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몸이 묘하게 가벼워.’
허상괴의 기척을 느끼고 전력 질주로 달린 지 벌써 5분이나 됐다.
그럼에도 강한은 숨 하나 차지 않는 이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다.
오랜 게임으로 몸이 빼빼 마를 정도가 되었음에도, 도리어 육체적 능력은 게임을 하기 전보다 아니, 그 이상으로 늘어났다.
‘아니,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어째서 육체 능력이 늘어났는가?
그것은 지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 허상괴를 찾아내야 했다. 지금의 자신이 허상괴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99.99%의 확률로 내가 죽겠지.’
허상괴는 말 그대로 괴물이다.
지구에서 활동하기 위해선 육체가 필요하고. 육체를 가지게 된다면 그 능력이 다소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약한 최하급 허상괴라 하더라도 평범한 인간이 이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강한은 왜 달려가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강한 본인조차 몰랐다.
단순히 회귀하며 품은 ‘인류의 구원자’라는 사명감이 강한의 몸을 움직이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강한이 얼마나 달렸을까.
늦은 시간임에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점차 사라지고. 환한 빛이 가득한 대로변을 벗어나 도착한 장소는 서울 어디에나 있을법한 달동네 중 하나였다.
“여기 어딘가에 있어.”
서울 거리를 한 시간 동안 전력 질주를 했음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강한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허상괴는 분명 이 근처에 있었다.
6감이니 뭐니 하는 것들 외에도, 허상괴 특유의 공허함이 달동네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두리번, 두리번.
달동네를 조심스레 거닐던 강한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달동네라고 해도 서울 내에 위치한 동네. 강한의 눈에는 딱히 무기로 사용할 만한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결국 제로는 맨손으로 허상괴를 찾아 나섰다.
무언가 무기라도 있었다면 이길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가겠지만, 만약 상대가 정말로 허상괴라면.
그렇다면 로스트 월드의 아이템이 아닌 이상 큰 변화는 없었다.
현실의 무기는 사용자에게 단순히 심리적 안정감을 줄 뿐이다.
그나마 하급 허상괴까지는 현대의 무기가 통용된다.
하지만 중급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 되어 버리는 것이 현대의 무기였다.
“후우-.”
한참 동안 달동네를 돌아다니던 강한은 깊은숨을 토해 냈다.
달동네에는 이렇다 할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허상괴라 생각했던 느낌과 감각도, 단순히 전쟁이 가까워짐에 따라 초조해진 마음에서 우러나온 착각에 불과했다.
적어도 강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이제는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허상괴의 침입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으니, 최대한 빠르게 역천의 의복을 구하고. 나아가 레벨업 따위로 전쟁을 대비해야 했다.
그렇게 제로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바스락-!
흠칫!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강한이 몸을 떨었다.
동시에 강한의 시선이 홱! 하며 돌아갔는데, 그렇게 돌아간 시선에 들어선 것은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고 있는 한 마리의 길고양이였다.
“뭐야, 평범한 고양…!”
오싹!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풀리던 긴장감이 일순 심장을 옥죄인다.
동시에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무언가가 길고양이로부터 흘러나왔다.
이 느낌은….
“허상괴!”
야옹!
강한의 외침과 동시에 길고양이의 입에서 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평범한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듣는 순간 강한은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평범한 길고양이가 아니다. 겉은 고양이에 불과하지만, 그 속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끈 괴물 허상괴다… 라는 것을.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강한을 향해 울부짖은 길고양이의 육체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까드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길고양이의 육체가 이리저리 망가지고, 수축되며 팽창한다.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 흐르자,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단순한 길고양이가 아니게 되었다.
발톱은 길고 날카롭게 변해 한 자루의 검을 연상케 한다.
전신을 뒤덮은 검은 털은 전부 뽑혀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가득 메운 것은 파충류의 그것과 같은 초록빛 비늘이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는 입술을 비집고 나와 툭 튀어나왔으며. 덩치 또한 족히 3배 이상 거대해졌다.
“등급은 최하급. 하지만….”
위험했다.
아직 자신은 플레이어의 능력을 각성하지 못했다.
상대가 최하급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자신에겐 과거 상대해 봤던 왕과 동급의 위험도를 가지고 있다.
“젠장!”
최하급 허상괴를 눈앞에 둔 강한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도망칠까?
아니, 그건 안 된다.
지금 여기서 저것을 막지 못한다면 극심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군대가 동원되기 전까지 최소 백 이상의 인간이 죽을 것이다.
‘그럴 순 없어.’
각오를 다진 강한은 최하급 허상괴를 노려보며 자세를 잡았다.
크르르-.
최하급 허상괴는 자신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 아니, 도리어 전의를 불태우는 강한의 존재에 낮은 울림을 토해 냈다.
그 울림에 깃들어 있는 감정은 불쾌감.
최하급 허상괴의 눈에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강한이 단순히 먹이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이지 않았다.
“덤…!”
언제 움직인 것일까?
순식간에 강한의 앞에 도착한 허상괴가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왔다.
전의를 불태우며 호기롭게 외치던 강한은 다급히 몸을 날렸다.
동시에 허상괴의 발톱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대지에 기다란 상흔을 만들어 냈다.
“꿀꺽-!”
강한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만들어지는 네 개의 길쭉한 상흔에 마른침을 삼켰다.
몸을 날리는 것이 1초. 아니, 0.5초라도 늦었다면 갈라지는 것은 바닥이 아닌 자신의 몸뚱어리였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저도 모르게 품은 약한 생각에, 강한은 양손으로 뺨을 내리쳤다.
약해지면 안 된다.
그나마 강한에게 있어 행운인 것은 상대가 최하급 허상괴라는 것이다.
“해 보는 거야!”
쾅!
각오를 다진 강한이 움직였다.
바닥을 박차는 순간,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강한의 육체가 쭉 늘어나며 순식간에 최하급 허상괴의 앞에 당도했다.
“죽어!”
후웅-!
퍼억!
키에에엑!
묵직하게 휘둘러진 강한의 주먹이 최하급 허상괴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최하급 허상괴는 먹이로만 생각했던 인간의 공격에 고통을 느꼈다는 것에 놀라는 한편. 그것에 불쾌하다는 듯 괴성을 내질렀다.
허나 가장 놀란 것은 강한 본인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움직이고, 자신이 공격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의 움직임은 명백히 인간의 한계를 돌파했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극한의 노력과 수련을 거친 격투기 선수의 움직임. 그것도 최전성기를 누리는 격투기 선수급의 움직임이었다.
게임을 통해 빼빼 말라 버린 몸뚱어리로 어떻게 이런 움직임을 내보일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이곳까지 전력 질주로 달려왔음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숨 한 번 거칠어지지도 않았다.
무언가.
자신의 육체에.
‘변화가 생겼어.’
변화가 생겼다.
다행인 점은 그 변화가 썩 나쁘지만은 않다는 점이었다.
한편, 제로가 자신의 변화에 놀라고 있을 때. 최하급 허상괴가 다시 한번 괴성을 내지르며 움직였다.
“크앙-!”
거친 포효와 함께 허공으로 뛰어오른 허상괴가 양발을 휘둘렀다.
하나의 발에 네 개의 칼날과도 같은 발톱이 자라나 있다.
칼날과도 같은 발톱 여덟 개가 허공을 가르자, 강한은 바닥을 구르며 회피 동작을 취했다.
하지만…
“캬아앙-!”
최하급 허상괴는 ‘이번에 놓치지 않는다!’라고 외치듯 다시 한번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에 자연스레 여덟 개의 칼날의 궤도 또한 틀어지며 하나의 발톱이 강한의 등을 훑고 지나갔다.
“크윽-!”
강한은 등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에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천만다행으로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강한은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 새끼. 꼴에 허상괴는 허상괴다, 이거냐?”
캬르르.
강한의 말에 최하급 허상괴는 낮은 울림을 토해내는 것으로 받아쳤다.
그렇게 얼마나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을까.
1시간 같은 1초가 지나기 무섭게, 둘은 동시에 움직였다.
“뒈져!”
캬아아악!
서로가 바닥을 박차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렇게 허공에서 교차되는 순간, 둘은 망설임 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최하급 허상괴는 두 개의 앞발에 달린 여덟 개의 발톱을 휘둘렀으며.
강한은 뼈가 으스러져라 움켜쥔 두 주먹을 내뻗었다.
촤악!
뻐억!
최하급 허상괴의 발톱이 강한의 가슴을 가로지르며 세 개의 상흔을 만들었다.
강한의 양 주먹이 최하급 허상괴의 명치와 인중에 틀어박히며 뼈를 박살 냈다.
한 방씩 주고받은 둘은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비틀거렸다.
세 줄기로 갈라진 강한의 가슴팍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명치와 인중을 가격당한 최하급 허상괴는 잠시 비틀거리다 털썩 쓰러졌다.
“하, 하하. 아하하하하!”
비틀거리던 강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겼다. 플레이어로 각성하지 않았음에도 허상괴를 처리했다.
비록 최하급 허상괴이지만, 허상괴는 허상괴. 그것을 처리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강한의 기분은 끝없이 고취되었다.
하지만….
부스럭.
“설마!”
쓰러진 최하급 허상괴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 급소를 가격당했다. 그 충격은 지구의 그 어떤 생물도 즉사를 면할 수 없는 위력이다.
하지만 강한에게 불행하게도 최하급 허상괴는 ‘평범한 지구의 생물’이 아니었다.
지금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지만 그 본질은 정신체인 허상괴다.
육체의 부상 따위, 그것들은 언제든지 복구할 수 있었다.
다만, 최하급 허상괴이기에 그 복구는 상당히 느릿했다.
“미치겠네.”
강한은 멍하니 최하급 허상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잠깐의 승리에 고취되어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아니, 갑작스러운 허상괴의 등장에 잊고 있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최하급이 되었든, 최상급이 되었든. 허상괴를 죽이기 위해선 육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핵을 부셔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한편, 어느 정도 육체를 수복한 최하급 허상괴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강한을 향했다.
그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것은 살의. 그리고 분노였다.
한낮 먹이 따위가 자신에게 반항하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크아아앙!
분노 가득한 포효를 터트린 최하급 허상괴가 강한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둘의 사이는 족히 10m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최하급 허상괴는 순식간에 강한의 앞에 당도했다.
캬앙!
마치 ‘죽어!’라고 외치는 듯, 다시 한번 포효를 터트린 최하급 허상괴가 앞발을 휘둘렀다.
그것의 앞발에 달린 네 개의 날카로운 발톱은 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를 찢어발기며 강한의 심장을 노렸다.
강한은 점차 가까워지는 네 개의 발톱을 멍하니 바라봤다.
‘피를 너무 흘렸어.’
지금 강한의 상태는 서 있는 것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가슴에 새겨진 상처를 통해 인간이라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피를 흘렸다.
눈앞의 최하급 허상괴의 공격을 피할 기력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하, 이렇게 죽는 거야?’
강한이 속으로 중얼거려다.
설마 이따위로 미래가 뒤틀릴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자신의 실책이었다.
그래도….
‘보험은 들어 놨어.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네.’
암흑기사 벤과 계약했다.
무색의 성자 베이글과 계약했다.
그 외에도 로스트 월드 유저들에게 다양한 히든 피스 따위의 정보를 공개해 놨다.
완벽하진 않지만, 이 정도라면 미래의 전쟁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강한이 죽음을 각오한 그때였다.
[뭐 하는 거냐, 멍청한 계약자야.]
푸확-!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강한을 중심으로 잿빛의 기운. 죽음이 폭발하며 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