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네놈은…?”
갑자기 튀어나온 기사에 제로의 두 눈동자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기사는 순백의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치고, 투구까지 뒤집어썼다.
한 손에는 갑옷과 마찬가지로 순백의 검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영락없는 성기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성기사는 아니야.’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외형은 영락없는 성기사였지만, 풍기는 기운은 신성력의 그것과 한없이 달랐다.
눈앞의 기사가 풍기는 기운은 좀 더 자애롭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런 류의 기운이었다.
“아니, 실언했군. 그래 봤자 어리석은 이방인일 뿐이…!”
“학살자 제로.”
성기사의 말에 제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날 알고 있어?’
지금까지의 행적을 본다면, 자신이 학살자 제로라는 것을 다른 유저가 알아보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역 십자가가 새겨진 검은 신부복이며, 다수의 칼날과도 같은 무언가가 달려 있는 로브, 죽음의 옷자락은 학살자 제로의 아이덴티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제로라는 걸 알아낸 거지?’
지금의 모습은 유저들에게 알려진 것과는 달랐다.
죽음의 옷자락의 칼날과도 같은 부분들은 숨겨져 있다.
역 십자가가 새겨진 검은 신부복, 역천의 의복 또한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제로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순백의 기사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학살자 제로. 밝혀진 직업은 네크로맨서 계열 히든 클래스. 허나 그 본질은 네크로맨서.”
“그래서?”
정체를 들킨 이상, NPC 흉내를 내는 것은 꼴사납다.
제로는 기사의 말에 도리어 당당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산 자의 생명을 희롱하고, 죽은 자의 죽음을 희롱하는 네놈을. 모든 네크로맨서를 생명의 의지 아래 단죄하겠다.”
쾅-!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가 움직였다.
기사는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수 미터를 쭉쭉 나아가며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죽어라.”
후웅-!
기사의 손에 쥐어진 순백의 검이 휘둘러졌다.
묵직한 파공음을 동반하며 휘둘러지는 그것은 정확히 제로의 목을 노렸다.
“칫.”
스킬 발동, 데스 본 실드.
제로는 목을 노리며 휘둘러지는 기사의 검에 뒤로 물러나며 마법을 사용했다.
카가각-!
물러나는 제로의 앞으로 흑골의 방패가 모습을 드러냈으며, 기사의 검은 그러한 데스 본 실드에 막혀 튕겨져 나갔다.
“너도 제국의 척살령 때문에 날 찾아온…!”
“생명의 무게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쓰레기와는 대화하지 않는다.”
후웅-!
콰앙!
제로가 뭐라 말하려 했으나, 기사는 듣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제로의 목숨을 노리며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기사의 검에는 신성력과 비슷한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흔히 파마, 파사의 기운 하면 신성력이 최고라고 알려져 있다.
제로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었어.’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파마, 파사에 한정한다면 눈앞의 기사가 품고, 다루는 기운이 신성력보다 더욱 강력했다.
그 증거로, 기사의 검에 살짝살짝 스치기만 해도 베인 상처로부터 짙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대화가 안 통하네.”
스킬 발동, 더미 블링크.
스킬 발동, 외차원의 창고.
쩌억-!
더미 블링크를 통해 거리를 벌린 제로는 망설임 없이 외차원의 창고를 열었다.
상대는 어지간히 로월에 몰입한 컨셉충이다.
저런 류의 상대는 한번 배역에 빠지면, 주변의 것은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여 버리는 편이 더욱 좋았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잿빛 마탑으로 가야 한다.’
스킬 발동, 망자의 대군단.
우르르-!
제로의 등 뒤로 열린 외차원의 창고에서 수천의 망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 하나가 검게 물들어 있는 망자들이 쏟아지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해일이 들이닥치는 듯한 착각마저 자아냈다.
“삶과 죽음을 희롱하고, 도구로 사용하는 네놈들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생명의 의지 아래 단죄를 맞이해라.”
스카가각-!
기사의 검이 한 번,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수백의 망자들이 썰려 나갔다.
검에 깃들어 있는 기운의 영향 때문인지, 망자들은 기사의 검에 한 번 베이면 움직이지 않았다.
어지간한 성기사의 공격에도 버티는 망자들이 ‘단순한’ 칼질에 썰려 나가는 모습에 제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쳇.’
완벽한 상성.
완벽한 천적.
눈앞의 기사를 표현하는데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적들 중, 힘겹지 않은 상대가 있었던가?’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회귀하기 전에도.
그리고 회귀를 한 지금도.
제로는 언제나 스스로보다 강한 적을 상대해 오며 성장했다.
이제 와서 망자들이 칼질 한 번에 썰려 나가는 모습에 기죽을 제로가 아니었다.
“데이버그 때문에 힘을 제한당하긴 했지만….”
제로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연구실 구석에 나뒹굴고 있는 데이버그를 흘겨봤다.
데이버그는 그런 제로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그렇다고 해서 네놈 하나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후웅-!
콰직!
제로의 등 뒤로 거대한 흑골의 창이 나타나며 쏘아졌다.
순백의 기사는 자신의 머리를 노리며 쏘아진 흑골의 창, 데스 본 스피어를 향해 비어 있는 왼손을 내뻗었다.
“생명의 축복 아래, 죽음은 이 몸을 침범할 수 없을지니.”
스킬 발동, 생명의 방패.
쩌엉-!
일직선으로 나아가던 데스 본 스피어가, 기사의 앞에 나타난 초록빛 방패와 충돌하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 모습에 제로의 미간이 다시 한번 찌푸려졌다.
데스 본 스피어는 나름 애용하던 마법이다.
그에 따라 나름의 숙련도 또한 쌓여 있었기에, 이러듯 쉽게 박살이 날 마법은 아니었다.
역시나….
‘저 기운이 거슬려.’
순백의 기사가 다루는 기운이 너무나도 거슬렸다.
생명 어쩌고 하는 것과, 스킬 명에도 생명이 붙은 것을 보아하니 자신이나 네크로맨서들이 다루는 죽음과는 정반대되는….
[생각났다.]
제로가 맹렬히 두뇌를 회전하고 있을 때, 돌연 머릿속에 죽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가 생각났다는 거야?’
[저 인간이 다루는 기운.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그녀였어.]
‘그녀?’
아리송한 죽음의 말에 제로의 의구심이 더욱 깊어졌다.
[내가 죽음이라면 그녀는 말 그대로 생명이다.]
[설마하니 그녀 또한 이곳에 개입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깐 그녀가 누구냐고!’
[말했잖아.]
[내가 ‘죽음’이라면 그녀는 말 그대로 ‘생명’이라고.]
죽음의 말에 제로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즉, 눈앞의 기사는 자신이 죽음과 계약한 것처럼 생명이라 불리는, 죽음과는 대척점에 위치한 존재와 계약했다 이건가?
그리고 퀘스트로 네크로맨서 사냥 퀘스트를 받았고?
“미치겠네.”
어느 정도 잡혀 가는 윤곽에 제로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한시라도 빨리 잿빛 마탑을 향해 가야 하는데.
아니, 저주왕 데이버그와의 일전만 아니었어도 눈앞의 유저 따위.
아무리 생명과 계약했다 한들 순식간에 처리할 자신이 있었는데.
“생명의 의지 아래 삶과 죽음을 희롱하는 자에게 단죄를.”
스킬 발동, 생명의 바람.
후웅-!
치이이이익!
기사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미풍이 닿자, 제로의 전신에서 잿빛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구실을 가득 메운 바람에는 신성력보다 더욱 순수한 생명의 기운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제로조차 바람에 닿기 무섭게 몸을 비틀거렸다.
평범한 망자들은 이 바람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증거로, 외차원의 창고에서 쏟아져 나오는 망자들은 바람에 닿기 무섭게 바스라지며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젠장!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눈앞의 기사를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던전을 버린다.’
망자의 연구실은 분명히 유용했다.
온갖 종류의 망자들을 연구하고,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조금만 더 시간을 투자하고, 제작서만 구한다면 키메라 또한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의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
그렇지만 목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다소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여기서 눈앞의 기사에게 죽는다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특히나 자신이 계약한 죽음과는 대비되는 생명이란 존재와 계약한 것으로 보아, 놈에게 죽는다면 다른 유저에게 죽는 것 이상의 데스 페널티를 받게 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 캐릭터가 삭제될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그럴 순 없지.’
생각을 정리한 제로가 기사를 바라봤다.
기사 또한 미친 듯이 휘두르던 검을 거두며 제로를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내가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결착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어.”
“다음은 없다. 네놈은 여기서 소멸한다.”
제로의 말에 대답한 기사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지금까지 한 손으로 휘두르던 검을 두 손으로 잡은 기사의 전신에서 날카로운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잘 벼려진 한 자루 칼날을 연상케 하는 투기에 제로는 전신이 저릿저릿해짐을 느꼈다.
‘단순한 게임으로 인식하는 유저의 투기가 아닌데?’
로월에 얼마나 과몰입을 한 것일까?
이 정도의 투기는 과거 허상계의 침입이 있었을 때 활동하던 유저들에게서나 느낄 법한 투기였다.
뭐, 달리 말한다면….
‘이 정도로 로월에 과몰입할 정도라면 훗날 전쟁에서 크나큰 도움이 되겠지.’
물론 지금 자신이 살아 도망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여기서 죽는다면 허상계와의 전쟁이고 뭐고,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말했다시피 난 이만 가 볼게.”
“도망칠 수 없…?”
말을 이어 가던 기사의 입이 멈췄다.
동시에 투구 사이로 내비쳐지는 기사의 두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도 그럴 것이….
스킬 발동, 자폭 시스템 가동.
자폭 시스템 가동.
이것은 던전 마스터만이 사용 가능한 스킬로 말 그대로 자폭이었다.
던전의 핵을 폭발시켜 말 그대로 적과 같이 죽겠다는 마인드가 없다면 사용할 수 없는 스킬.
다만, 자폭인 만큼 그대로 폭발해 버린 던전의 핵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즉, 자신이 애지중지 키워 온 던전을 ‘버린다’라는 뜻이 되는 스킬이었다.
“그럼 바이바이.”
스킬 발동, 긴급 탈출.
연계기, 긴급 탈출.
자폭 시스템을 가동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는 스킬로, 던전 마스터를 던전의 입구로 이동시키는 스킬이다.
아무리 자폭계 스킬이라지만 던전 마스터까지 같이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제로가 긴급 탈출을 통해 사라지자, 순백의 기사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검을 회수했다.
“학살자 제로. 삶과 죽음을 희롱하는 네놈에게 반드시 생명의 의지 아래 단죄를 내려 주마.”
그 말을 끝으로, 순백의 기사는 던전의 핵의 폭발에 휩싸인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끄아아아악!
으악!
제기랄! 제국의 번견들에게 죽음의 축복을!
모든 네크로맨서들을 죽여라!
우아아아!
죽여라! 죽여!
모조리 죽여 버려라!
광활한 평야에 두 개의 무리가 대치하고 있었다.
한쪽은 네크로맨서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언데드의 군세였으며.
한쪽은 유저와 제국 소속 NPC들로 이루어진 군세였다.
그곳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당연 신성 길드의 길드 마스터, 자애의 성자 신성이었다.
그의 신성 마법이 발동할 때마다 네크로맨서들이 소환한 언데드가 쓸려나갔다.
그 외에도 10강이라 불리는 길드 대부분이 네크로맨서 추격에 따라붙었으며, 그 이상으로 수천, 수만의 유저들이 척살령 퀘스트를 받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서 그나마 네크로맨서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잿빛 마탑의 마탑주, 네크로 마스터 베드로 덕분이었다.
그의 강함이 아니었다면, 네크로맨서들은 지금까지 그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허나….
“허허, 설마 자네들이 나섰을 줄이야.“
도망에 열중하던 베드로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기사들에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