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베이글이 한 발 내딛는 순간,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제로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큭-!”
플라잉 마법을 통해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제로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 멀었어.”
한 방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베이글은 거리를 벌리는 제로에게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신성 강림-마의 지속 시간은 단 5분.
그 안에 승부를 내지 못하면, 스킬의 페널티로 베이글의 자동 패배였다.
“막아!”
우루루-!
끈덕지게 따라붙으며 처형자를 휘두르는 베이글에 제로가 버럭 외쳤다.
다급한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천의 망령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은 제 몸을 던져 어떻게든 베이글의 움직임을 방해하려 했지만….
“소용없어!”
콰가강-!
베이글의 손에 쥐어진 처형자가 한 번,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수백의 망령들이 흔적도 없이 박살 나 사라졌다.
제로의 강함 또한 일반적인 유저들과는 궤를 달리했지만. 신성 강림-마를 사용한 베이글의 강함은 그것을 훨씬 웃돌았다.
어떻게 이런 강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창고지기를 사냥하지 못했던 것일까.
‘페널티 때문이겠지.’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제로 스킬을 발동했기에 따라붙은 페널티 중 가장 극심한 것은 스킬이 끝나는 순간, 레벨과 스탯의 영구적인 하락이었다.
그러한 페널티 덕분에 천상의 탑이나, 검은 마탑의 비밀 창고에서도 사용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암흑의 조각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한 듯 보였다.
“순순히 죽어라!”
콰가강-!
처형자가 휘둘러지며, 참격의 형태를 띤 마신 알루타의 신성력이 줄기줄기 튀어나왔다.
대지가 뒤엎어지고, 사방으로 망령의 파편이 흩날린다.
제로는 플라잉 마법과, 가속 마법을 사용해 그 사이를 누비며 가까스로 베이글의 공격을 피했다.
‘이대로는 끝이 없어.’
제로는 사방팔방을 도망치며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저 괴물을 이길 수 있을까?
제로 또한 역천의 의복을 포기하기는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애초에 포기할 수 없었다.
제로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레전더리 이상의 아이템 중, 역천의 의복만큼 자신과 상성이 좋은 아이템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제로가 멈춰 섰다.
그에 베이글 또한 추격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이제 포기한 거냐?”
“설마.”
베이글의 질문에 제로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상대가 필사의 각오를 다졌다. 그렇다면 자신 또한 그에 상응하는 각오를 보여 줘야 한다.
그러한 생각 끝에 제로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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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입에서 명계의 언어로 된 영창이 흘러나왔다.
그에 호응하듯 막대한 죽음이 제로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베이글은 신성 강림-마를 사용한 상태임에도, 제로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죽음을 본 순간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저것을 가만히 둬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에라도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죽는다!
그러한 본능의 외침에 베이글이 움직였다.
한 발 내딛기 무섭게 마신 알루타의 신성력이 폭발했다.
그 추진력을 통한 가속으로 베이글은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죽어-!”
콰아아아앙-!
베이글의 전력을 다한 일격은 거대하면서도 단단한 성벽마저 일격에 무너트리는 위력을 가졌다.
하지만….
“무슨-!”
처형자가 제로를 휘감은 죽음과 충돌하는 순간, 베이글의 입에서 당혹스런 음색이 터져 나왔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부딪히는 순간, 처형자를 통해 흘러 들어온 반탄력에 베이글이 뒤로 물러섰다.
내부를 뒤흔드는 충격에 내상이라도 입은 것인지 입가에는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신성 강림-마를 사용하고도 뚫지 못했다고?’
베이글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제로를 바라봤다.
제로는 그런 베이글의 시선에 다시 한번 씨익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치트에 가까운 스킬은 너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거든.”
스킬 발동, 사신 강림.
끼아아아아악-!
제로의 입이 열리며 스킬이 발동되었다.
사신 강림.
베이글이 사용한 신성 강림-마와 비슷한 스킬이다.
다른 점은, 베이글이 사용한 스킬이 마신 알루타의 힘을 불러오는 것이라면.
제로가 사용한 사신 강림은 죽음의 힘을 스스로의 육체에 깃들게 하는 스킬이었다.
한편 사신 강림이 발동하자 사방에서 귀곡성이 퍼져 나오고, 계속해서 베이글을 향해 그 몸을 날리던 망자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무너져 내리는 망자를 이루고 있던 죽음이. 대지에 깃들어 지금 이 순간에도 홀리 그라운드와 싸우고 있던 데스 그라운드를 이루는 죽음이.
전장을 가득 메운 죽음이 한점에 집중하듯, 제로에게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모든 죽음을 흡수한 제로의 외형은 상당히 변해 있었다.
후드를 젖힌 제로는 흑골의 리치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런 제로의 머리에는 육체와는 대조되는 새하얀 뼈로 이루어진 왕관이 씌워져 있었으며. 제로의 몸을 뒤덮은 로브, 죽음의 옷자락에는 칼날과도 같은 무언가가 삐죽삐죽 돋아났다.
손에 쥐어진 네크로노미콘은 안개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거대한 낫으로 변해 있었다.
“하-.”
오싹-!
변화를 끝낸 제로가 낮은 숨을 토해내자, 전신의 털이 곤두선 베이글이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너… 진짜 유저가 맞는 거냐?”
자신 또한 괴물이지만, 눈앞의 제로는 같은 유저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데스 그라운드가 사라지며 홀리 그라운드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제로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깨 부서져 버렸다.
그뿐이랴? 제로가 숨을 내뱉으면 대기가 죽어 나갔으며. 제로가 한 발 내딛으면 대지가 죽어 나갔다.
저것을 일개 유저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거 지속 시간이 은근 짧거든. 그러니 후딱 끝내자?”
스윽.
제로가 대낫, 데스 사이드를 들어 올렸다.
그에 베이글이 다시 한번 움찔! 몸을 떨며 뒤로 물러났다.
허나 물러난 베이글조차 자신이 왜 물러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의문 어린 눈을 했다.
상태 이상 공포나 혼란에 빠졌다는 알림창은 뜨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신성 강림 상태에 들어가면 그런 상태 이상은 걸리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왜?’
베이글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제로가 움직였다.
저벅. 저벅. 저벅.
제로가 베이글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비어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촤르륵-!
제로의 손짓에 맞춰 사방에서 튀어나온 죽음의 사슬이 베이글의 몸을 휘감았다.
“웃기지 마!”
쩌엉-!
농밀한 죽음으로 이루어진 사슬이었지만, 베이글 또한 신성 강림-마를 통해 마신 알루타의 힘을 품은 존재.
베이글이 비명에 가까운 기합성과 함께 칠흑의 신성력을 뿜어내자 죽음의 사슬이 뒤흔들리며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이미 도착했어.”
1초.
아니,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제로는 이미 베이글의 앞에 도착한 지 오래였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찾아온다.”
“으아아아아아-! 마신의 단두대!”
머리 위에서 데스 사이드의 거대한 날이 떨어져 내렸다.
그에 맞서 베이글은 스스로가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스킬을 발동했다.
죽음을 품고, 무심히 떨어지는 데스 사이드.
그에 맞춰 칠흑의 신성력을 한계까지 품은 채 휘둘러지는 신기, 칠흑의 도끼 처형자.
그 둘이 충돌하면 주변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둘의 전투를 제3자가 보고 있었다면 반드시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둘의 무기가 충돌했음에도, 이렇다 할 충돌음도. 폭발음도. 파괴음도 일지 않았다.
두 개의 거대한 힘이 충돌하며 생기는 충격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제로가 휘두른 데스 사이드가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양, 침묵과 함께 처형자의 도끼날을 가르고.
나아가 그것을 휘두른 베이글의 몸을 세로로 양분해 버렸다.
* * *
“으아아아아-!”
바닥에 누워 있던 베이글이 끔찍한 비명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린 베이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전신은 스킬의 페널티로 극심한 무기력증에 휘말렸다.
그럼에도 베이글은 움직이지 않는 육체를 억지로 움직이며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얼마간 사방팔방을 살펴봤을까.
곧 베이글은 자신이 찾는 존재, 제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로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주저앉아 신성의 조각과 암흑의 조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졌다고…?”
“응, 졌어.”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을 들은 제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하. 하하하.”
베이글은 무덤덤한 제로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말해서 신성 강림-마를 쓰고 나서까지 질 줄은 몰랐다.
그나마 상대가 npc라면 이해라도 할 수 있었다.
유저들 사이에서 괴물이니 뭐니라 불려도, npc들 사이에서는 아직 ‘조금 강한 수준’에 불과했으니깐.
하지만….
“진짜 괴물이 따로 있었군.”
베이글은 승부를 깔끔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애초에 반박의 여지조차 없는 압도적인 승부였다.
“너무 낙심하지는 마. 신성의 조각에 대한 대가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좋은걸 알려 줄 테니.”
제로는 두 조각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베이글은 그런 제로를 ‘왜?’라는 눈으로 바라봤다.
이것은 거래였다.
굳이 저런 호의를 베풀 필요는 없었다.
그런 베이글의 의도를 읽은 제로가 피식 웃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야.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우리 거래 하나 할까?”
운을 띄운 제로의 말이 이어질수록, 베이글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 갔다.
* * *
꿀꺽꿀꺽.
제로 아니, 강한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강한이 사용하는 캡슐은 최고급 캡슐로, 최대 일주일 동안 접속해도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제품이었다.
그렇기에 상당히 오랜만에 캡슐에서 나온 강한은 로스트 월드와 현실에서의 괴리감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실도 오랜만이네.”
터벅터벅 걸어가 창밖을 바라보며 강한이 중얼거렸다.
현재 시각은 오전 3시 23분.
태양도 떠오르지 않은, 상당히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밝았다.
하늘을 뚫을 기세로 세워진 건물의 창문으론 밝은 빛이 흘러나왔으며.
거리 곳곳에는 젊은 남녀들의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저 사람들은 알려나. 인류가 핵전쟁도 아닌 타 차원의 침공으로 멸망할 거라는 걸.”
중얼거린 강한이 돌연 피식 웃었다.
자신 같아도 모를 것이다.
애초에 그런 판타지 소설 같은 미래가 다가오리라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강한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과 비교해 육체가 상당히 메말랐다.
회귀했을 때의 강한은 다소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강한은 마치 해골이라도 되는 양 빼빼 마른 것이다.
“게임을 줄여야 하나.”
강한은 이러한 변화가 너무 게임에만 몰두했기에 생긴 변화로 생각했다.
아무리 최고급 캡슐이라지만, 사람의 몸도 움직여 줘야 했다.
“말이 나온 김에, 오랜만에 운동이라…!”
흠칫!
이리저리 몸을 둘러보고 있던 강한이 흠칫! 몸을 떨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마치 게임 속에서나 느끼던, 제6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한 것에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허상괴?”
회귀하기 전, 신물이 나도록 죽이고 다녔던 허상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중얼거린 강한이 다급히 움직였다.
기우일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게임을 플레이해 온 탓에 잘못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감각이 진짜라면?
진짜로 허상괴가 지구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강한은 그러한 생각을 품으며 다급히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