든, 말든 강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가 볼까.”
잠시 심호흡을 한 강한이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로 내비쳐진 방 내부에는 수많은 사람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대통령을 필두로, 티비에서만 보던 사람들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은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저벅. 저벅. 저벅.
열린 문을 통해 나타난 강한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중앙으로 걸어가자.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강한을 향해 쏠렸다.
그들은 갑자기 등장한 강한에 놀랐으며, 강한이 인간이 아닌 검은 뼈로 이루어진. 어떻게 보면 갑자기 등장해 사람들을 학살했던 허상괴와 비슷한 괴물이라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겨, 경비! 경비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의자에 앉아 있던 대통령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강한을 향한 대통령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것은 공포였으며,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편, 굳이 대통령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갑작스러운 강한의 난입에 청와대 내부에 상주하고 있던 경비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강한은 다수의 기척이 가까워짐에 쯧!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에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려 있던 방의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나아가 그 누구도 열 수 없게 ‘락’ 마법이 새겨졌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봉쇄된 문.
한 공간에 자리 잡은 검은 해골.
방 내부에 자리 잡은 사람들 모두가 죽음을 떠올리고 있을 때, 한 청년이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강한은 그의 질문에 대통령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제로. 흔히 학살자 제로라 불리는 로스트 월드의 유저다.”
로스트 월드?
그 게임의?
아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학살자 제로.
로스트 월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단, 한 가지 문제라면 좋은 의미로 유명한 것이 아닌, 나쁜 의미로 유명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직업은 네크로맨서 계열의 히든 클래스.
지금까지 로월을 플레이하며 쌓아 올린 악명치는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으며, 현재 진행형으로 수많은 유저를 학살해 온, 말 그대로 ‘학살자’.
그것이 제로에 관한 유저들의 시점이었다.
그런 제로가, 게임 속 모습을 하며 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제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강한은 그들의 생각을 눈치채며 입을 열었다.
“너무 겁먹지 마. 현실에서까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정도로 막나가지는 않으니깐. 그리고 애초에 내가 소환한 망자… 아니, 언데드들로 목숨을 건지지 않았어?”
강한의 말에 대통령실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보다 너희들에게. 아니, 전 인류에게 밝혀야 할 것이 있다.”
* * *
“그래서, 자네는 왜 여기에 온 것인가?”
“말했잖아. 너희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대통령의 질문에 강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찌 보면 무례하다 할 수 있는 강한의 태도에, 몇몇 사람들이 울컥! 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허나 그들은 강한을 향해 뭐라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
인간이 아닌, 검은 뼈로 이루어진 외형. 그와 동시에 푹 눌러쓴 후드 속은 잿빛 연기로 가득 차 있다.
그 인외의 모습이 그들에게 공포 아닌 공포를 심어 줬다.
그나마 대통령은 뭔가 다르다는 것일까.
그는 강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알려야 할 것이라. 그게 무엇인가?”
“이번에 나타난 괴물에 대해서.”
“놈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가!”
“알다마다.”
강한의 말에 놀란 대통령이 벌떡 일어났다.
몇몇 사람들 또한 괴물, 허상괴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하는 제로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놈들의 이름은 허상괴. 본래라면 몇 년 뒤에 나타나야 할…,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다.”
허상괴.
다른 차원의 존재.
몇 년 뒤에 나타났어야 할 존재들.
그러한 강한의 말에 대통령은 물론, 대통령실에 있던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겐가?”
“믿고 안 믿고는 자유야.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절대 허구가 아니며. 이미 인류의 멸망을 향한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다는 게 문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