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으아아아아-! 어떤 개자식이야!”
콰가강-!
텅 비어 버린 검은 마탑의 비밀 창고.
그 던전 속에서 무색의 성자 베이글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가 난동을 부릴 때마다, 순백의 신성력과 칠흑의 신성력이 뿜어지며 사방을 헤집었다.
역천의 의복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기를 세 달.
그동안 무색의 성자 베이글은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몇 번의 리타이어 끝에 천상의 탑을 클리어해 신성의 조각을 입수했으며. 이제 역천의 의복이 잠들어 있는 던전을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아이템, 암흑의 조각을 코앞에 두었다.
하지만….
“시발! 세 달이야! 세 달이라고! 근데 웬 잡노무 새끼가 그걸 망쳐?”
암흑의 조각을 코앞에 두고 뺏겨 버렸다.
창고지기를 잡기 위해 온갖 준비를 끝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웬 개잡놈 때문에 암흑의 조각을 빼앗겨 버렸다.
역천의 의복이 평범한 아이템이었다면 이토록 화를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역천의 의복은 신화급 아이템이다.
그것이 잠들어 있는 던전 또한 1회성 던전이었기에, 신성의 조각과 암흑의 조각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중요한 아이템을 코앞에서 놓쳤으니, 무색의 성자 베이글이 이토록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반드시 잡는다.”
무색의 성자가 눈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그런 무색의 성자의 오른쪽 눈에는 새하얀 안광이, 왼쪽 눈에는 칠흑의 안광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베이글이 난동을 부리는 한편.
“누가 욕이라도 하나?”
범죄도시 루파에서 하얀 괴도 스타툰과 재회한 제로가 귀를 후벼 팠다.
뒤에서 누가 욕이라도 하듯, 귀가 간질간질해졌다.
스타툰은 그런 제로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형님.”
“문제는, 별거 아니야.”
스타툰의 질문에 제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나저나 너, 내가 말했던 대로 하고 있지?”
“물론입죠. 당분간 본업은 손 떼고, 렙업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제로의 물음에 스타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로와 스타툰이 맺은 계약은 단순했다.
제로는 스타툰을 강하게 만들어 준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스타툰의 직업 대도 예이안의 후예라는 ‘반쪽짜리’ 직업을 ‘완전한’ 직업으로 만들어 준다.
즉, 어쌔신 마스터 예이안의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이다.
그 대가로 스타툰은 제로의 협력자이자 부하가 되어 활동한다. 그뿐이었다.
제로는 아직 스타툰에게 모든 진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애초에 스타툰과 벤은 그 성질이 달랐다.
굳이 지금 당장 모든 진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지금 네 레벨이 몇이지?”
“267입니다, 형님.”
스타툰은 꼬박꼬박 제로를 형님이라 불렀다.
학살자 제로.
가상 현실 게임에서 가장 유명하며, 가장 강할 것이라 여겨지는 몇 안 되는 유저 중 한 명이다.
수억이 넘어가는 유저들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유명세와 강함을 지닌 제로였기에, 그런 제로와 나름의 접점을 만들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스타툰에게 있어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회였다.
아니, 애초에 제로와 친해질 수 있다면 똥꼬라도 핥을 유저가 수두룩했다.
머더러 유저?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의 로스트 월드는 제2의 현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로스트 월드의 랭커들은 그 어떤 연예인 부럽지 않은 부와 명예, 인기를 가졌으며. 로스트 월드 내에서의 모든 것이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
그런 상황에서 제로와의 접점을 마다할 유저는 그 누구도 없었다.
“최소 300까지는 찍어 놔라. 그래야 어쌔신 마스터 퀘스트를 시작할 수 있으니깐.”
“여부가 있겠습니까, 형님.”
제로의 말에 스타툰이 충성 충성 하며 대답했다.
제로가 짜 놓은 루틴대로 움직인다면, 스타툰은 한 달 안에 300을 찍을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 안에 나도 어쌔신 마스터 예이안의 정보를 입수해야 한다는 건데….’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300을 찍어야 어쌔신 마스터 예이안의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다만 그럼에도 300이란 수치를 정한 것은, 최소한의 마지노선이었다.
지구의 멸망. 인류의 멸망이란 미래는 시시각각 가까워진다.
그 미래를 뒤틀기 위해선, 그 이상의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어쌔신 마스터 예이안의 정보 외에도, 제로에겐 해야 할 일이 천지였다.
“그럼 사냥이나 열심히 해라.”
“어디 가십니까? 형님.”
“누굴 좀 만나야 돼서 말이야.”
스타툰의 질문을 뒤로하며 제로가 움직였다.
이제는….
‘무색의 성자, 베이글. 놈을 만나야 해.’
역천의 의복을 얻을 수 있는 두 개의 키. 그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베이글과 딜을 해야 할 차례였다.
* * *
“반드시 죽인다.”
검은 마탑의 비밀 창고에서 나온 베이글은 범죄도시 루파의 도둑 길드 지부로 향하고 있었다.
우선은 정보를 입수해야 했다.
자신이 세 달간 공들여 준비했던 암흑의 조각을 코앞에서 날름 훔쳐 간 놈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야 한다.
일단 놈에 대한 정보를 있어야 PK를 해서 빼앗든, 거래를 하든 할 수 있었다.
놈에 관한 정보라고는 일렁이는 어둠과도 같은 로브와, 손에 그로테스크한 책을 쥐고 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베이글은 걱정하지 않았다.
도둑 길드의 정보력은 로스트 월드 제일이다.
단순한 인상착의 하나로 수억의 유저들 중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곳이 도둑 길드인데, 딱 보기에도 레전더리 이상의 아이템을 장비한 놈을 특정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베이글이 도둑 길드가 있는 뒷골목에 들어선 순간….
“여, 안녕?”
등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베이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움직인 눈동자에 자신에게 말을 건 유저가 들어서는 순간….
“너, 너!”
베이글이 격분하며 버럭 외쳤다.
“야, 이 도둑놈의 새끼야!”
베이글에게 말을 건 유저는 일렁이는 어둠과도 같은 로브와, 한 손에 그로테스크한 책을 쥐고 있었다.
즉, 코앞에서 암흑의 조각을 강탈해 간 유저와 동일한 복장이었다.
한편 제로는 자신을 보자 격분하는 베이글에 피식 웃음을 내비쳤다.
제로 또한 베이글이 역천의 의복을 얻기 위해 한 노력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야 미래의 지식을 토대로 천상의 탑과 검은 마탑의 비밀 창고를 특정했지. 베이글은 단편적인 단서를 통해 그것들을 특정했을 것이다.
거기에 들인 노력과 시간은 값으로 환산할 수도 없었을 터.
이런 반응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
“도둑놈이라니, 말이 좀 험하네.”
“도둑놈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내가 그걸 구하기 위해 3달 동안 개고생을 했어! 자그마치 3달이라고!”
“알아, 알아.”
“이익!”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제로에 무색의 성자 베이글이 으득!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으니 좀 진정 좀 해 봐.”
“도둑놈과 할 말은 없어! 그냥 죽…!”
“암흑의 조각. 갖고 싶지 않아?”
다짜고짜 PK를 하려는 베이글의 앞으로 제로가 암흑의 조각을 꺼내 보였다.
막 스킬을 사용하려던 베이글은 제로의 손에 쥐어진 암흑의 조각을 보기 무섭게 움직임이 멈추었다.
“원하는 게 뭐야.”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지?”
그 말을 끝으로 제로가 플라잉 마법을 사용하며 움직였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사라지는 제로에 베이글 또한 으득! 다시 한번 이를 갈며 움직였다.
제로와 베이글.
그 둘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범죄도시 루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평야였다.
딱히 사냥터의 역할도 하지 않는 평범한 평야.
그렇기에 그곳에 있는 유저는 제로와 베이글, 단둘뿐이었다.
“원하는 게 뭐야.”
평야에 도착하기 무섭게 베이글이 입을 열었다.
“간단해. 넌 암흑의 조각을 원하고, 난 신성의 조각을 원하지. 그러니 단순하게 가자고.”
“단순하게?”
“응, 단순하게.”
베이글의 되물음에 제로가 씨익 웃어 보였다.
“PVP 한 판 뜨자. 네가 이기면 암흑의 조각을 주지. 단, 내가 이기면 신성의 조각을 내놔.”
“하-!”
후드를 젖히며 말하는 제로의 제안에 베이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저놈이 뭐라 지껄이는 거냐?’
뭐? PVP? 자신에게?
놈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놈의 강함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드러난 얼굴을 보는 순간, 베이글은 눈앞의 유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최악의 PK범.
최강의 네크로맨서.
10강 중 하나인 신성 길드에서의 척살령에도 살아남은 유저.
모든 머더러의 정점, 학살자 제로.
하지만.
“진심이냐?”
끄덕.
베이글의 물음에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베이글은 더욱 어이가 없었다.
제로가 평범한 네크로맨서가 아니라는 것쯤은 베이글 또한 잘 안다.
하지만 자신의 직업은 무색의 성자.
주신 오딘과 마신 알루타의 힘을 동시에 받은 ‘성자’이다.
네크로맨서와는 상성 중의 상성, 천적 중의 천적이 바로 자신이다.
그런 자신에게 PVP를 제안하다니.
‘아니, 내 직업을 모르니깐 그런 개소리를 지껄이….’
“네 직업은 잘 알고 있어, 무색의 성자 베이글. 자애의 성자와 파괴의 성녀가 있음에도 주신 오딘과 마신 알루타의 선택을 동시에 받은 유저… 맞지?”
“…….”
제로의 말에 베이글이 침묵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자신은 직업을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친구? 애초에 베이글에겐 친구 따윈 없었다.
도둑 길드? 아무리 도둑 길드의 정보력이 대단하다지만, 자신이 철저히 숨긴 만큼 그것을 알아낼 순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고민해도 상대가 자신의 직업을 알아낸 경위를 알 수 없는 베이글이 입을 열었다.
“내 직업을 어떻게 알아낸 거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베이글. 지금 중요한 건…”
네가 PVP를 받아들이냐, 마냐가 중요한 거지.
씨익 웃으며 말하는 제로에 베이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로는 어느새 후드를 뒤집어써 표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직업을 알고 있음에도 PVP를 제안한 제로다. 후드에 가려진 표정에는 자신만만한 웃음이 만연하고 있겠지.
한편 제로는 고민에 빠진 베이글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베이글이 생각했던 자신만만한 미소와는 사뭇 달랐지만, 그럼에도 웃음기는 내비치고 있었다.
‘놈은 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
3달이나 개고생한 끝에 신화급 아이템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니, 역천의 의복이 신화급 아이템이라는 것을 모르겠지만, 적어도 레전더리 이상이라는 것쯤은 베이글 또한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베이글. 아니, 베이글을 포함한 로스트 월드의 그 어떤 유저도 레전더리 이상의 아이템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레전더리 아이템은 수억의 유저들 중 극소수의 유저만이 가지고 있으며. 신화급 아이템은 아직 그 어떤 유저도 획득하지 못했으니깐.
그렇게 제로가 얼마나 바라봤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베이글이 입을 열었다.
“받아들이지.”
* * *
서울 외곽에 위치한 달동네.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의 어딘가에서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에 금이 그어졌다.
근처의 음식물 쓰레기를 헤집고 있던 고양이는 갑작스러운 소리와 함께 금이 그어지는 공간에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허나 호기심이란 무섭고, 그것은 종족을 가리지 않는다고.
길고양이는 피어오르는 호기심에 그어진 금에 가까이 다가갔으며, 그어진 금은…
“냐아아아앙-!”
그어진 금에서 검은 연기가 한줄기 튀어나오더니, 그것은 곧 가까이 다가가던 길고양이에 흡수되듯 사라졌다.
그렇게 검은 연기가 깃든 길고양이는….
우득-! 우드득!
기괴한 소리와 함께 그 내면이 ‘무언가’로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