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무… 슨…!”
강한의 두 눈동자가 떨렸다.
“너… 죽음이야?”
[그럼 누구겠냐? 멍청한 계약자야.]
[고작 저따위 쓰레기를 상대로 고전하다니.]
[그러고도 내 계약자라고 할 수 있겠냐?]
“네가 어떻게…!”
죽음의 말이 이어질수록 강한의 두 눈동자가 더욱 격하게 흔들렸다.
죽음은 로스트 월드 속 존재가 아니었던가?
어떻게 현실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그런 강한의 의문을 눈치챘다는 듯, 죽음이 이어 말했다.
[확실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세계야.]
[다른 인간들이었다면 단순히 오락으로 치부해도 할 말이 없겠지.]
[하지만 넌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실망이네.]
‘아니, 아니야.’
죽음의 말에 강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로스트 월드가 단순한 게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강한 또한 로스트 월드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로스트 월드 속 존재가 현실에서 말을 걸 수 있는 거지?’
수억이 넘어가는 유저 중에는 당연하게도 로스트 월드 속 존재를 소환할 수 있는 유저 또한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이 소환한 모든 존재는 이성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그저 명령을 받은 대로 움직일 뿐인 인형으로 전락했다.
그렇기에 강한은 죽음이 현실에서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 자체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충격을 받은 건 알겠는데, 우선 눈앞에 저 쓰레기부터 정리하지?]
포인트를 잡지 못한 죽음의 말이었지만, 강한은 시선을 옮겼다.
그런 강한의 두 눈동자에는 주변을 가득 메운 죽음에 겁을 집어먹은 최하급 허상괴가 내비쳐졌다.
“그래, 그래야지.”
강한은 다소 기가 죽어 버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강한이 손을 들어 올리자, 손 위로 죽음이 뭉치며 하나의 서책. 보는 자로 하여금 본능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로테스크한 형태의 네크로노미콘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윽.
“죽어.”
푸부북-!
강한은 비어 있는 손으로 최하급 허상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에 강한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죽음이 뭉쳐 다수의 화살이 되었고. 수십 발의 화살은 하나도 빠짐없이 최하급 허상괴의 몸에 틀어박혔다.
최하급 허상괴는 몸에 틀어박힌 화살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죽음에 단말마 한 번 내뱉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아니, 그 이상으로 흘러 들어간 죽음에 살점 하나 남기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최하급 허상괴를 죽인 강한은 멍한 눈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 * *
“하, 하하. 아하하하.”
집에 도착한 강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나 그 웃음은 음의 높낮이도, 일체의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은. 소위 말하는 ‘죽은 웃음’에 불과했다.
“이상하긴 했어. 아무리 허상계의 침입이라는, 소설 속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 펼쳐졌다 해도 사람들이 로스트 월드에서의 능력을 각성했다는 게 말이야.”
[지구… 라고 했던가? 네가 말하는 로스트 월드라는 오락은 이 차원을 담당하는 신이 마련해 둔 안배이겠지. 어지간히 생명을 아끼는 신이네. 다른 신 같았으면 차라리 리셋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텐데.]
죽음의 말에 강한은 그저 침묵했다.
죽음 또한 침묵하는 강한에게 딱히 다른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침묵이 이어졌을까.
죽어 있던 눈동자에 빛이 들어서며, 강한은 몸을 일으켜 캡슐에 누웠다.
[계속 하게?]
“해야지.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해.”
[뭐, 확실히 묘한 제약이 있지만, 그곳에서 활동하는 게 더욱 빨리 강해질 수 있겠지.]
죽음 또한 제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강한은 그런 죽음의 말을 속으로 삼키며 로스트 월드 속으로 들어갔다.
접속한 강한 아니, 제로가 나타난 장소는 로스트 월드에서 아직 그 어떤 유저들도 들어서지 못한 사냥터, 타락의 숲이었다.
타락의 숲은 흔히 마스터 레벨이라 불리는 500레벨 이상의 유저들을 위한 사냥터였다.
그것도 전직을 끝마친 유저들을 위한 사냥터로 등장하는 몬스터는 타락한 신성 혹은 정화된 마성이라는 속성을 가진 몬스터들이었다.
타락의 숲이라는 이름 그대로 타락 계열의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쓸어버려.”
무심하게 떨어지는 제로의 명령에, 등 뒤에 열린 외차원의 창고에서 온갖 망자들이 쏟아져 나오며 타락의 숲을 휩쓸었다.
제로가 강해지는 만큼 망자들 또한 강해진다.
그렇기에 어지간히 강력한 보스 몬스터가 아닌 이상, 평범한 사냥터의 평범한 잡몹들은 망자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물론 레벨이 깡패라고 타락의 숲에 나오는 몬스터들 또한 나름의 힘을 발휘했지만, 그래 봤자 단순한 망자들이다.
그것들은 언제 어느 때든 보충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렇게 제로는 타락의 숲을 휩쓸며, 각종 몬스터들의 시체를 수집함과 동시에 숲의 중앙으로 전진했다.
“여기가 역천의 궁의 입구.”
타락의 숲의 중앙.
숲의 주인이자 보스 몬스터 중 하나인 신성에 물든 케르베로스의 시체를 뒤로 한 채 제로가 입을 열었다.
신성에 물든 케르베로스의 시체는 외차원의 창고에 빨려들듯 사라졌으며, 제로의 눈에는 하나의 마법진이 내비쳐졌다.
마법진은 신어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것에서 느껴지는 힘은 주신 오딘의 신성력과 마신 알루타의 신성력이었다.
“역천의 궁으로 향하는 입구여. 그 모습을 드러내라.”
제로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신성의 조각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마법진은 제로의 주문과 함께 던져진 조각에 호응하듯 환한 빛과 어둠을 뿜어냈다.
빛과 어둠은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로 뿜어졌다 사그라들었으며. 그 둘이 사라진 자리에는 하나의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어둠’이라는 상반된 무언가를 품은 게이트.
제로는 그것을 보는 순간 단숨에 깨달았다.
저 게이트가 바로 역천의 의복이 잠들어 있는 던전 역천의 궁으로 향하는 입구라는 것을.
“죽음.”
[왜?]
“나는… 잘하는 걸까?”
[너는 강해지는 것에만 집중해. 그리고 어차피 이곳은….]
“우리들을 위한 수련장에 불과하다… 맞지?”
죽음은 침묵했다.
제로의 말이 맞았다.
로스트 월드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로스트 월드 속 NPC와 몬스터들은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생명이었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 숨 쉬는 인형’에 가까웠다.
지구의 신이 마련한 수련장. 오직 지구의 인간들을 강하게 만들어, 허상계의 침입으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수련장.
그것이 로스트 월드의 정체였다.
제로는 침묵하는 죽음을 뒤로하며 망설임 없이 게이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으음.”
눈앞을 가리는 환한 빛이 사라지고, 제로의 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성문이었다.
성문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광물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져 상당히 단단했다.
강제로 성문을 부수기 위해선 최소 800레벨 이상은 돼야 할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성문에는 자그마한 홈이 파여져 있다는 것이다.
제로는 인벤토리에서 암흑의 조각을 꺼내, 성문에 파여진 홈에 그것을 박아 넣었다.
그그극-!
암흑의 조각이 박히기 무섭게 성문이 듣기 싫은 굉음과 함께 열렸다.
“가자.”
제로는 열린 성문 너머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갔다.
성문을 지나치기 무섭게 제로의 앞에 다수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그것은 역천의 궁에 최초로 입장했다는 알림창이었으며, 최초 입장에 의한 각종 혜택 따위를 알려 주는 창이기도 했다.
“외차원의 창고, 오픈.”
스킬 발동, 망자의 대군단.
스킬 망자의 대군단.
망자의 군단에서 진화한 스킬로, 기존의 군단이 최대 천 마리까지 망자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망자의 대군단은 최대 오천 마리까지 망자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상당한 숫자의 시체가 소모되지만, 한 번의 스킬로 오천 구의 시체를 망자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매력적인 힘이었다.
스킬이 발동하자 외차원의 창고로부터 온갖 종류의 망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한 것은 망자의 병사였으며. 그다음으로 정예병과 광전사. 궁병과 창병, 방패병 따위였다.
제로의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따로 제작이 아닌, 기본적으로 창병이나 방패병이 추가됐다.
한 가지 의문인 것은….
“왜 궁병은 제작해야 하면서 창병이나 방패병은 기본적으로 추가되는 것인지.”
어쩌면 궁기병을 만들다 우연히 만들어졌기에, 미리 스킬에 등록된 것일 수도 있었다.
한편, 제로는 망자들을 이끌며 망설임 없이 역천의 궁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척척척-!
역천의 궁 내부로 들어가기 무섭게 오천의 군세가 오와 열을 맞춰 제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크아아악-!
키엑!
끼아아악!
사방에서 각종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역천의 궁 내부 구조는 단순했다.
겉으로는 거대한 성과 같이 생겼지만, 그 내부는 텅 비어 있다.
그런 역천의 궁 내부를 가득 메운 것은 말 그대로 몬스터 대군!
제로가 소환한 망자들의 숫자에 비견되는 수천의 몬스터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쓸어버려.”
콰가강!
역천의 궁의 몬스터와, 제로의 망자들이 충돌했다.
사방에서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역천의 궁은 타락의 숲에서 들어갈 수 있는 만큼 그 레벨이 상당했다.
특히나 던전에 있는 몬스터답게 평범한 사냥터에 있는 몬스터들보다 상당히 강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전투의 양상은 역천의 궁의 몬스터들이 우세했다.
하지만.
“나는 네크로맨서란 말이지.”
병력이 부족하면 소환하면 그만이다.
외차원의 창고에는 지금까지 수집한 시체가 차고 넘치도록 저장되어 있다.
그 숫자는 가볍게 물경 수십만을 넘어선다.
그것을 증명하듯, 제로의 등 뒤로 열려 있는 외차원의 창고에선 끝없이 망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망자들은 이게 전부가 아니야.”
스킬 발동, 데스 솔저.
스킬 발동, 망자의 손아귀.
스킬 발동, 망자의 거병.
스킬 발….
손에 쥔 네크로노미콘에서 죽음이 흘러넘치며, 각종 스킬들이 발동되었다.
망자의 대군단으로 소환할 수 있는 것들 외에도, 데스 솔저니 너프된 어보미네이션이니. 망자의 거병이니 하는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제로는 그것들에게 버프를 부여하고, 역천의 궁 몬스터들에게 각종 공격 마법과 저주 마법을 사용하는 등.
거의 만능에 가까운 힘을 보여 줬다.
허나 이곳은 역천의 궁이다.
이곳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타락했다지만 기본적으로 신성 속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나 가장 까다로운 특성은….
그아아아-!
가장 뒤에 존재하는 몬스터. 얼핏 보면 리치로 착각할 법한 외형의 그것이 손을 들어 올리며 괴성을 내지르자, 전장의 위로 새하얀 빛이 쏟아졌다.
그것들은 제로가 소환한 망자들에겐 데미지를 입히고, 역천의 궁의 몬스터들에겐 온갖 버프와 힐링을 부여했다.
“까다롭네.”
마치 좀비를 보듯, 온갖 망자들의 공격 속에서도 끈질기게 움직이는 몬스터들에 제로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날 상대로 물량 싸움을 해 보겠다 이거냐?”
이런 류의 싸움에선 네크로맨서를 이길 존재는 없다.
특히나 그런 네크로맨서의 극 상위 호환이나 다름없는 진.죽음의 지배자라는 직업을 가진 제로라면 더더욱 말이다.
“어디 한번 놀아 보자고.”
제로가 공허한 두 눈구멍에서 흉흉한 검은 안광을 분출하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