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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네크로맨서-46화 (46/200)

제46화

‘정식 PVP는 오랜만이네.’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는 망설임 없이 의태의 반지를 해제했다.

의태의 반지의 효과가 사라지자 죽음이 휘몰아치며, 제로는 인간에서 흑골의 리치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준비는 끝났나?”

“얼추.”

베이글의 물음에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무색의 성자 베이글이 학살자 제로에게 PVP를 신청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한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제로와 베이글 사이에 하나의 깃발이 꽂혔다.

그것은 전장의 깃발.

서로 간의 동의하에 PVP가 시작되면 나타나는 오브젝트의 일종으로, 전장의 깃발을 중심으로 지름 30m의 원 형태의 결계가 만들어진다.

PVP를 하는 유저 외에는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절대 불가침의 영역을 만들어 내는 그것은 유저들 사이에서 전장이라 불리었다.

“그럼 시작하지.”

쿠웅-!

전장의 깃발도 꽂혔겠다, 베이글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무구를 꺼내 보였다.

베이글은 어느새 신의 휘강을 뒤집어쓴 순백의 갑옷을 걸쳤다.

오른손에는 무식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거대한 칠흑의 도끼가 쥐어졌다.

‘저것이 베이글의 전용 무구 신기, 칠흑의 도끼 처형자와 성휘의 갑옷인 건가. 살벌하네.’

신기, 칠흑의 도끼 처형자.

그것은 베이글이 마신 알루타에게 선택받으며 받은 레전더리 아이템이다.

공격력은 로스트 월드가 섭종을 하기 전까지 탑3에 속했으며, 가장 성가신 점은 어지간한 신성 마법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각종 저주가 걸려 있다는 점이다.

그와 동시에 베이글이 걸친 것은 신기, 성휘의 갑옷.

주신 오딘에게 받은 그것은 칠흑의 도끼 처형자와 마찬가지로 신기이자 레전더리 아이템이며, 그 방어력은 어지간한 공격 따윈 무시할 정도로 뛰어났다.

저런 아이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역천의 의복까지 노리는 건 너무 욕심 아니야?”

“닥쳐!”

쾅-!

제로의 말에 성난 외침을 토해 낸 베이글이 움직였다.

그의 발밑으로 순백의 신성력이 폭발하는 순간, 어느새 제로의 앞에 나타난 베이글이 처형자를 휘둘렀다.

제로는 목을 향해 휘둘러지는 처형자에 쯧! 하며 혀를 찼다.

“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스킬 발동, 데스 월.

콰르르!

콰가가강!

제로의 앞으로 솟아난 망자의 벽과, 베이글의 처형자가 충돌하며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사방으로 데스 월의 파편이 흩뿌려지고, 그 이상으로 강대한 충격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나도 역천의 의복은 포기할 수 없거든. 그러니깐.”

‘네가 좀 포기해 줘라.’

스킬 발동, 데스 웨이브.

콰가가강-!

잿빛으로 물든 죽음의 파동이 방사형으로 퍼져 나가며 베이글의 몸을 두드렸다.

허나 베이글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로스트 월드 최고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성휘의 갑옷. 베이글은 전신을 뒤덮는 데스 웨이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묵묵히 처형자를 휘둘렀다.

“네놈의 공격은 성휘의 갑옷을 뚫을 수 없다! 순순히 암흑의 조각을 내놓아라!”

다시 한번 제로의 목을 노리며 휘둘러지는 처형자의 도끼날에 칠흑의 신성력이 감돌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제로는 등골이 오싹해지며 확신했다.

저건 막을 수 없다.

어떤 방어 마법을 사용해도 처형자의 도끼날은 그것을 뚫고 자신의 목을 날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도 맞지 않으면 그만!’

스킬 발동, 더미 블링크.

스킬을 발동하기 무섭게 제로의 신형이 일순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베이글이 휘두른 처형자의 도끼날이 제로의 목을 날려 버렸다.

콰직-!

기묘한 소리와 함께 제로의 목은 잘려 나가다 못해 박살이 났으며, 목 위에 달려 있던 머리통은 허공으로 뜨더니 이내 바닥을 나뒹굴었다.

털썩.

목이 잘리고, 머리를 잃어버린 제로의 몸뚱어리가 쓰러졌다.

허나 베이글은 쓰러진 제로의 시체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같잖은 수를.”

점차 투명하게 변해가는 제로의 시체를 걷어찬 베이글이 시선을 돌렸다.

그런 베이글의 시선이 닿은 곳은 전장의 끝. 필드를 구성하는 결계였다.

베이글의 시선이 닿기 무섭게 그곳의 바닥이 들썩이며 제로가 몸을 일으켰다.

“무식한 위력이야.”

제로가 사용한 마법, 더미 블링크는 분신을 만들어 적을 혼란시키는 마법이다.

어지간한 유저라면 본인이 승리했다! 라는 승리감에 고취되어 기습을 허용했겠지만, 역시나 베이글.

베이글과 같은 탑티어 급 유저라면 이런 얕은수는 통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넌 왜 창고지기한테 진 거냐? 그 정도 강함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PVP에 집중해라! 도둑놈!”

쾅!

문답무용!

그 단어에 어울리듯, 베이글은 제로와 말을 섞을 생각도 없다는 듯 공격 일변도로 나왔다.

발바닥에서 순백의 신성력이 폭발하는 순간, 베이글은 어느새 제로의 앞에 나타나 처형자를 휘둘렀다.

한 번 한 번 휘둘러지는, 태산조차 무너트릴 거력이 담긴 처형자의 도끼날에는 예의 칠흑의 신성력이 휘감겨 있었으며.

그러한 베이글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제로는 더미 블링크를 비롯한, 각종 마법을 사용해 회피에 집중했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거냐!”

아슬아슬한 순간에 몸을 내빼는 제로에 베이글이 버럭 외쳤다.

그런 베이글의 외침에 제로는 다소 어이없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당연한 거 아니냐? 아무리 내가 히든 클래스라지만 그 기본은 네크로맨서야. 그런 내가 너랑 무기를 맞대고 투닥거릴 줄 알았냐?”

“이익!”

제로의 지적에 베이글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 그래도 얼추 준비는 끝났어.”

파라락-!

말을 마친 제로의 손에 쥐어진 네크로노미콘이 펼쳐졌다.

무수히 많은 페이지가 넘어가다 멈추며, 짙은 죽음이 네크로노미콘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왔다.

“내가 도망만 다닌 건 아니거든. 영광으로 생각해. 이걸 사용하는 것은 네가 두 번째니깐.”

스킬 발동, 데스 그라운드.

파아앗-!

제로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죽음이 대지에 깃들었다.

죽음이 깃든 대지는 제로를 중심으로 빠르게 말라비틀어졌다.

데스 그라운드.

과거 돌발 이벤트, 검은 성배를 되찾아라에서 신의 방패 센게라를 공략할 때 사용했던 기술이다.

그때 발동됐던 데스 그라운드는 대신전 내부라는 최악의 상황과, 센게라라는 최강의 NPC가 상대였던 만큼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의 제로는 그때의 제로보다 더욱 강해졌으며, 이곳은 대신전 내부에 깃든 신성력처럼 데스 그라운드를 방해할 요소 또한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발동된 데스 그라운드는 어느새 지름 30m에 해당하는 전장의 대지를 집어삼켰다.

“큭-!”

데스 그라운드에 휘말리자 베이글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눈앞엔 각종 디버프 알림과 데미지를 받고 있다는 등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물론.

“내가 준비한 게 이것만은 아니거든.”

베이글이 데스 그라운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때 승기를 굳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제로는 이어 각종 마법을 사용했다.

제로의 등 뒤로 외차원의 창고가 열리며 병사, 정예병, 장군, 광전사, 궁병 따위로 이루어진 망자의 군단이 오와 열을 갖추어 모습을 드러냈다.

외차원의 문 외에도 공간이 갈라지며 10구의 데스 솔저와 너프 먹은 어보미네이션. 3구의 망자의 거병 따위가 흉흉한 죽음을 두르며 튀어나왔다.

제로가 소환한 망자의 숫자만 해도 물경 수천!

랭커급 네크로맨서가 소환할 수 있는 언데드의 숫자가 일천 남짓인 것을 생각해 보자면, 제로가 소환한 망자의 숫자는 확실히 비정상적이었다.

“으득!”

대지를 침식한 데스 그라운드에 저항하기 위해 순백의 신성력을 몸에 두른 베이글은 자신의 눈을 가득 메운 망자들에 이를 갈았다.

“확실히 학살자 제로야. 수억이 넘는 로스트 월드의 유저들 중 최강이라 불리는 유저다운 강함이야. 하지만.”

베이글의 눈이 이글이글 빛나며 입에선 일갈이 토해졌다.

“나는 무색의 성자! 주신 오딘과 마신 알루타의 선택을 동시에 받은 유저! 그런 날 이따위 언데드로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영광으로 알아라! 수억의 유저들 중 네놈이 처음으로 목격하는 것이니!”

그리고는 빛이 베이글의 몸 주변에서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신의 휘광이 깃들지어니, 모든 사특한 것은 정화되어 사라질지어다!”

“설마!”

망자들을 돌진시키며,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제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베이글의 입에서, 자신의 명계의 언어로 이루어진 영창과 비슷한 무언가. 흔히 신성 계열 유저들이 대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하는 ‘기도’가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 제로는 잘 알고 있었다.

“벌…!”

“주신 오딘의 기적이여! 자애의 손길이여! 지금 이곳에 길들어라! 홀리 그라운드!”

파앗-!

제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베이글의 대마법이 발동되었다.

홀리 그라운드.

제로의 데스 그라운드와 비견되는 스킬.

그것은 유저들 사이에서 ‘대 언데드 박멸 스킬’로 불리운다.

중급 이하의 언데드라면 홀리 그라운드가 펼쳐진 영역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 소멸을 면하지 못하며, 최소 상급 이상의 언데드만이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다.

그마저도 각종 너프를 한 몸에 받게 되니, 홀리 그라운드는 언제나 네크로맨서가 가장 싫어하는 마법 탑3에 들어갔다.

치이이이이이익-!

베이글을 중심으로 홀리 그라운드가 펼쳐지자 사방에서 순백과 잿빛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제로의 데스 그라운드.

베이글의 홀리 그라운드.

서로 상극의 두 힘이 충돌하며 서로가 서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서로 상극인 두 힘이 충돌하며 공멸했다는 것이다.

‘데스 그라운드가 힘을 잃었지만, 홀리 그라운드도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해. 아직은 내가 유리하다.’

속으로 계산을 끝낸 제로가 영창을 이어 나갔다.

천장을 뒤덮은 신성력에 주춤했던 망자들 또한, 그것이 자신들에게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기 무섭게 베이글을 향해 재차 돌격했다.

쿵-!

베이글은 오른손에 쥐어진 처형자를 난폭하게 내리꽂으며 망자들을 바라봤다.

“가장 성가신 건 처리했고. 다음은….”

‘네놈들이다.’

망자들을 바라보며 베이글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의 입꼬리가 난폭하게 말려 올라가며 새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이건 페널티가 심해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확실하게 이기려면 어쩔 수 없지. 신성 강림-마.”

파앗-!

베이글이 또 하나의 스킬을 발동하는 순간, 세계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니, 더욱 정확히는 전장 내에 어둠이 가라앉았다.

하늘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떠올라 있음에도, 그러한 태양 빛은 어둠을 뚫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베이글의 몸에서 주신 오딘의 신성력은 사라지고, 마신 알루타의 신성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미치겠네.”

제로는 방금 전과 비교해 배 이상의 강함을 뿜어내는 베이글에 혀를 찼다.

신성 강림-마. 제로 또한 알고 있는 스킬이다.

마신 알루타를 따르는 성기사, 다크 팔라딘의 최종기. 5분간 마신 알루타의 힘을 그 몸에 깃들여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게 만들어 주는 스킬이다.

하지만 지속시간이 끝나면 시전자는 30분간 모든 스탯이 99% 깎이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인다.

그렇기에 전쟁에서도 자폭기로 사용되었던 스킬이기도 했다.

다만, 베이글은 그러한 스킬을 강제로 발동했기에 더욱 극심한 페널티가 따라 붇게 된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직업적 특성으로 사용했을 뿐이야.’

신성 강림-마는 800레벨의 5차 전직을 끝낸 유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다.

그것을 베이글은 직업의 특수성으로 억지로 사용했기에, 스킬 본연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지 못했다.

뭐, 그래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제로는 짙은 어둠을 두르고, 흉흉한 안광을 뿜어내는 베이글을 바라보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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