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후웅-!
콰아앙!
제로가 쥔 망자의 폭거와, 학살의 진천사가 쥔 선홍의 십자가가 충돌했다.
사방으로 거대한 충격이 휘몰아치며, 그 둘이 딛고 있던 대지는 유성이라도 떨어진 양 움푹 파이며 가라앉았다.
“고작 이 정도로 큰소리친 것이냐! 어리석은 언데드여!”
“설마.”
학살의 진천사의 분노 어린 외침에 제로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제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제로의 등 뒤로 명계의 냉기가 뭉친 수십 자루의 창이 만들어지며 쏘아졌다.
푸부부북-!
“크흡!”
수십 개의 창 중, 학살의 진천사에게 명중한 것은 단 3자루.
허나 그것만으로도 학살의 진천사의 입에선 고통 어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학살의 진천사가 아무리 5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라 한들, 지금의 그것은 너프될 대로 너프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육체 내부에서 퍼져 나가는 명계의 냉기는 학살의 진천사에게 상당한 타격을 안겨 줬다.
“놈!”
화르륵-!
학살의 진천사가 다시 한번 분노어린 외침을 토해냈다.
그 외침을 기점으로 5쌍의 날개를 시작으로, 학살의 진천사의 육체 자체가 검붉은 화염으로 변했다.
“성염화. 확실히 까다로운 스킬이야.”
제로는 후끈한 열기를 발산하는 학살의 진천사를 바라보며 쯧! 혀를 찼다.
성염화는 말 그대로 자신의 육체를 불꽃으로 변화시키는 스킬이었다.
다만, 그것은 평범한 불꽃이 아니었다.
신성 속성과 화속성의 복합 속성으로 이루어진 불꽃이다.
비록 타락했기에 온전한 신성 속성이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제로의 천적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불꽃은 너만 다룰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스킬 발동, 죽음의 불꽃.
화륵-!
스킬이 발동되며 제로가 쥔 망자의 폭거에 잿빛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망자의 폭거에서 피어오른 불꽃 또한 죽음과 화염 속성이 뒤섞인 복합 속성이다.
아니, 거기에 저주까지 곁들여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학살의 진천사의 성염화보다 더욱 흉악한 불꽃이었다.
“성스러운 불꽃 앞에 사라지거라!”
“신에게 반기를 들어 타락한 놈이 성스러움이니 뭐니 언급하는 거 안 쪽팔리냐?”
콰가가강-!
선홍의 십자가와 망자의 폭거가 충돌할 때마다, 사방으로 불꽃의 파편이 흩날렸다.
아무리 너프되었다지만 학살의 진천사는 5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이다.
그 힘은 현 랭킹 1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역천의 궁에 오기 전 상대했던 무색의 성자 베이글. 그 이상의 강함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나야.’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상대는 강하다.
하지만 자신이 더 강하다. 그것은 오만도, 자만도 아닌 진실이며 자신감이었다.
“우선 무대 좀 바꿀까?”
스킬 발동, 데스 그라운드.
파앗-!
네크로노미콘에 내재된 스킬, 데스 그라운드가 발동했다.
제로를 중심으로 폭발하듯 뿜어진 죽음이 역천의 궁 내부를 가득 메웠다.
학살의 진천사는 자신이 서 있는 장소 외에도, 역천의 궁 내부를 가득 메우며 잠식해 들어가는 죽음에 코웃음 쳤다.
“어리석구나! 이곳은 그분의 성지! 한낮 죽음 따위가 침식할 수 있으리라 생각…!”
자신만만하게 외치던 학살의 진천사의 표정이 악귀와도 같이 일그러졌다.
제로로부터 뿜어져 나온 죽음은 역천의 궁 내부를 가득 메운 신성에 정화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 신성마저 집어삼키며 역천의 궁 내부를 죽음만이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죽음이 깃들어 썩어 문드러진 대지는 딛고만 있어도 죽음이 흘러들어 온다.
죽어 버린 대기는 호흡을 한 번 들이마실 때마다 폐를 부패시켰다.
지금까지의 데스 그라운드는 사용된 장소가. 혹은 그 상대가 나빴기에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이다.
지금 펼쳐진 것이야말로 데스 그라운드의 진정한 무서움이자 진정한 강함이었다.
“아직 멀었어.”
제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발동, 데스 로어.
크아아아아-!
제로의 입이 쩍! 벌어지며 죽음이 깃든 포효가 터져 나왔다.
괴물의 그것과도 같은 포효가 터져 나오는 순간, 학살의 진천사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지금의 데스 로어로는 학살의 진천사에게 즉사 효과를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 정신에 크나큰 타격을 주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 증거로 성염화를 발동시켜 불꽃이 되어 버린 학살의 진천사의 육체가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놈-! 죽여 버…!”
“한번 해 봐.”
스킬 발동, 데스 부스터.
콰앙!
발바닥에서 죽음이 폭발하는 순간, 제로의 신형은 어느새 학살의 진천사의 앞에 나타났다.
순식간에 학살의 진천사의 앞에 도착한 제로는 망설임 없이 망자의 폭거를 휘둘렀다.
후웅-!
묵직한 파공음을 동반하며 내질러지는 망자의 폭거는 정확히 학살의 진천사의 목을 노렸다.
그러한 망자의 폭거의 칼날에는 죽음, 불꽃, 저주가 뒤섞인 복합 속성의 죽음의 불꽃 외에도, 다종다양한 마법과 저주가 깃들어 그 힘이 극대화되었다.
콰직-!
“끄아아아아아-!”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망자의 폭거가 학살의 진천사의 목에 틀어박혔다.
학살의 진천사는 목을 통해 느껴지는 격통. 그리고 상처를 통해 흘러들어 오는 죽음과 각종 저주에 비명을 내질렀다.
입이 찢어져라 벌린 채 내뱉는 비명은 마치 죽음을 앞둔 생명의 단말마와도 비슷했다.
“아직 멀었어.”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스킬 발동, 망자의 역린.
스킬 발동, 데스 퍼레이….
고작 목에 칼 하나 박혔다고 학살의 진천사는 죽지 않는다.
성염화를 발동시키기 전이라면 급소 판정으로 즉사했을 공격이었지만, 육체가 불꽃이 되어 버린 이상 학살의 진천사에겐 ‘생명체에 해당하는 급소’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
그렇기에 제로는 망설임 없이 다양한 마법을 학살의 진천사에게 때려 박았다.
죽음의 파동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학살의 진천사의 육체를 두드렸다.
머리 위로 망자가 뭉쳐 만들어진 수십 개의 창이 쏟아져 내려 학살의 진천사의 몸에 틀어박혔다.
그 외에도 각종 마법이 학살의 진천사의 생명을 착실히 갉아먹었다.
그럼에도 학살의 진천사는 건재했다.
하지만 극심한 타격에 육체를 이루는 불꽃은 상당 부분 사그라들고, 그나마 남아 있는 불꽃 또한 언제 꺼질지 모를 정도로 사그라들었다.
그럼에도 학살의 진천사는 그 질긴 목숨줄을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내가…! 이 내가! 위대하신 분의 선봉장으로 활동했던 이 내가 하찮은 언데드 따위에게 죽을 성싶으냐!”
파앗-!
뒤로 물러나며 외치는 학살의 진천사에게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니, 더욱 정확히는 학살의 진천사가 걸치고 있는 역천의 의복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빛무리가 사그라들며 나타난 학살의 진천사는….
“후우-.”
처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제로에게 받은 모든 상처와 데미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언데드여. 너의 강함을 인정한다. 설마 내가….”
“인과 역전.”
“호-! 알고 있었느냐?”
제로의 말에 학살의 진천사가 의외라는 눈초리를 했다.
아니, 상대는 역천의 의복을 노려 역천의 궁에 침입했다. 권능과도 같은 이 힘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한편 제로는 까다롭게 됐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인과 역전.
말 그대로 자신에게 해당된 인과를 역전시켜 한 달에 한 번, 모든 상처와 저주, 데미지를 지우고 최상의 몸 상태로 되돌아가는 기술이다.
그것은 역천의 의복에 내재되어 있는 스킬 중 하나로, 제로가 역천의 의복을 탐내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허상계와의 전쟁에선 한 번의 죽음은 말 그대로 죽음이다.
로스트 월드 때처럼 다시 부활할 수 없기에, 인과 역전 같은 스킬은 또 하나의 목숨이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설마 몬스터가 인과 역전을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지.’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학살의 진천사가 입을 열었다.
“다시 시작해 보자꾸나. 그것보다 우선 이 거슬리는 죽음부터 없애야겠군.”
화륵-!
화르륵!
학살의 진천사가 성염화와 함께 또 다른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순백의 불씨가 무섭게 덩치를 불리며, 넘실거리는 파도와 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성염의 파도.
그것은 말 그대로 신성과 불꽃의 복합 속성으로 이루어진 불꽃을 퍼트리는 스킬로, 제로의 데스 웨이브나 다크 웨이브와 비슷한 메커니즘의 스킬이었다.
제로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성염의 파도를 망자의 폭거로 베어 버리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흡!”
쩌엉-!
허공에서 선홍의 십자가와 망자의 폭거가 충돌했다.
그로 인해 둘이 딛고 있던 대지가 다시 한번 운석이라도 떨어진 양 움푹 파이며 가라앉았다.
“이제야 좀 받아낼 만 하구나.”
서로 교차한 선홍의 십자가와 망자의 폭거 사이로 제로를 바라보는 학살의 진천사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인과 역전은 사기 스킬이었다.
데스 로어로 뒤흔들리다 못해 부서져 내린 정신은 물론. 데스 그라운드에 의해 각종 저주와 데미지가 누적된 육체까지.
무엇하나 빠짐없이 만전의 상태로 되돌려 버렸다.
지금의 학살의 진천사에겐 더이상 데스 그라운드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하다못해….
‘데스 로어라도 한 번 더 사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허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안 그래도 페널티를 무시한 채 억지로 데스 로어를 다시 한번 사용한 반작용으로 대량의 사마력을 소비해 버렸다.
아무리 제로가 보유한 사마력의 양이 마르지 않는 대해와도 같다고 해도, 그것은 뼈아픈 손실이다.
지금 상황에서 또 한 번 데스 로어를 사용한다면, 이제는 사마력뿐만이 아니라 생명까지 깎여 나갈 것이다.
“칫.”
스킬 발동, 명왕의 손아귀.
콰르르-!
제로가 혀를 차며 스킬을 발동했다.
학살의 진천사의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만들어지며, 그 마법진으로부터 명계의 냉기를 품은 거대한 뼈의 손이 튀어나왔다.
명왕의 손아귀.
제로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중, 최상위에 속한 것으로 한번 붙잡히면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다.
하지만….
“소용없다.”
흡-!
짧은 기합성과 함께 학살의 진천사를 이루는 불꽃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명왕의 손아귀는 부풀어 오른 불꽃에 집어삼켜져,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소멸했다.
“이번에 내 차례다.”
화륵-!
학살의 진천사가 뒤로 물러나며 손에 쥔 선홍의 십자가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선홍의 십자가가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수백 발의 성염의 화살이 만들어지며 제로를 향해 쏘아졌다.
“미치겠네.”
스킬 발동, 죽음의 장막.
펄럭-!
죽음으로 이루어진 장막이 제로를 감쌌고, 성염의 화살을 집어삼켰다.
수백 발의 화살을 집어삼킨 죽음의 장막은 제 역할을 다했다는 양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직이다.”
화륵-!
죽음의 장막이 사라지기 무섭게 학살의 진천사가 다시 한번 스킬을 사용했다.
이번에 만들어진 것은 초고온의 구체.
하나하나가 수천 도를 웃도는 그것이 내뿜는 열기만으로도 대지가 지글지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죽어라.”
후우웅-!
학살의 진천사가 만들어 낸 성염의 구체는 총 열여섯 발.
그것들이 제로의 사방을 점하며 쏟아졌다.
그에 제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치겠네.”
스킬 발동, 데스 더스트.
콰가가강-!
치이이이이익-!
불꽃에는 냉기로.
제로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성염의 구체를 데스 더스트로 응수했다.
죽음이 깃든 냉기가 성염의 구체와 충돌하는 순간, 거대한 폭발과 함께 자욱한 수증기를 만들어 냈다.
제로는 수증기 안에서 죽음의 옷자락의 후드를 푹 뒤집어쓰며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 끝까지 가 보자 이거지?”
어느새 제로가 손에 쥐고 있던 망자의 폭거는 네크로노미콘으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