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너…, 천족이었냐?”
눈앞을 가리는 빛이 사그라들며 제로가 입을 열었다.
모습을 드러낸 신성을 바라보며 말하는 제로의 전신에선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는 당신도 인간이 아니군요.”
신성은 아바타가 벗겨져 군데군데 흑골이 드러난 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성과 제로.
그 둘은 서로가 인간이 아니었다.
제로는 흑골로 이루어진 리치의 외형을 지닌 상급 망자였으며.
신성은 머리 위에 황금빛 링과, 등에 하나의 새하얀 날개를 지닌 천사였다.
“천족이라. 딱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하프 엔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펄럭-!
신성이 등에 달린 하나의 날개를 펄럭이며 말했다.
한 쌍이 아닌, 왼쪽에 하나만 달려 있는 순백의 날개는 무척이나 순수한 신성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임에도 신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은, 성자 전용 스킬 자애의 휘광 그 이상의 위력을 내포했다.
그 위력은 아무런 스킬을 발동하지 않았음에도 제로의 외형을 덧씌운, 의태의 반지의 아바타를 지워나갔다.
제로의 앞에 서 있던 더미 본 드래곤 나이트 또한 신성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신성력에 비틀거렸다.
마스터가 천족이었을 줄이야.
몰랐어.
성자로 전직하면서 종족을 변환한 건가?
신성 길드의 길드원들 또한 하프 엔젤로 변한 신성의 모습에 상당히 당황한 모습을 내보였다.
신성이 하프 엔젤이었던 것은 비밀이었으며, 오직 루나만이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럼 2차전을 시작해 볼까요?”
펄럭-!
어떤 원리를 가진 것일까?
신성이 반쪽짜리 날개를 펄럭이자, 그 몸뚱어리가 두둥실 떠올랐다.
혹시 날개는 단순히 외형에 불과하고, 하늘을 나는 원리는 플라잉 마법과 같은 무언가의 스킬을 쓴 건 아닐까?
아니, 지금은….
‘쓰잘데기없는 잡생각은 버린다.’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는 의태의 반지를 빼 버렸다.
의태의 반지에 의해 힘이 제한된 상태로는 신성을 상대할 수 없었다.
푸확-!
제로가 의태의 반지를 빼 버리자, 그 육체에서 죽음이 폭발하며 완벽한 흑골의 리치. 상급 망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천사의 모습으로 자애로움과 신성력을 내뿜는 신성.
흑골의 리치의 모습으로 농밀한 죽음을 흩뿌리는 제로.
그 둘의 모습은 마치 선과 악. 삶과 죽음이 대립하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켰다.
그렇게 본신을 드러낸 둘이 얼마간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먼저 선공을 취한 것은 제로였다.
“더미 본 드래곤 나이트. 죽여 버려.”
크아아-!
쿵! 쿵! 쿵!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더미 본 드래곤 나이트가 움직였다.
본 드래곤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대지가 뒤흔들렸다.
그렇게 달려 나간 더미 본 드래곤 나이트는 순식간에 신성의 앞에 도착했으며, 본 드래곤은 거대한 입을 들이밀었다.
그 위에 타고 있던 기사는 손에 쥐어진 거대한 마창을 내질렀다.
“이 모습의 저에겐 그 어떤 강대한 언데드라 하더라도 통하지 않습니다.”
스킬 발동, 심판의 빛.
콰아아앙-!
본 드래곤의 날카로운 엄니와 기사의 마창이 닿기 직전, 하늘 위에서 신성한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빛의 기둥에 얻어맞은 더미 본 드래곤 나이트는 잠시 비틀거리더니, 곧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으음.’
제로는 일격에 사라져 버린 더미 본 드래곤 나이트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와이번의 뼈로 만들어 낸, 겉모습뿐인 본 드래곤으로는 신성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소환할 수 있는 망자들 중, 저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제로가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애석하게도, 현재 제로가 소환할 수 있는 망자들 중, 하프 엔젤 상태의 신성을 감당할 수 있는 망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움직인다.’
생각을 정리한 제로가 한 발 내디뎠다.
스킬 발동, 데스 부스터.
콰앙!
내뻗은 발바닥에서 죽음이 폭발하며, 폭발적인 가속도를 얻은 제로의 신형이 순식간에 신성의 코앞에 당도했다.
“죽어.”
후웅-!
제로가 신성을 향해 네크로노미콘을 휘둘렀다.
오른손에 쥐어진 네크로노미콘은 신성의 몸에 닿기 직전, 순식간에 죽음이 모여들며 거대한 대검, 죽음의 폭거로 변했다.
신성은 자신의 목을 노리며 휘둘러지는 죽음의 폭거를 바라보며 날개를 펄럭였다.
“소용없습니다.”
쩌엉-!
신성의 반쪽짜리 날개와 제로의 죽음의 폭거가 충돌하며 거대한 충격이 휘몰아쳤다.
“단순한 날개가 아니다 이거지?”
둘의 충돌로 일어난 충격을 거스르지 않으며 뒤로 물러난 제로가 말했다.
신성의 등에 달린 날개는 단순한 신성력의 집합체가 아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물리력을 가진, 일종의 무기와도 같았다.
하지만.
“난 전사가 아니란 말이지.”
씨익 웃어 보인 제로가 비어 있는 왼손을 내뻗었다.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비어 있는 왼손으로부터 넘실거리는 죽음이 뿜어져 나왔다.
방사형으로 퍼져 나가는 죽음은 대지를 뒤엎으며 신성의 육체를 두드렸다.
“으음.”
제로의 데스 웨이브에 휘말린 신성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인간의 모습이 아닌, 본신. 즉, 하프 엔젤의 상태가 된다면 어지간한 흑마법이나 네크로맨시에는 절대적인 내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제로의 마법에 닿자, 무시할 수 없는 데미지가 들어왔다.
“역시나 학살자 제로. 상당한 강함입니다. 하지만….”
스킬 발동, 심판의 빛.
콰아앙-!
제로의 머리 위로 성스러운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불과 몇 분 전, 더미 본 드래곤 나이트를 일격에 지워 버린 그것에 이번엔 제로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당신이 언데드인 이상, 절 이길 순 없습니다.”
“확실히.”
신성의 말에 제로가 쓴웃음을 내비쳤다.
하프 엔젤. 망자인 자신과는 극상성의 존재였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데미지를 입히며, 상대의 스킬은 자신에게 몇 배나 증폭된 위력으로 다가왔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인 것은….
‘전쟁 때 봤던 신성은 인간이었어.’
과거. 혹은 다가올 미래에 만났던 신성은 종족이 인간이었다.
하프 엔젤 같은 사기 종족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미래가 변했다.’
자신이 죽음과 계약하고, 망자가 됨으로써 미래가 개변했다.
전쟁 때, 자신만의 직업이었던 엘레멘탈 워리어는 진즉에 누군가가 먹었으며. 신성은 하프 엔젤이라는 종족으로 변화했다.
이 모든 것은 미래가 변했다… 라는 것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어?”
미래가 변했다 한들, 그것이 유저들의 전력 상승으로 이어진다면 좋은 변화였다.
…?
한편 신성은 제로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일까?
아니, 무슨 뜻인지 알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이 싸움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럼 다시 갑니다.”
스킬 발동, 심판의 빛.
콰아앙.
다시 한번 성스러운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하지만.
“똑같은 스킬에 두 번은 안 당해 주지.”
빛의 기둥 속에서 제로가 입을 열었다.
그런 제로의 곁으로는 죽음의 장막이 둘러쳐져 심판의 빛을 흡수했다.
“설마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그러면 조금 실망인데.”
스킬 발동, 데스 본 개틀링.
투두두두-!
거대한 흑골의 창.
거대한 흑골의 화살.
거대한 흑골의 탄환.
그것들이 마치 개틀링 건처럼 신성을 향해 쏘아졌다.
신성은 날아오는 창, 화살, 탄환 따위에 반쪽짜리 날개를 자신의 몸에 휘감았다.
콰가가강!
공격 하나하나가 적중할 때마다 뼈를 울리는 충격이 전해져 왔다.
제로의 마법은 단순한 사기나 마력 따위가 아닌, 물리력마저 동반했다.
신성은 끝없이 쏟아지는 흑골의 공격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대로 방어만 하고 있으면 끝이 없다.
그렇다면.
스킬 발동, 그랜드 저지먼트.
콰가강-!
제로의 머리 위로 세 줄기의 거대한 낙뢰가 내리꽂혔다.
한 줄기, 한 줄기의 낙뢰가 신성 속성과 뇌속성이 뒤섞인 복합 속성의 공격이었다!
그것에 얻어맞은 제로가 몸을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빈틈!’
그랜드 저지먼트에 의해 전신을 두드리는 흑골의 공세가 멈췄다.
신성은 그 틈을 놓치지 않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제로를 향해 달려드는 그의 손에는 성스러운 불꽃으로 만들어진 한 자루의 검이 쥐어졌다.
“마무리입니다.”
스킬 발동, 심판의 검-우리엘.
화르륵!
신성의 손에 쥐어진 검이 그 덩치를 불렸다.
심판의 검-우리엘. 그것은 주신 오딘을 따르는 네 명의 대천사 중 한 명, 불의 심판자 우리엘의 신력을 빌려와 상대에게 철퇴를 내리는 스킬이었다.
특히나 그 대상이 언데드라면 그 위력은 3배로 증폭된다.
신성은 이 일격으로 제로를 끝낼 생각이었다.
한편 그랜드 저지먼트에 당해 비틀거리던 제로는, 자신의 코앞까지 당도해 불꽃의 검을 휘두르는 신성에 씨익 웃어 보였다.
뼈밖에 없는 몸뚱어리라 그 미소가 보일지 의문이었으나, 신성은 제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신성은 제로의 앞에 있었으며, 오른손에 쥐어진 검은 이미 제로의 목을 노리며 휘둘러지고 있었다.
이제 와서 물러날 순 없는 상황이었다.
스칵-!
약간의 망설임이 생겼지만, 신성이 쥔 검은 확실하게 제로의 목을 베었다.
분리된 머리와 몸통은 곧 우리엘의 불꽃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우였…!”
“우리엘의 불꽃이라. 확실히 위력적이긴 해.”
흠칫-!
사라져 가는 제로의 몸뚱어리를 바라보던 신성이 몸을 떨었다.
심판의 검에 베여 죽었어야 할 제로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에 뒤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제로가 엿보였다.
“더미 블링크. 서 있는 자리에 분신을 만들고 순간 이동하는 마법이야. 꽤 쓸 만하지?”
제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는 신성을 향해 친절한 설명을 내뱉었다.
“어디 보자. 그럼 이번엔 내 차례지?”
이미 영창은 끝났다.
그 증거로 제로의 머리 위로 수백, 수천, 수만의 망자들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거대한 창이 존재했다.
“그럼 약속은 지켜라.”
스킬 발동, 명계의 창.
거대한 창이 쏘아졌다.
그것은 물리학 따윈 개나 줘 버리라는 듯이 있을 수 없는 속도로 순식간에 신성의 몸을 꿰뚫었다.
“커헉-!”
몸통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신성이 한 움큼 황금빛 피를 토해냈다.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창이 움직인다! 라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자신의 몸에 구멍이 뚫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프 엔젤인 자신이 언데드에게 당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헌데 그러한 일이 벌어졌다.
“하, 하하. 역시나 학살자 제로 님이십니다.”
신성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상대가 언데드라고 자만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자만하지 않고,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어도 승패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신성은 그리 생각했다.
“그럼 약속은 지키라고.”
그 말을 끝으로, 신성의 몸이 쓰러졌다.
연무장 중앙에 꽂혀 있던 깃발은 사라지고, PVP는 제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 *
“대단하십니다! 형님! 설마 정말로 신성을 이길 줄이야!”
척살령과 현상 수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제로는 신성의 길드 하우스를 나섰다.
중간중간 신성 길드의 유저들이 적의를 띤 눈으로 바라봤으나 제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한편, 은신한 상태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스타툰은 입이 닳도록 제로를 향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로는 그런 스타툰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하냐?”
“네? 뭐 하긴요. 형님이 걱정돼서 지켜보고 있….”
“잔말 말고 후딱후딱 움직여. 전직했다고 그게 끝은 아니라는 걸 네가 더 잘 알 텐데?”
“그, 그렇긴 하죠.”
제로의 일침에 스타툰이 시무룩한 표정을 내비쳤다.
확실히 다크 로드로 전직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퀘스트 창에는 해결해야 할 퀘스트들이 줄지어 생겨났다.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최대한 강해져 있어.”
그렇게 말하며 제로는 스타툰과 함께 시작의 도시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