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조용히, 조용히 지나가자.’
제로는 어둠에 녹아들며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마음 같아선 은신 마법 따위를 사용하고 싶었지만,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노출될 것이다.
현재 병사들을 인솔하고 있는 기사는 은사자 기사단의 일원으로, 은사자 기사단은 개개인의 레벨이 400을 넘는 괴물들이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그 마나를 감지하고, 순식간에 검격을 쏘아 댈 것이다.
‘조심, 조심히 가는 거…!’
툭.
데구르르.
한 발, 한 발 조심히 내딛던 제로의 움직임이 멈췄다.
있는지도 몰랐던 돌조각이 제로의 발에 차여 한 병사의 앞까지 굴러갔다.
“응? 이게 무…! 치, 침입자 발견!”
자신의 발 앞까지 굴러온 돌조각에 시선을 옮기던 병사가 다급히 외쳤다.
병사는 어둠 속에 녹아들어 있던 제로와 눈이 마주쳤다.
“이런 제기랄! 이건 아니지!”
제로는 삼류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전개에 당황하며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서걱!
콰가강!
병사들을 인솔하고 있던 은사자 기사단에 속한 기사의 검격이 날아와 제로가 서 있던 장소에 떨어졌다.
기사의 검에서 쏘아진 불완전한 오러가 대지를 가르고, 폭발했다.
제로는 사방으로 비산하는 파편 속에 섞여 다시 한번 몸을 숨기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침입자 발견!”
“침입자를 사살합니다!”
확실히 수도에 주둔하는 병사들이다 이걸까.
수십 명의 병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제로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로의 퇴로를 막아선 병사들은 창을 들이밀었으며, 그들이 쥐고 있는 창의 날카로운 창날은 언제든지 제로의 몸을 파고들 수 있는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마법의 원흉은 네놈이었나.”
저벅. 저벅. 저벅.
은사자 기사가 병사들 사이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기사의 두 눈에는 너무나도 확고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고,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제로는 변명 따윈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애초에 변명을 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제로는 죽음의 옷자락과 역천의 의복을 걸치고, 역병 의사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수상스러운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제로를 범인이라 확신할 것이다.
‘애초에 내가 범인이 맞기는 한데….’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가 네크로노미콘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된 이상, 힘으로 뚫고 나아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상황을 파악한다’라는 목적이었기에 기사도 은사자 기사 한 명이었으며. 병사의 숫자도 끽해야 15명 언저리라는 점이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뚫고 지나갈 수 있었다.
다만, 제국 소속의 NPC를 죽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을 신경 썼으면 로월을 이따위로 플레이하지도 않았어.’
제로는 무수히 많은 유저를 적으로 뒀다.
그러한 적에 제국 하나가 추가된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지나가야겠어.”
“거절한다.”
“네놈에게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야.”
스킬 발동, 다크 에로우.
카가강-!
제로가 손을 까딱이자, 수십 발의 검은 화살. 다크 에로우가 기사를 향해 쏘아졌다.
기사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다크 에로우에 검을 휘두르며 응수했다.
불완전하긴 하지만 나름의 오러가 깃들어 있는 기사의 검에 수십 발의 다크 에로우가 허망하게 사라졌다.
“네놈을 연행하겠다, 흑마법사.”
저벅.
다크 에로우를 쳐 낸 기사가 한 발 내디디며 말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온 다크 에로우에 기사는 제로를 완전히 흑마법사로 착각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잘못된다 한들, 잿빛 마탑에 피해가 가는 것은 막을 수 있을 터였다.
‘허상계와의 전쟁을 생각하면 잿빛 마탑을 내 걸로 만들어야 해. 그러려면 괜히 잿빛 마탑에 피해가 가는 행동은 피해야겠지.’
제로가 그러한 생각과 함께 기사를 바라보는 순간. 기사가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놈을 포박해라. 어떻게 이곳을 알고 있는지. 어째서 황궁에 숨어들려 했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단, 목숨과 입만 붙어 있다면 다소의 상처 정도는 신경 쓰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기사의 명령에 병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움직였다.
수십 명의 병사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다.
“칫.”
제로는 자신을 향해 내질러지는 창에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된 이상, 네크로맨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네크로맨시를 사용하는 순간 자신이 네크로맨서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잿빛 마탑에 불이익이 부여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끝까지 흑마법사를 연기한다!’
스킬 발동, 다크 캐논.
후웅-!
콰앙!
쏘아진 검은 탄환이 병사와 충돌하며 폭발했다.
다크 캐논에 얻어맞은 병사 몇이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날아간 병사들의 팔다리가 이리저리 꺾이며, 입에선 짓뭉개진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얼핏 봐도 즉사를 면하기 어려운 상처였다.
제로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동료의 죽음에 분개하며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다.
“죽엇!”
“감히 쟈크를! 죽여 버리겠다! 흑마법사!”
“용서하지 않겠다!”
푸부북-!
제로가 바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런 제로의 발밑으로 병사들이 내지른 창이 스쳐 지나가며 바닥에 틀어박혔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스킬 발동, 데스 부스터.
제로의 발밑에서 죽음이 폭발하며 가속했다.
떠오른 몸은 데스 부스터의 폭발에 의한 가속도로 앞으로 쏘아졌다.
“어딜 도망가는 거냐.”
“칫.”
스킬 발동, 다크 베리어.
병사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제로를 향해 기사의 검이 떨어졌다.
제로는 순식간에 다크 베리어를 만들며 방어했으나, 상대는 은사자 기사단의 기사.
레벨 400이 넘는 괴물이다.
오러가 깃든 기사의 검은 너무나도 손쉽게 다크 베리어를 부수며 나아가 제로의 가슴팍을 훑고 지나갔다.
숙련도가 떨어지는 마법으로는 오러가 깃든 기사의 검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쿠당탕!
가슴팍에서 붉은 피를 뿜어낸 제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나마 역병 의사 마스크를 통해 부여받은 저주-죽을 수 없는 육체에 의한 불사지체가 없었다면 이번 일격으로 끝났을지도 몰랐다.
“퉤.”
자리에서 일어난 제로가 입가에 고인 피를 뱉어 냈다.
기사의 검에 베인 상처 또한 불사 지체의 회복력으로 순식간에 재생했다.
“네놈, 평범한 흑마법사가 아니구나.”
기사는 자신의 검에 베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제로에 인상을 찌푸렸다.
“글쎄, 어떨까?”
기사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인 제로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에 기사가 흠칫! 놀라며 버럭 외쳤다.
“모두 물러서…!”
“이미 늦었어.”
스킬 발동, 다크 익스플로전.
콰아아아앙-!
뭉쳐 있던 병사들 사이로 검은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에 의해 퍼져 나가는 불꽃이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끄아악-!
사, 살려 줘!
으아아아악!
다크 익스플로전에 휩쓸린 병사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폭발이 가시고, 병사들을 집어삼킨 불꽃이 사그라들며 드러난 풍경은 지옥 그 자체였다.
폭발의 중심지에 있던 병사들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온몸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으니.
문제는 폭발의 범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시체는 다크 익스플로전에 의해 살점이 녹아내려 갑옷에 들러붙은 상태였다.
애매한 위력에 극한의 고통을 느끼며 죽어 나간 병사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네놈-!”
부하들의 죽음에 분개한 기사가 움직였다.
바닥을 박차는 기사의 몸이 한줄기 선이 되어 제로를 향해 뻗어 나갔다.
기사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그가 딛고 있던 대지가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파편이 흩날렸다.
“죽어라!”
후웅-!
기사의 검이 묵직한 파공음을 동반하며 휘둘러졌다.
제로의 목을 노리며 휘둘러지는 기사의 검에는 불완전한 오러의 칼날이 솟아나 있었다.
분노에 의해 휘둘러지는 검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지금까지의 날카로움을 잃어버렸다.
제로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스킬 발동, 다크 스피어.
콰직!
“큭!”
어둠의 창이 튀어나오며 검을 휘두르는 기사의 손목에 틀어박혔다.
오러가 깃들어 있는 것은 검뿐.
단련했다 한들, 마나 한 톨 깃들어 있지 않은 기사의 손목은 제로가 날린 다크 스피어에 꿰뚫리며 떨어져 나갔다.
쨍그랑-!
손목이 찢어지며, 기사가 쥐고 있던 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기사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찢겨 나간 손목을 움켜쥐며 뒤로 물러났다.
“네놈….”
“미안하지만 목격자는 남길 수 없거든.”
제로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기사를 향해 말하며 주변을 훑어봤다.
살아남은 병사의 숫자는 단 네 명.
그마저도 방금 전의 다크 익스플로전에 휘말려 상당한 데미지를 입은 상태였다.
더 이상 검을 쥘 수 없는 기사와, 다 죽어 가는 병사 네 명만이 남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 품었던 걱정과는 다르게 싸움의 양상은 너무나도 확실했다.
“그나저나 400레벨 이상의 기사의 시체라. 좋은 망자가 되겠어.”
우웅-!
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다.
그렇게 생각한 제로는 뭉클뭉클 죽음을 뿜어냈다.
제로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죽음에 기사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네놈! 네크로맨서였던 것이냐!”
“이제 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
스윽.
제로가 손을 들어 올리자, 움찔 놀란 기사와 병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그냥 죽으면 되는 거야.”
스킬 발동, 데스 본 개틀링.
푸부부부북-!
제로가 손을 내리그음에 맞춰 수십 발의 흑골의 화살이 쏘아졌다.
수십 개의 화살은 살아남은 병사들의 몸에 파고들며, 그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이제 남은 것은 손목이 뜯겨 나간 기사 한 명뿐.
“네 시체는 내가 잘 써 줄게.”
“네놈은 제국을 적으로 돌렸다. 그 의미를 알고 있느냐?”
“그게 뭔 상관이라고.”
푸욱-!
언제 만들어 낸 것인지, 제로는 왼손에 쥔 뼈의 칼을 기사의 심장에 틀어박았다.
기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심장을 향해 틀어박히는 칼날의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로를 노려봤다.
“네놈은 오늘의 일을 평생토록 후회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기사는 목숨을 잃었다.
* * *
움찔.
황궁에 자리 잡은 대전.
황금으로 만들어진 각종 장신구 때문에 ‘황궁의 대전’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황금으로 만들어진 황좌에 앉아 있던 중년인.
로스트 월드 유일 제국의 황제라 불리는 그가 몸을 떨었다.
“켄드로 경.”
“부르셨습니까, 황제 폐하.”
“자네도 느꼈겠지?”
“물론입니다.”
황제의 말에, 켄드로라 불린 기사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감히 짐의 궁에 숨어들어 온 쥐새끼를 찾아 데려오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켄드로라 불린 기사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대전을 빠져나가는 켄드로라는 기사는 황금으로 된 갑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그 갑옷에는 골드 드래곤의 형상이 음각되어 있었다.
골드 드래곤의 형상이 음각된 갑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황룡 기사단뿐.
황룡 기사단은 제국 황제 직속 기사단임과 동시에 최강의 무력을 자랑한다.
개중에서도 켄드로라는 이름의 기사는 단 한 명.
인외의 영역이라 불리는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든, 황룡 기사단의 기사단장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