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미친….”
한 유저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제로의 데스 로어에 휘말린 대부분의 유저들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유저들은 각 길드에서 차출된 정예 중의 정예. 혹은 각기 랭커로 활동하는 길드 마스터뿐이었다.
허나 살아남은 유저라 한들 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쿨럭-!”
한 유저가 한 움큼 붉은 피를 토해 냈다.
데스 로어 속에서 살아남았다 한들, 정신과 내장이 뒤흔들려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
그저 ‘죽지 않았다’일 뿐, 어찌 보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학살자 제로….”
“최강의 유저라 손꼽히는 이유가 있었어.”
“하지만 이 정도로 강력한 스킬이라면 그 페널티는 만만치 않을 터.”
살아남은 유저들 중, 대체적으로 상태가 멀쩡한 유저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개중 한 유저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죽어라-!”
“죽여 버려!”
열댓 명의 유저들이 동시에 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름 10강의 정예들이라는 걸까.
그들은 순식간에 제로를 포위하며 무기를 휘둘렀다.
검과 창. 도끼와 메이스.
화살과 암기. 마법까지.
다종다양한 공격들이 제로의 목숨을 노렸다.
제로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며 다가오는 수많은 공격에 아무런 반응조차 취하지 않았다.
‘놈은 반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야!’
‘반응할 수 없는 것이다!’
공격을 가한 유저들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제로를 죽인다면, 그 공적을 인정받아 순식간에 소속된 길드의 간부 자리까지 노려볼 수 있다.
그러한 생각에 유저들의 눈이 흐려졌을 때….
퍼억-!
쿠당탕!
제로의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오는 순간, 공격을 가하던 유저들이 튕겨져 절명했다.
날아오던 화살은 박살 나고, 마법은 거대한 그림자에 가로막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건-!”
“케르베로스!”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길드 마스터들이 놀라 외쳤다.
제로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그림자, 그것은 전신이 무수히 많은 흉터로 뒤덮인 케르베로스였다.
“저 괴물 새끼!”
“어떻게 케르베로스를 사역한 거야!”
케르베로스는 600레벨의 보스 몬스터로 잘 알려져 있다.
말이 600레벨이지, 보스 몬스터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 강함은 700레벨에 필적한다.
그 강력함에 무수히 많은 테이머나 마물술사들 따위가 케르베로스의 사역에 도전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한 괴물이 제로라는 유저의 앞에 앉아, 순한 개처럼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제로는 자신의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케르베로스의 배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귀엽지? 나는 명왕의 번견이라 불러. 딱히 이름은 없고.”
“크흠.”
제로의 말에 한 길드 마스터가 낮은 헛기침을 터트렸다.
나머지 유저들 또한 다소 착잡한 눈으로 제로와 케르베로스를 바라봤다.
“옛날에 우연히 이놈의 시체를 입수할 수 있어서 말이야. 내 나름대로 개조를 좀 해 봤지. 아마 레벨로만 따지자면 750에 필적할 거야.”
750!
현 최상위 랭커들이 이제 막 530레벨을 돌파한 것을 생각해 볼 때, 750레벨은 밸런스 붕괴나 다름없는 수치였다.
“그나저나 어느 정도 정리가 됐네.”
입을 연 제로가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유저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유저들은 무슨 짓을 한다 하더라도 제로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럼 잠시 대화 좀 나눌까?”
* * *
“지금 그 말을 우리보고 믿으라는 거냐?”
10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제로의 말을 들은 유저 한 명이 버럭 외쳤다.
그는 10강 중 하나인 헌터 길드의 길드 마스터, 룬이었다.
룬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다른 유저들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있으면 지구에 괴물들이 쳐들어올 거라고? 유저들은 로스트 월드의 힘을 각성하고? 구라도 정도껏 쳐야 믿어 주지, 이건 뭐 개소…!”
“한 가지만 물어볼게.”
뭐라 뭐라 외치는 룬의 말을 자르며 제로가 입을 열었다.
제로의 행동에 룬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중에도 있을 거야. ‘현실’에서 ‘괴물’과 만나 본 녀석이 말이야.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힘을 발휘한 녀석들이.”
…….
제로의 말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제로의 말 대로였다.
몇몇 유저들은 하나하나 훑어보는 제로의 시선을 피했는데, 그들은 현실에서 괴물을 맞닥뜨린 경험이 있었다.
아니, 마치 로스트 월드 속 몬스터를 떠올리게 하는 그것들을 만나 싸워 승리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너무나도 익숙한. 자신들이 로스트 월드라는 게임에서 다뤘던 힘으로.
“있지?”
크흠.
커허험.
확신에 찬 제로의 말에 시선을 피했던 유저들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허나 허상괴를 직접 만나보지 못한 유저들.
그리고 로스트 월드 속 힘이 현실에까지 적용되지 않은 유저들은 여전히 제로를 미친놈처럼 바라봤다.
그렇게 제로와 유저.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이 어느 정도 이어졌을까….
“혀, 형!”
뒤에서 누군지 모를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던 유저.
한때 제로에게 패해 목숨을 잃었던 적이 있는 어쌔신 마스터, 쉐도우가 다급히 룬을 향해 외쳤다.
“야! 여기선 마스터라 부르라 했잖아!”
서로 친형제인 걸까?
쉐도우의 외침에 룬이 당황하며 버럭 외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일단 이걸 좀 봐 봐!”
“아, 새끼. 진짜 눈치를 어디다 팔아먹은 거… 야….”
쉐도우를 향해 불평불만을 터트리던 룬의 입이 다물어졌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쉐도우가 오픈한 정보를 훑어보던 유저들 모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벌써 허상괴가 나타났다고?’
제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쉐도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제로 또한 시스템을 조작해 로월 정식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충격적인 정보를 목격했다.
그것은 바로 전국 곳곳에서 허상괴들이 출몰했다는 정보였다.
나타난 것은 과거 제로가 죽인 적이 있었던 최하급 허상괴였지만, 그 숫자는 실시간으로 늘어나 벌써 100여 마리에 가까워졌다.
그것에 관한 글을 한 명이 올렸다면 제로 또한 무시했겠지만, 우후죽순으로 올라오는 글은 벌써 수백 개를 돌파했다.
또한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양, 뉴스나 인터넷 기사 따위에서도 갑작스레 나타난 허상괴를 다루고 있었다.
“미치겠네. 어이.”
제로의 부름에 몇몇 유저들이 시선을 옮겼다.
“3일 뒤, 내가 직접 시작의 도시로 찾아간다. 이곳에 없는 10강의 길드 마스터들에게도 말 전하고, 알아서 모여 있어. 그때 모든 ‘진실’을 알려 주지.”
통보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제로는 망설임 없이 로그아웃했다.
우선은 갑작스레 나타난 허상괴들 먼저 처리해야 했다.
* * *
푸쉭-!
캡슐이 열리며 제로, 강한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강한은 다급히 움직이며 창밖을 내다봤다. 창밖의 풍경은 전쟁이라도 일어난 양, 난리도 이런 난리가 아니었다.
몇몇 건물들은 박살이 나고, 불이 붙어 짙은 연기를 토해 냈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허상괴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그나마 경찰들이 총을 쏘아 대며 허상괴들을 상대했지만, 그들의 공격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최하급이라 하더라도 허상괴는 허상괴.
그것들은 몸에 틀어박히는 권총의 총알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도망치는 인간들을 유린했다.
“이 쓰레기 새끼들이!”
뿌득!
수많은 사람이 장난감처럼 유린당하다 죽어 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강한이 강하게 이를 갈았다.
그런 강한의 몸뚱어리에서 짙은 죽음이 뿜어져 나오며, 육체 곳곳이 썩어 문드러져 흑골이 내비쳐졌다.
그러한 육체 위로는 로스트 월드 속에서 애용하던 장비, 죽음의 옷자락이 덧씌워졌다.
“모조리 죽여 주마.”
츠즛-!
분노 어린 중얼거림을 내뱉은 제로의 신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집에서 사라진 제로가 나타난 장소는 막 넘어진 여자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허상괴의 뒤였다.
“죽어.”
스윽.
푸부북-!
조용히 중얼거린 강한이 손을 내리긋자, 허공에 만들어진 흑골의 화살이 쏘아져 허상괴의 몸뚱어리를 꿰뚫었다.
핵이 박살 나 버린 허상괴는 순식간에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것이 로스트 월드와 현실의 차이점이었다.
로스트 월드 내에서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선, 특수한 스킬을 익히거나 한 것이 아니라면 필수 불가적으로 스킬의 이름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달랐다.
어느 정도 요령이 필요하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딱히 스킬의 이름을 외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스킬을 사용하기 위한 마나 따위와, 그것을 발현하겠다는 의지만 충분하다면 충분히 스킬 혹은 마법의 사용이 가능했다.
“아! 가, 감사합…!”
“당장 도망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여자가 강한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허나 강한은 그녀의 감사 인사를 대충 넘기며 다시 움직였다.
아직 허상괴의 숫자는 많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 가고 있었다.
까드득.
푸확-!
이를 간 강한의 몸에서 뿜어진 죽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 죽음은 서울 전역을 뒤덮었지만, 매우 옅어져 곤충 한 마리 죽이지 못할 정도였다.
허나 죽음을 퍼트린 이유는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비록 서울이라는 한정된 공간밖에 커버하지 못했지만, 그 속에서라면 어디에 허상괴가 있는지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총 58마리인가.”
아무래도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서울이기 때문일까.
갑작스레 나타난 최하급 허상괴들은 전국에 퍼져 있지만, 그 숫자는 서울이 가장 많았다.
서울 전역으로 퍼진 죽음에 의해 허상괴들의 위치는 측정됐다.
이제는….
“모조리 죽여 주마.”
조용히 중얼거린 강한의 몸이 다시 한번 사라졌다.
블링크를 통해 사라진 강한이 가장 먼저 나타난 장소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달동네였다.
그곳에서는….
으아아앙! 아빠!
하윤아! 도망쳐! 얼른 도망쳐!
아버지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울고 있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허상괴와 맞서고 있었다.
손에는 어디서 구한 것인지 모를 쇠 파이프를 쥐고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지만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쇠 파이프를 휘두르는 중년의 몸은 장난스레 휘둘러지는 허상괴의 손톱에 의한 상처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울고 있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허상괴의 앞을 가로막았다.
강한은 그런 중년 남성의 뒤에 나타나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고생하셨습니다.”
파앗-!
강한의 손에서 흘러나온 하얀 빛이 중년 남성의 몸에 깃드는 순간, 그의 몸에 새겨져 있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한편 ‘사냥’을 즐기고 있던 최하급 허상괴는 갑작스런 강한의 등장에 한껏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본능적으로 갑자기 나타난 강한이 자신과 비교해 압도적인 강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강한은 그렇게 주춤거리는 허상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죽어.”
푸욱-!
순식간에 만들어진 흑골의 망치가 허상괴를 짓이겼다.
전신이 짓뭉개진 허상괴는 당연하게도 핵 또한 박살 났으며, 처음의 그것과 같이 순식간에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허상괴를 처리한 강한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강한의 두 눈에 공포와 감사. 당혹감 따위의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인 부자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강한은 그런 부자를 잠시 바라보다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