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내가 그리 쉽게 죽을 거라 생각했어?”
흑골로 이루어진 턱이 달그락거리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쉐도우는 흑골의 리치로 변한 제로의 모습에 낮은 신음을 터트렸다.
학살자 제로.
그는 자신처럼 이종족 플레이어였다. 그것도 가장 까다롭다 여겨지는 언데드 플레이어.
언데드는 애초에 급소의 개념이 없다.
즉, 쉐도우가 목을 베어 버린 행위는 제로에게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래도….
‘딜링은 상당하네.’
제로가 슬쩍,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괴물들만 상대해 오다 보니, 유저들의 강함을 경시한 부분이 있었다.
설마하니 의태의 반지로 만든 껍데기가 단 한 방에 벗겨질 줄은 제로 또한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 본격적으….”
푸부북-!
제로가 다시 쉐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 때, 그런 제로의 발밑에 깔린 그림자에서 다수의 창이 튀어나왔다.
총 여섯 개로 이루어진 그림자의 창은 정확히 제로의 양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를 꿰뚫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좀 해라.”
그림자의 창에 뚫린 것은 제로의 분신이었다.
제로는 자신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순간, 더미 블링크를 사용한 지 오래였다.
“그럼 이번엔 내 차례지?”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강-!
제로를 중심으로 막대한 죽음이 퍼져 나갔다.
마치 해일과도 같이 출렁이며 퍼져 나가는 잿빛의 탁류는 곧 쉐도우를 뒤덮었다.
“큭-!”
쉐도우는 순식간에 자신을 덮치는 데스 웨이브에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체력이 10%가량 깎여 나갔다.
평범한 마법이었다면 이 정도로 데미지가 들어오지 않았겠지만….
‘죽음 속성이다, 이건가.’
제로의 마법은 기본적으로 죽음 속성이 깃들어 있다.
몬스터, 인간, 유저 가리지 않고 생명을 품고 있는 존재라면 죽음 속성에 저항할 수 없었다.
“아직 멀었어.”
스킬 발동, 데스 본 스피어.
스킬 발동, 데스 볼.
스킬 발동, 데스 버스터.
스킬 발….
네크로노미콘이 펼쳐지며, 끝없는 마법의 폭격이 시작됐다.
거대한 흑골로 만들어진 창이 쉐도우의 머리를 노리며 쏘아진다.
죽음이 뭉쳐 만들어진 거대한 탄환이 쉐도우와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다종다양한 마법과 저주가 쉐도우의 목숨을 시시각각 조여들었다.
쉐도우는 융단폭격과도 같은 제로의 공격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쉐도우 워커의 간판 스킬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 타기였다.
제로 또한 비슷한 스킬로 쉐도우 점핑을 가지고 있었지만, 쉐도우 점핑은 도착하는 지점이 랜덤으로 정해진다.
그에 반해 그림자 타기는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그렇게 그림자 속에 빨려 들 듯 사라진 쉐도우가 다시 나타난 장소는….
“이럴 거 같더라.”
스킬 발동, 데스 본 실드.
카가각-!
흑골의 방패가 제로를 뒤덮는 순간, 쉐도우의 칼날이 훑고 지나갔다.
데스 본 실드가 없었다면 제로는 다시 한번 목이 베였을 것이다.
“칫-!”
기습에 가까운 일격이 너무나도 허망하게 막히자, 쉐도우가 혀를 차며 다시 한번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까다롭단 말이지.”
제로가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림자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쉐도우는 지금까지 상대해 온 유저들 중, 가장 까다로운 상대라 할 수 있었다.
한번 그림자와 융합하면 제로라 하더라도 마땅히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
한 가지 의문인 점은, 이런 힘을 가지고도 어째서 랭킹이 100위 하위권이며, 어쌔신 랭킹 2위라는 것일까… 였다.
제로가 본 쉐도우의 강함은 충분히 100위 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상대가 까다로운 것은 쉐도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로의 반사 신경은 마법사 직업군의 유저 답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림자를 통해 가하는, 기습에 가까운 일격을 막은 유저나 몬스터는 몇 없었다.
개중에서 제로 같이 마법사 계열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로는 손쉽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 냈다.
‘평범한 마법사로 생각하면 내가 죽는다.’
생각을 끝마친 쉐도우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림자와 그림자를 통해 움직이며, 때론 단검을 휘두르고.
때론 제로의 그림자로 창과 칼날 따위를 만들어 공격했으며. 때론 그림자를 통해 분신을 만들어 제로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럼에도….
“허억-! 허억-!”
쉐도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로를 바라봤다.
그런 쉐도우의 전신에는 수많은 상처가 새겨졌으며, 육체를 이루는 그림자는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그에 반해 제로는 상처 하나 없이, 처음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좀 바쁘거든? 그러니 후딱 끝내자.”
우웅-!
제로의 손에 쥐어진 네크로노미콘의 페이지가 미친 듯이 넘어가며, 강대한 죽음이 넘실거렸다.
스킬 발동, 외차원의 창고.
쩌억-!
스킬이 발동하며 제로의 등 뒤로 공간이 갈라졌다.
갈라진 공간은 심연을 품고 있었으며, 그러한 심연에선 농밀한 죽음이 흘러넘쳤다.
“아직이야.”
스킬 발동, 망자의 대군단.
척! 척! 척!
또 하나의 스킬이 발동하며 외차원의 창고에서 다수의 망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망자의 병사와 정예병이었으며.
그 뒤를 이어 망자의 창병과 궁병. 망자의 광전사와 해골마에 올라탄 망자의 장군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흉흉한 붉은 안광을 터트리는 망자들의 시선은 쉐도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쉐도우는 망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오싹한 죽음과, 흉흉한 살기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저것들 하나하나가 일반적인 네크로맨서가 부리는 언데드의 강함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쉐도우의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마무리는 네크로맨서답게 해 줄게.”
말을 마친 제로가 손을 까딱이자, 망자의 대군단이 쉐도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두두두!
수천의 망자가 일제히 달려드는 모습은 거대한 해일과도 같았다.
대지는 울리고, 대기는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친다.
쉐도우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망자의 탁류에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움직였다.
스킬 발동, 쉐도우 스피어.
푸부북-!
그림자에서 수백의 창이 튀어나오며 망자들을 꿰뚫었다.
그림자의 창에 뚫린 망자들은 곧 가루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 빈자리는 어느새 다른 망자로 채워졌다.
“소용없어. 외차원의 창고에는 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망자가 잠들어 있거든.”
“칫-!”
제로의 말에 쉐도우가 혀를 찼다.
자신의 직업이 히든 클래스라지만, 이 정도 숫자의 언데드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아니, 상성이 좋은 성기사라 하더라도 끝없이 쏟아지는 망자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다.
그렇다면.
‘술자를 노린다.’
쉐도우가 눈을 빛내며 그림자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아무리 많은 언데드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소환하는 술자가 죽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쉐도우는 무수히 많은 언데드를 소환하는 제로를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망자들의 그림자와 그림자를 뛰어넘어 움직인 쉐도우는 어느새 제로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죽어.”
스킬 발동, 쉐도우 대거.
스킬 발동, 데들리 어택.
스킬 발동, 그림자 베기.
쉐도우가 세 개의 스킬을 동시에 발동시키며 제로의 머리를 향해 단검을 내질렀다.
목표는 제로의 미간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
저것이 바로 제로의 라이프 포스 베슬이라는 것을 눈치챈 쉐도우였다.
하지만.
“소용없어.”
쩌엉-!
언제 꺼내 든 것일까?
제로는 손에 쥔 흉악하면서도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며 쉐도우의 일격을 방어했다.
세 개의 스킬이 중첩돼 극대화된 자신의 공격을 네크로맨서가 막아 내다니.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쉐도우의 두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네크로맨서라고 근접전이 약한 건 아니지.”
후웅-!
속삭이듯 말하며, 제로는 망설임 없이 망자의 폭거를 휘둘렀다.
그렇게 휘둘러지는 망자의 폭거는 평소의 칠흑과도 같은 검은색이 아닌, 녹색과 자색이 뒤엉켜 있었다.
‘독과 저주! 피해야 한다!’
쉐도우는 단번에 제로가 휘두르는 대검에 독과 저주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며 다급히 몸을 빼냈다.
로월에 존재하는 수많은 직업 중, 독을 다루는 것에 대하면 1, 2위를 다투는 직업이 바로 네크로맨서와 어쌔신이었다.
“정답이야.”
망자의 폭거가 아슬아슬하게 쉐도우를 스쳐 지나가며, 제로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격을 피하지 않았다면 쉐도우는 수많은 저주와 중첩된 극독에 당해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녹아 사라졌으리라.
“하지만 50점이야. 차라리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어야 했어.”
스킬 발동, 망자의 시선.
우뚝-!
제로와 거리를 벌리던 쉐도우의 몸이 멈췄다.
제로의 머리 위로 기괴한 눈동자가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으며, 그러한 눈동자가 응시하는 쉐도우에게는 수천의 망령들이 달라붙어 몸의 자유를 강탈해 버렸다.
“얕보지 마!”
푸확-!
쉐도우가 버럭 외치며 막대한 마나를 뿜어냈다.
확실히 랭커는 랭커. 망자의 시선이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1초 남짓이었다.
하지만.
“충분해.”
1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하지만 쉐도우를 향한 공격을 이어 나가기에는 더없이 충분한 시간이었다.
스킬 발동, 붐 소울.
콰앙!
쉐도우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미처 지우지 못한 망자 몇이 붉은색으로 물들며 폭발했다.
오우거조차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는 강력한 폭발에 휘말린 쉐도우의 입에서 거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통각 감도를 상당히 올려 뒀나 봐?”
제로는 자신의 공격에 비명을 지르는 쉐도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로처럼 통각 감각을 100%로 맞춰 두지는 않았겠지만, 몸이 둔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쉐도우 또한 상당한 수준으로 통각 감도를 맞춰 놨다.
평소에는 종족과 직업 스킬 따위로 공격을 피했기에 큰 무리가 없었으나, 지금 싸우고 있는 상대는 제로다.
통각 감도를 높인 것이 도리어 쉐도우의 발목을 잡아 버렸다.
“크윽-! 제, 제로!”
폭발에서 빠져나온 쉐도우가 버럭 외쳤다.
걸치고 있는 장비들은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으며, 쉐도우의 육체는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제로를 향한 쉐도우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엿보였다.
“그렇게 그냥 포기하면 좋았잖아. 안 그래?”
스킬 발동, 명왕의 손아귀.
콰르르-!
쉐도우의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지며, 뼈로 이루어진 명왕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도망치려는 쉐도우의 몸을 움켜쥐었다.
“커헉-!”
명왕의 손아귀에 붙잡힌 쉐도우가 한 움큼, 검은 피를 토해냈다.
명왕의 손아귀에는 명계의 냉기와 죽음이 감돌고 있었다.
그저 붙잡힌 것만으로도 평범한 유저라면 상당한 데미지를 입게 된다.
“그럼, 흔적은 내가 가져갈게.”
스킬 발동, 데스 터치.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죽음이 깃든 제로의 왼손이 쉐도우의 몸에 닿았다.
그에 쉐도우는 제로의 손을 통해 흘러들어 오는 막대한 죽음에 육체가 붕괴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제-! 로-!”
완전히 죽기 직전, 쉐도우가 발악적으로 제로를 향해 외쳤다.
“반드시! 반드시 죽여 주마! 제로!”
“노력해 봐.”
자신을 향해 복수를 다짐하는 쉐도우에 제로가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쉐도우 정도 되는 유저라면 계약을 맺을 가치가 존재했다.
단….
“스타툰을 발견하기 전이었다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