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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네크로맨서-76화 (76/200)

제76화

벤의 도움으로 황궁을 빠져나온 제로가 도착한 장소는 망자의 연구실이었다.

개조에 개조를 거듭한 망자의 연구실은 총 5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개중에서 4층은 각종 망자들을 풀어놓아 유저들의 침입을 막아 내는 용도였다.

마지막 5층은 오직 제로에게만 허락된 연구실로, 제로는 이곳에서 각종 망자를 만들어 내거나, 역병 실험 따위를 진행했다.

“으음.”

연구실 중앙에 자리 잡은 제로는 자신의 앞에 펼쳐 놓은 재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은 더욱 강해져야 한다. 황궁에서는 벤의 도움을 받아 꼴사납게 도망칠 수 있었지만, 다음에도 그러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한 제로는 현자의 시체도 구했기에, 미루고 미루던 리치 제작에 돌입했다.

“대략 마법사의 뼛조각에 마법사의 피. 영혼의 파편 20개에 기타 등등 재료들이…, 으음.”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백의 저주를 품은 보석과 현자의 시체까지.

눈앞에 펼쳐진 재료들을 훑어보고 있던 제로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정도의 재료들이라면 충분히 리치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리치 제작서가 없는 게 아쉽네.”

로스트 월드 내에서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선 제작서가 필요하다.

그것은 무기나 방어구에 한정된 것이 아닌, 골렘이나 언데드 따위에게도 통용된다.

물론 제작서 없이 만들어 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무수히 많은 실패를 경험해 헛되이 재료들을 버리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죽음.”

[왜?]

한창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제로가 입을 열자, 머릿속에서 죽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치 제작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흐음.]

제로의 질문에 죽음이 묘한 웃음을 내비쳤다.

[굳이 제작서가 필요할까?]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는 죽음의 말에 제로가 의문을 토했다.

제작서가 필요 없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아…!”

뒤늦게 제로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잊고 있었어.”

제로는 그러한 중얼거림과 함께 손에 쥐어진 네크로노미콘을 바라봤다.

있었다.

제작서 없이도 최상위 망자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아이템 확인.”

[네크로노미콘]

공격력: ???~??? 내구도: 무한

등급: 레전더리(성장형)[67.89%]

특수 스킬: 사자 소생(1/3). 데스 그라운드. 데스 로어(봉인). 망자의 진혼곡(봉인) 특수 능력: 죽음의 지혜. 죽음의 가호. 영혼 수납.

특수 옵션: 지능+60 지배+60

제한: 죽음의 대리자

네크로맨시의 정수가 담겨 있는 신물이다. 오직 죽음과 계약한 대리자만이 다룰 수 있다.

네크로노미콘의 특수 스킬, 사자 소생.

이것이라면 충분히 리치를 만들 수 있었다.

“왜 이걸 잊고 있었을까.”

[그러게.]

제로의 중얼거림에 죽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 * *

“베이스는 당연 현자의 시체지.”

제로는 인벤토리에서 현자의 시체를 꺼내며 거대한 통에 담갔다.

통 안에는 지금까지 수집한 마법사의 피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러한 통에 담긴 현자의 시체는, 시체라고 생각할 수 없게 생겼다.

시체 특유의 서늘함도, 창백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것은 그저 잠을 자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제로는 그러한 현자의 시체의 심장 부분에 백의 저주를 품은 보석을 올려놨으며.

그 외의 잡다한 재료들을 때려 넣었다.

어느새 붉은 피가 가득한 통에는 현자의 시체 외에도 각종 재료들이 두둥실 떠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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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가 영창에 들어가자, 연구실 내부에 죽음이 휘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현자의 시체를 포함해, 리치를 만들기 위한 재료들로 가득 찬 통의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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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발동, 사자 소생.

파앗-!

마지막 영창을 끝내고 스킬이 발동되었다.

연구실 내부를 가득 메운 채 휘몰아치던 죽음은 곧 통 안쪽으로 빨려들 듯 흡수되며 사라졌다.

농밀하면서도 막대한 양의 죽음을 흡수한 통 내부가 변했다.

붉은 피는 현자의 시체가 게걸스럽게 빨아 먹었으며.

그 외의 각종 재료들이 바스라지며 사라졌다.

심장 부분에 있던 백의 저주를 품은 보석에는 현자의 시체에서 돋아난 핏줄과 신경 따위가 덕지덕지 달라붙었으며, 그러한 보석은 곧 현자의 시체 내부로 파고 들어가 말 그대로 ‘심장’의 역할을 대신했다.

시체의 피부는 흐물흐물해 벗겨지고, 살점은 썩어 문드러져 녹아내렸다.

근육이나 장기까지 모조리 사라지고 미간에 붉은 보석이 만들어진 현자의 시체는 더 이상 ‘인간의 시체’가 아닌, 제로와 반대되는 백골의 리치의 모습이 되었다.

끼기긱.

백골의 리치가 몸을 일으키며 통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것의 미간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으며, 심장이 있어야 할 장소에는 흉흉한 보랏빛을 내뿜는 보석이 두둥실 떠다녔다.

[그.대.는.누.구.인.가.]

리치가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리치의 텅 비어 버린 동공에는 검은 귀화가 피어올랐으며, 그러한 검은 귀화는 정확히 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노예의 낙인도 못 새겼는데.”

제로는 예상 이상으로 빨리 눈을 뜬 리치에 인상을 찌푸렸다.

사자 소생으로 만들어진 망자들은 하나같이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된다.

그렇기에 사자 소생으로 만들어진 망자가 반항할 수 없게, 그 영혼과 육체에 노예의 낙인을 새겨야 한다.

헌데 지금의 리치는 그러한 과정을 이루지 못했다.

가뜩이나 현자의 시체를 베이스로, 그 핵을 백의 저주를 품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리치이다.

그 강함은 평범한 리치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터.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그 힘이 약하다. 그렇다면….’

힘으로 제압해 노예의 낙인을 새긴다.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품기 무섭게 백골의 리치가 입을 열었다.

[다시.한번 묻겠.다.]

[나를 만들어.낸.것이 그대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어눌했던 말투가 자연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백골의 리치에게서 느껴지는 힘 또한 점차 증가했다.

확실히 리치는 리치.

이 짧은 시간 안에 벌써 적응을 끝내 가는 것이다.

“맞아.”

[그렇군.]

[그렇다면 네놈.만.없으면 나는 자.유겠군.]

파앗-!

콰가강!

말을 마친 백골의 리치가 손을 내뻗었다.

쫙 펼쳐진 손바닥에서 곧 거대한 화염의 덩어리, 파이어 볼이 튀어나와 제로를 강타했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화끈한 열기가 연구실 내부를 가득 메웠다.

제로는 그 열기 속에서, 데스 베리어를 펼치며 백골의 리치를 바라봤다.

“단순한 파이어 볼의 위력이 이 정도라니. 확실히 강하긴 해. 하지만….”

‘날 너무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가강-!

제로를 중심으로 뿜어진 죽음의 탁류가 백골의 리치를 덮쳤다.

상대는 언데드. 즉, 이미 죽어 버린 몸뚱어리를 가진 존재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역병은 통하지 않을 터이니, 역병과 관련된 스킬은 자연스레 힘을 잃게 된다.

‘상관없어.’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병을 사용할 수 없다? 상관없다.

애초에 자신은 네크로맨서. 고작해야 자신이 만들어 낸 리치 따위에게 죽을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그그극.]

한편, 백골의 리치는 자신의 몸을 뒤덮는 죽음의 탁류에 기묘한 신음을 내뱉었다.

제로에게서 흘러넘치는 죽음이 침식한 것인지, 새하얀 그것의 몸뚱어리 곳곳이 검게 변색 되기도 했다.

[과연.]

[날 만들어 낼 정도의 네크로맨서구나.]

[허나 나는 저주왕 데이버그.]

[나에게 새로운 육체를 선물한 공을 생각해 편안한 죽음을 안겨 주마.]

흠칫-!

리치의 말에 제로가 몸을 떨었다.

저주왕 데이버그.

그 이름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기백 년 전 활동했던 한 흑마법사의 이름이었다.

손짓 한 번에 백의 저주를 흩뿌리고, 한 걸음 내딛는 것만으로도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지를 죽일 수 있는 존재.

제로가 리치를 만들 때 사용했던 백의 저주를 품은 보석 또한 저주왕 데이버그가 생전에 만들고 사용했던 것이라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저 리치는 왜 스스로를 저주왕 데이버그라 칭하는 것일까.

[그것이 그리 궁금하더냐.]

흠칫-!

언제 움직인 것일까?

제로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낸 백골의 리치가 귓가에 속삭였다.

[백의 저주를 품은 보석에 노부의 영혼을 봉인해 놨기 때문이다.]

[네놈 같은 어리석은 네크로맨서가 그것을 핵으로 리치를 만들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헌데 설마 현자의 시체를 베이스로 리치를 만들어 낼 줄이야.]

[노부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네크로맨서로구나.]

지릿지릿.

말을 이어 나갈수록 백골의 리치 아니, 데이버그에게서 농밀한 저주가 흘러넘쳤다.

그것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육체를 저릿하게 만들었는데, 그에 제로는 더미 블링크를 통해 데이버그와 거리를 벌렸다.

데이버그는 자신에게서 거리를 벌리는 제로를 향해 클클 웃음을 터트렸다.

[자, 이제 그만 죽음을 받아들이거라.]

[그리하여 노부는 다시 한번 저주왕으로서 악명을 떨칠 것이니.]

쿠웅-!

데이버그의 몸에서 강대한 존재감이 흘러넘쳤다.

그 존재감은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으며, 제로의 육체와 정신을 압박했다.

‘허세다.’

제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것은 모두 허세이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 백의 저주를 품은 보석을 입수했던 랭커가 사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즉, 과거 혹은 미래의 랭커가 사용할 수 있었다면….

‘나 또한 놈을 굴복시킬 수 있다.’

그나마 한 가지 긍정적인 것은, 노예의 낙인만 제대로 새긴다면 과거 무수한 악명을 떨쳐 냈던 광인 저주왕 데이버그를 사역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냐.]

콰가강-!

‘저주의 파동!’

데이버그로부터 보랏빛 탁류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저주와 물리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마법, 저주의 파동이었다.

그에 제로는 데스 웨이브를 시전하는 것으로 저주의 파동을 상쇄시켰다.

[호오, 나름 재주가 있구나.]

[허나 노부에게는 아직 한참을 못 미치느니라.]

콰가강-!

다시 한번 저주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그에 제로는 으득! 이를 갈며 더미 블링크로 몸을 피해 냈다.

데이버그가 사용한 저주의 파동은 제로가 만들어 낸 분신을 집어삼키며, 연구실 바닥을 헤집었다.

[아직 어려 보이지만 나름 리치를 만들 수 있는 네크로맨서라 이건가.]

[허나 노부를 평범한 저주술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쿠궁-!

“큭?”

제로가 낮은 신음을 터트리며 비틀거렸다.

순간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존재감 따위에 의한 심리적 압박감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제로를 중심으로 일정 영역의 중력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이 마법은….

“헤비 그래비티? 실전된 중력 마법을 어떻게?”

헤비 그래비티.

흔히 소설이나 게임 따위에 자주 등장하는 마법 중 하나였으나, 로스트 월드 내에선 사라진 마법이라 취급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로는 어째서 저주왕 데이버그가 헤비 그래비티를 사용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끌, 이 시대에는 중력 마법이 없나 보구나.]

[허나 노부가 살아가고, 활동했을 때에는 이 정도 마법은 널리고 널렸었다.]

데이버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확실히 그가 활동했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기백 년.

지금은 사라진 마법을 사용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역시 까다로운 상대야.’

제로는 막대한 압력 속에 육체가 망가지는 것을 깨달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 상태’에서는 데이버그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네놈이 진짜 저주왕 데이버그라면 나 또한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야겠지.”

그러한 말과 함께 제로는 망설임 없이 의태의 반지를 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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