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저놈이 학살자 제로?”
길드 마스터의 중얼거림에 스타툰은 멍하니 제로를 바라봤다.
한 손에 그로테스크한 책을 쥐고, 다소 흉흉해 보이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제로의 모습은 누군가와 많이 흡사했다.
“헙! 서, 설마!”
멍하니 제로를 바라보던 스타툰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어딘가 낮이 익다 했더니, 제로의 모습은 자신이 반지를 훔쳤던 유저와 닮은… 아니, 똑같았다.
제로는 자신을 보며 놀라는 스타툰에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찾았다, 이 도둑놈의 새끼야.”
쿠구구궁-!
제로의 입이 열리고,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스타툰과 검은 의적단 길드의 길드 마스터는 전신을 짓누르는 막대한 압력을 느꼈다.
그것은 제로의 존재감.
스킬이니, 스탯이니 하는 무언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제로 본연의 존재감이 그들을 짓눌렀다.
“어… 째서 네가 여기에!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
“…았다고? 지랄하고 있네.”
길드 마스터의 외침에 제로가 피식 웃으며 스타툰을 가리켰다.
아니, 더욱 정확히는 스타툰의 손에 쥐어진, 타인의 눈에는 총명의 반지로 보이는 의태의 반지를 가리켰다.
“저 도둑놈의 새끼한테 물어보지 그래?”
홱-!
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길드 마스터의 시선이 스타툰을 향해 돌아갔다.
스타툰은 제로의 시선과, 길드 마스터의 시선이 동시에 꽂히자 히끅! 하는 딸꾹질을 하며 주춤 물러섰다.
“스타툰. 하나만 물어보마. 네 손에 있는 그 반지…, 어디서 훔쳐 온 거냐?”
“그, 그게….”
추궁에 가까운 길드 마스터의 질문에 스타툰은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자신의 모가지가 날아갈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스타툰이었다.
변명을 하자니 아이템의 주인인 제로가 떡하니 눈앞에 서 있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하자니 제로를 건드렸다… 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길드에서 제적은 물론. 어쩌면 길드와 제로, 양쪽의 무한 pk를 통해 로스트 월드를 접어야 될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확률이 99.99%에 가까웠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검은 의적단 길드는 말이 의적단이지, 말 그대로 소매치기를 업으로 삼는 도둑들이 모인 길드였다.
길드원 간의 의리 따윈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길드원 간의 의리가 있다 하더라도 상대가 제로라면, 그 의리 따윈 종이 쪼가리나 다름없었다.
“그게….”
“제대로 말해!”
스타툰이 우물쭈물하자, 길드 마스터가 참지 못하고 버럭 외쳤다.
길드 마스터의 외침에 스타툰이 히익! 하는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르며 다급히 움직였다.
바닥을 박차며 움직인 스타툰은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도착했으며, 동시에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제, 제로 님! 잘못했습니다! 죄송해요! 전 제로 님인지 모르…!”
히익-!
변명을 늘어놓던 스타툰이 꼴사나운 비명을 내질렀다.
후드를 아무리 푹 눌러썼다 한들, 밑에서 위를 쳐다보면 당연히 그 속이 보이기 마련이다.
즉, 무릎을 꿇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고 있던 스타툰은 봤다.
후드 속에 감춰진, 의태의 반지가 없기에 드러난 제로의 본모습을.
‘리, 리치! 제로는 이종족 플레이어였어!’
스타툰이 속으로 외쳤다.
그리고는 제로가 왜 그렇게 강했는지를 스스로 납득했다.
리치라는 이종족 플레이어.
네크로맨서 계열의 히든 클래스.
제로는 종족과 직업 간의 시너지로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제로는 스타툰이 자신의 얼굴을 봤다는 것에 인상을 찌푸렸다.
‘귀찮게 됐네.’
이제 와서 이종족 플레이어라는 것은 별로 신기한 것이 되지 못한다.
과거 제로가 올린 1회용 던전에 관한 글에 의해 플레이어들은 인간 외의 종족이 될 수 있다는 정보가 퍼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종족을 변경하는 방법이나 퀘스트 따위를 알기 위한 대형 길드의 추적도 추적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변화된 종족에 대한 약점이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과거 혹은 미래. 제로가 아직 엘레멘탈 워리어라는 직업을 가지고 랭커로 활동할 당시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 제로의 지인 중 한 명은 웨어 울프라는 종족이었는데, 그 종족은 강대한 육체 능력과 재생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단 하나. 은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 약점 하나 때문에 ‘명성’을 노리던 한 길드로부터 무한 pk를 당해야만 했다.
즉, 이종족 플레이어는 강력한 힘 대신 명확한 약점이라는 페널티를 안게 되고. 그것은 제로라 해서 다를 바 없었다.
‘뭐, 나도 내 약점이 신성력이라는 것 외에는 모르지만.’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의 시선이 스타툰을 향했다.
스타툰은 공허한 눈구멍에서 피어오르는 귀화에 다시 한번 히익! 하는 꼴사나운 비명을 내질렀다.
제로는 그런 스타툰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내놔.”
“네, 네?”
“반지. 내놔.”
제로의 명령 아닌 명령에 스타툰은 다급히 의태의 반지를 건넸다.
의태의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지고, 제로는 순식간에 망자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후-.”
의태의 반지를 낀 제로가 후드를 젖히며 낮은 숨을 토해 냈다.
검은 의적단의 길드 마스터는 제로의 얼굴을 보며 ‘역시 맞았잖아!’ 라며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제로는 랭킹을 등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같이 10,000위권에 겨우 턱걸이로 입성한 랭커가 아닌, 최상위 랭커와 비벼 볼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저… 제로 님?”
“왜.”
반지를 훔쳐 간 유저, 스타툰을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제로는 뜬금없는 부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제로가 다소 짜증 섞인 반응을 내비치자 길드 마스터가 움찔! 하며 입을 열었다.
“헤헤, 그, 그게 말이죠. 저놈은 저희 길드 소속도 아니고, 그냥 우연히 이곳에 왔거든… 요…? 그, 그러니 어떻게…, 헤헤.”
길드 마스터의 말에 스타툰의 시선이 홱! 하며 돌아갔다.
그런 스타툰의 두 눈에 담겨진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아무리 제로가 무섭기로 써니. 그리고 길드원 간에 의리 따윈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대놓고 길드원을 팔아넘길 수 있냐!’
속으로 외치기 무섭게 스타툰의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그것은 길드 검은 의적단에서 방출되었다는 메시지였다.
길드에 방출되기 무섭게 스타툰의 손등에 새겨져 있던 검은 전갈 문신이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그래?”
“그, 그렇습니다! 헤헤.”
“그럼 이놈 내가 데려가도 불만 없지?”
“물론입죠!”
제로의 물음에 길드 마스터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길드원 한 명을 버리는 것으로, 길드 자체를 살릴 수 있다면 이득이나 다름없었다.
“들었지?”
“네…? 뭐, 뭘…?”
“그렇게 됐으니 따라와.”
스타툰의 대답 따윈 필요 없다는 듯, 제로는 통보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는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스타툰은 잠시 멍때리다 멀어져만 가는 제로를 향해 뛰어나갔다.
한편, 상황이 정리된 검은 의적단의 길드 마스터는 학살자 제로의 손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털썩 주저앉았다.
* * *
‘저놈은 쓸 만해.’
슬쩍 뒤를 쫓아오는 스타툰을 훑어본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스타툰을 죽이려 했다. 얼마나 많은 악명 수치를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검은 의적단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상당한 악명 수치를 자랑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의 죽음으로도 크나큰 타격을 입을 것이기에….
‘죽이려 했지만 말이야.’
막상 죽이려는 순간, 제로는 생각을 바꿨다.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스타툰은 평범한 도둑 유저가 아니었다.
아무리 긴장을 풀고 있었다지만 자신의 아이템을 훔친 것. 그리고 잠시나마 자신의 눈을 피해 도망쳤다는 것.
이 두 가지를 통해 제로는 스타툰을 죽이는 것보다, 미래의 전쟁을 위한 장기 말로 사용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아직 3차 전직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정도의 실력이다.
각 잡고 키워 본다면 과거 혹은 미래에 일어날 전쟁에 충분히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너, 이름은?”
“스타툰입니다! 형님!”
“스타툰…, 스타투….”
‘어디서 들어 본 거 같은데?’
스타툰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뇌리 한구석이 간질간질하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허상계와의 전쟁에서 들어 본 이름이 아니었다. 아직 엘레멘탈 워리어로 활동할 당시에 들어 봤던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 아!’
“하얀 괴도 스타툰.”
“네?”
제로의 중얼거림에 스타툰이 반문했다.
“혼잣말이야.”
하얀 괴도 스타툰.
조금 먼 미래에 나름 유명한 이름이었다.
마음먹은 아이템은 그것이 무엇이더라도 훔쳐 내는 도둑.
언제나 하얀 옷차림에 하얀 망토, 하얀 가면을 뒤집어썼기에 명x정 x난에 나오는 괴도 같다 해서 붙여진 별명, 하얀 괴도.
다만 10강 중 하나를 건드리는 바람에 무한 pk를 당해 결국 게임을 접게 되었던 비운의 유저.
그것이 바로 스타툰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제로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스타툰을 바라봤다.
당연히 스타툰 또한 섭외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만일 그가 게임을 접지 않았다면? 그대로 플레이 해서 더욱 레벨이 높아지고, 그 실력을 더욱 갈고닦았다면?
허상계와의 전쟁에서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스타툰은 전투력이 제로에 가까웠지.’
만일 어느 정도의 전투력 또한 지니고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게임을 접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스타툰을 전쟁의 장기 말로 사용하기로 한 이상, 제로는 스타툰에게 어느 정도 전투력을 심어 줄 필요성이 있었다.
“너 직업이 뭐냐?”
“직업… 말씀이십니까?”
스타툰의 반문에 제로는 침묵했다.
그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 시선에 지레 겁먹은 스타툰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대도 예이안의 후예입니다.”
‘미친.’
스타툰의 대답에 제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도 예이안.
로스트 월드 내에서 상당히 유명한 npc였다.
활동 시기는 200년 전.
당시의 예이안은 훔치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그곳이 설령 황제의 침실이라 하더라도. 그뿐이 아니었다.
당시의 예이안은 대도 외에도 다른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은 어쌔신 마스터. 모든 어쌔신들의 정점에 서 있던 존재였다.
그런 예이안의 후예라는 직업을 가진 놈이 왜 그렇게 전투력….
“잠깐, 대도 예이안의 후예라고? 예이안의 후예가 아니라?”
“네? 네.”
‘반쪽짜리네.’
스타툰의 대답에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앞의 스타툰은 말 그대로 대도로서의 예이안의 후예다. 어쌔신 마스터이자 대도 예이안이 아닌, 대도 예이안의. 그렇기에 전투 능력이 그토록 처참했던 것이고.
‘어쌔신 마스터로서의 예이안에 관한 정보를 찾아봐야겠어.’
과거 혹은 미래의 자신도 예이안에 관한 정보는 몇 없었다.
그저 이런 이런 npc가 있었고, 이러이러한 업적을 달성했다 정도만 알 뿐이다.
‘좀 빡세지겠네. 그래도.’
나름 좋은 장기 말을 발견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 제로였다.
“너, 나랑 계약 하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