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후우….”
바닥에 주저앉은 제로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의태의 반지를 착용해 인간의 모습을 한 제로의 앞에는 저주왕 데이버그가 나뒹굴고 있었다.
[크흐-.]
[대단하구나.]
바닥을 나뒹구는 저주왕 데이버그가 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방심해서 당한 것일까?
아니다.
저주왕 데이버그는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말로는 제로를 밑으로 봤으나, 속으로는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패배했다.
비장의 패였던 저주의 정령까지 꺼냈음에도 패배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제아무리 네크로 마스터라 하더라도 영혼마저 다룰 순 없다.]
[네놈은 평범한 네크로맨서가 아니로구나.]
영혼.
그것이 문제였다.
상대는, 놈은 영혼을 다루었다.
공허한 눈구멍에 떠오른 붉은 흉안을 본 순간, 데이버그는 이제는 잊어버렸다 여겼던 공포를 떠올렸다.
“내가 좀 특이하긴 하지.”
제로는 데이버드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영혼 그 자체를 간섭하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평범한 네크로맨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마스터 레벨이라 불리는 네크로맨서. 아니, 반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데스 로드는 되어야 가능하다.
그럼에도 제로는 영혼을 다룬다.
그리고 영혼을 지배하며, 영혼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도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평범한 네크로맨서가 아닌, 죽음과 계약했기 때문이겠지.’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 직업은 대단했다.
양학용 직업이라 불리는 네크로맨서와는 격이 다른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확실히 데이버그쯤 되는 영혼에 간섭하는 건 부하가 심하네.’
제로가 속으로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데이버그를 제압해 노예의 낙인을 새긴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반동으로 제로는 반나절 동안 본래 힘의 50%가 봉인되었다.
그나마 이곳이 망자의 연구실, 제로가 던전 마스터로 있는 장소였기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고 평범한 필드나 마을 따위였다면 꽤나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제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콰앙-!
돌연 연구실의 문이 폭발하며 짙은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런 흙먼지에선….
“콜록콜록! 아 진짜!”
“그냥 평범히 열자니깐!”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파티가 먼지를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두 명의 성기사와 네 명의 사제로 이루어진 다소 특이한 파티였다.
문제는 그러한 파티를 하고 있는 유저들이 짜증 나는 신성 길드 소속이라는 것이다.
“럭키.”
먼지를 헤치고 나온 유저 한 명이 제로와, 바닥을 나뒹구는 저주왕 데이버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내가 말했지? 여기에 분명 네크로맨서가 있을 거라고.”
“근데 저거 리치 아니야?”
“리치는 개뿔. 여기 적정 레벨이 300이야, 300. 그냥 스켈레톤 메이지나 스켈레톤 세이지겠지.”
한 성기사의 말에 사제 한 명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한편 제로는 갑작스러운 유저들의 난입에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오는 길목에는 각종 망자들과 함정을 배치해 뒀다.
특히나 4층에는 나름 자신작이라 할 수 있는 콥스 나이트 3구와 수백의 망자들을 배치했다.
그러한 망자들을 뚫고 여기까지 올 정도라면, 저들의 강함은 어지간한 유저들 그 이상이라 볼 수 있었다.
‘이거 안 좋은데.’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재 제로는 데이버그와의 전투의 여파로 힘의 50%가 봉인되었다.
거기에 의태의 반지까지 끼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저들을 상대하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특히나 저들은 5층의 연구실까지 오기 위해 수백, 수천의 망자들을 상대한 것치고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다.
‘역시나 신성 길드인 건가.’
거기까지 생각한 제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우선 최대한 자신의 정체가 학살자 제로라는 것을 숨겨야 했다.
아니, 자신이 유저라는 것 또한 숨겨야 했다.
“이방인들이 나의 연구실에는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푸핫-! 저 새끼 무게 잡는 거 봐라.”
“꼴에 몬스터 아니랄까 봐.”
제로의 질문에 유저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제로는 속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비쳤다.
이걸로 됐다.
놈들은 지금 자신을 완전히 ‘던전의 보스 몬스터’로 인식했다.
한편, 6명의 유저들 중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퀘스트… 아니지. 니들 식으로 말하자면 현재 제국에서 척살령이 떨어졌거든. 모든 ‘네크로맨서’들을 죽이라는 척살령이 말이야.”
“척살… 령…?”
유저의 말에 제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째서 제국이 그러한 척살령을 내린 것일까?
아니, 굳이 고민할 것도 없었다.
‘현자의 시체를 구하기 위해 그 난리를 피웠으니, 불똥이 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렇다면 시작의 도시에 있는 잿빛 마탑은 어떻게 되었을까?
푸른 마탑이나 검은 마탑과 같이 대놓고 활동하지 않았으니 아직은 무사한 것일까?
아니면 황제의 칼에 벌써 썰려 나갔을까.
“그렇다면 잿빛 마탑은 어떻게 되었는가?”
“잿빛 마탑…? 아! 그 땅굴? 거기야 벌써 진즉에 처리했지.”
“으음.”
유저의 대답에 제로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정보를 너무 풀었다.’
유저들의 성장을 위해 로월정보통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온갖 정보를 풀었다.
개중에는 당연하게도 잿빛 마탑에 관한 정보 또한 있었다.
나름 네크로맨서로 전직한 유저들을 위해 풀었던 정보였는데,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아니, 잿빛 마탑에 있는 네크로맨서들은 하나, 하나가 일당백이나 마찬가지여서. 현 유저들의 강함으로는 그들을 전부 토벌할 수 없을 터.’
그렇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이미 제국에서 척살령이 내려진 이상, 그들은 평생 도망자 신분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언제, 어디서 목에 칼날이 드리워질지 모르는 생활을 해야 된다.
하지만 지금은….
“이방인들이 오만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오만할 줄이야. 고작 네놈들의 힘으로 잿빛 마탑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그건 걱정하지 마. 우리만 움직인 것이 아니거든.”
“우리는 일종의 별동대야.”
“필드나 던전 곳곳에 숨어 있는 네크로맨서들을 사냥하는 별동대. 느그 본진은 지금 제국의 병사들이 쑥대밭으로 만들었을걸?”
승리를 자신하는 것인가.
술술 정보를 풀어놓는 유저들의 목소리에는 자신들이 절대 패배하지 않으리라는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제국이 움직였다라. 한번 마탑에 들러야겠구나.”
“아, 걱정하지 마. 우리가 친히 에스코트해 줄 테니.”
“물론 네놈의 대가리만 말이야!”
쾅!
한 성기사가 바닥을 박차며 제로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방패를 앞세워 돌진하는 그것은 마치 산이 무너지는 듯한 위압감을 동반했다.
‘역시나 신성 길드의 정예. 하지만!’
스킬 발동, 다크 미스트.
푸확-!
제로의 발밑에서 검은 연기가 터져 나왔다.
검은 연기는 순식간에 연구실을 가득 메우며 여섯 유저들의 눈을 가렸다.
가장 먼저 방패를 앞세워 돌진했던 유저는 갑작스러운 검은 연기에 당황했다.
“당황하지 마! 단순한 연기에 불과해!”
스킬 발동, 신성의 바람.
후웅-!
가장 뒤에 있는 사제로부터 시작된 바람이 연구실을 휩쓸며 다크 미스트를 지웠다.
허나 제로는 이미 움직인 뒤였다.
“어리석은 이방인 놈들. 모조리 죽여 주마.”
스킬 발동, 역병-페스트.
찍찍!
찍찍찍!
유저들과 거리를 벌린 제로의 발밑에서 대량의 쥐가 쏟아져 나왔다.
한 마리, 한 마리의 전투력은 보잘것없지만 그것들의 몸을 타고 흐르는 피에는 페스트균이 잠들어 있다.
현실에서도 유럽 인구의 1/3을 죽여 버린 역병 중의 역병이다.
그것이 로스트 월드 속에서 더욱 개량되고, 더욱 강화되었다.
켄드로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놈이 괴물이기에 그러했던 것.
지금의 유저들 정도라면 충분히 통용되는 힘이었다.
그 증거로….
“이, 이놈들 뭔가 이상해!”
“죽이지 마! 아니 피에 묻지 마!”
“물러나! 원거리에서 마법으로 처리한다!”
사제들이 버럭 외쳤다.
“소용없다.”
제로는 당황하는 유저들을 바라보며 클클 웃었다.
피에 닿지 말라고?
원거리에서 처리한다고?
소용없다.
한 마리라도 죽였다면, 이미 연구실 내부의 공기에는 페스트균이 가득 들어찼을 테니.
그 증거로 유저들의 전신에 붉은 기포가 생기고, 전신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붉은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크윽!”
스킬 발동, 정화의 손길.
스킬 발동, 정화의 손길.
스킬 발동, 정화….
사제들이 다급히 정화 마법을 사용했다.
‘쓸데없는 짓.’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제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역병-페스트는 평범한 저주 따위가 아니다.
그것을 치료하려면 자애의 성자인 신성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뭔가 이상해!”
“젠장! 저놈부터 죽여! 저놈을 죽이면 해제될지도 몰라!”
정화 마법이 안 통한다는 것을 깨달은 유저들이 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제들은 홀리 에로우나 홀리 볼 따위의 공격 마법을 사용하고.
성기사들은 검과 메이스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어리석은.”
스킬 발동, 본 월.
콰르르-!
제로의 앞으로 거대한 뼈의 벽이 솟아올랐다.
뼈의 벽은 사제들의 공격 마법을 방어하고, 나아가 성기사들의 접근을 저지했다.
“네크로맨서의 무서움을 보여 주마.”
스킬 발동, 시체들의 축제.
덜그럭, 덜그럭.
끼기기긱.
끼에에에-!
이곳은 망자의 연구실.
각종 망자들을 만들기 위한 연구실이다.
그렇기에 필수 불가결로 연구실 곳곳에는 각종 시체가 즐비해 있다.
그러한 시체들이 죽음을 머금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떤 것은 스켈레톤이 되어 몸을 일으키고. 어떤 것은 좀비나 구울 따위가 되어 일어났다.
시체들이 품은 원념과 사념은 영체형 언데드인 레이스가 되어 되살아났다.
“수, 숫자가 너무 많아!”
“젠장! 일단 철수한다!”
제로에 의해 만들어진 언데드의 숫자만 수백에 달한다.
그들이 제아무리 신성 길드의 정예라 한들, 역병-페스트에 감염된 상태에서 수백의 언데드.
그것도 제로에 의해 강화되고, 제로의 통제를 받는 언데드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10강 중 하나의 정예가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제로는 자신이 일으킨 망자들에 후퇴를 하는 유저들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이 정도에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칠 궁리부터 하다니.
자신이 유저들에 대한 평가를 너무 높게 잡은 것일까?
아니면….
‘아니, 일단은 이 상황부터 정리한다.’
생각을 정리한 제로가 입을 열었다.
“놈들을 죽여라.”
덜그럭덜그럭.
끼게게게겍!
어흐흐흑.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망자들이 움직였다.
어떤 것은 뼈로 이루어진 몽둥이나 검을 휘둘렀으며, 어떤 것은 시독이 묻은 이빨과 손톱을 들이밀었다.
영체형 언데드들은 유저들의 몸에 깃들어 그 통제권을 빼앗으려 했다.
그렇게 당황하며 후퇴하려는 유저들은 수백의 망자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했다.
“일단 잿빛 마탑부터 가 봐야겠어.”
파밧-!
여섯 명의 유저들을 정리한 제로가 돌연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제로가 서 있던 자리에 순백의 화살이 내리꽂혔다.
“누구냐!”
제로가 버럭 외침과 동시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서 한 명의 기사가 걸어 나왔다.
“어리석은 이방인이 아직 남아 있었던 건-!”
스킬 발동, 더미 블링크.
말을 하던 제로가 다급히 몸을 빼냈다.
동시에 제로가 서 있던 자리에 기사의 검이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