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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네크로맨서-38화 (38/200)

제38화

“하아-.”

제로가 입을 열며 낮은 숨을 토해 냈다.

[무언가 변했구나.]

헬데이븐이 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변했다.

무엇이 변했는지는 헬데이븐조차 특정할 수 없지만, 지금의 제로는 분명 무언가가 변했다.

헬데이븐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한편 낮은 숨을 토해낸 제로는 멍하니 헬데이븐을 바라봤다.

공허한 두 눈구멍에서 일렁이는 귀화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연신 흘러넘치는 농밀한 죽음은 제로의 몸을 휘감으며, 때론 사납게 날뛰었다가도, 때론 고요한 바다와도 같이 가라앉아 있었다.

“고마워.”

[무엇이 고맙다는 것이냐.]

제로의 이해할 수 없는 감사의 인사에, 헬데이븐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헬데이븐 또한 제로와 마찬가지로 뼈밖에 없는 몸뚱어리였지만, 만일 피부라는 것이 존재했다면 분명 찌푸렸으리라.

“정신이 맑아진 기분이야.”

제로가 입을 열 때마다.

그리고 숨을 내쉴 때마다 제로의 입에서 연신 농밀한 죽음이 흘러나와 허공으로 흩어졌다.

[뜻 모를 말만 지껄…!]

파바박-!

말을 하던 헬데이븐의 몸이 사라졌다.

무언가 위기를 느낀 헬데이븐은 블링크를 사용해 몸을 빼내자, 헬데이븐이 서 있던 자리에 죽음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화살이 틀어박혔다 사라졌다.

[무영창화한 데스 애로우라. 이방인답지 않은 숙련도로군.]

[궁금하구나. 무엇이 너를 이토록 변화시켰는지.]

[허나….]

아직 멀었다.

그 말을 내뱉은 헬데이븐이 스태프를 휘둘렀다.

헬데이븐의 썩어 문드러진 나무로 이루어진 스태프가 휘둘러지자, 그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파이어 볼이 만들어졌다.

비록 파이어 볼이 기초적인 마법이라고 한들, 그것을 시전한 존재는 헬데이븐이다. 대마도사. 아니, 그에 근접한 경지에 올라선 헬데이븐이 시전한 파이어 볼은 상위의 마법 중 하나인 파이어 캐논에 필적하는 위력을 지녔다.

[돌아가거라.]

[비록 위대하신 분의 의중을 모르겠으나.]

[그대의 힘은 아직 날 꺾지 못하니.]

[더욱 힘을 쌓아 다시 도전하거라.]

헬데이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십 발의 파이어 볼이 쏘아졌다.

수십 개의 파이어 볼은 불꽃의 꼬리를 만들며 제로를 노렸다.

“소용없어.”

제로가 나긋한 말투로 입을 열며 펼쳐진 네크로노미콘을 닫았다.

탁!

네크로노미콘이 닫히며,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제로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죽음이 움직였다.

그것은 마치 난폭한 해일과도 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으며, 곧 제로를 향해 쏘아진 수십 발의 파이어 볼을 집어삼켰다.

죽음에 집어삼켜진 파이어 볼은 마치 산소가 차단된 공간에 들어간 평범한 불꽃과도 같이 사그라들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꽃은 일반적인 과학적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다.

불꽃이 존재하기 위해선 산소가 필요했지만, 헬데이븐이 쏘아 낸 파이어 볼은 그런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헬데이븐이 쏘아 낸 파이어 볼은 그저 제로가 뿜어내는 죽음에 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뿐이다.

파이어 볼을 집어삼킨 제로가 헬데이븐을 바라봤다.

헬데이븐은 제로의 시선을 느끼며 끅끅! 억눌린 웃음을 내비쳤다.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고작 파이어 볼을 처리했다고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것…!]

꽈앙-!

말을 하던 헬데이븐이 굉음과 함께 날아갔다.

헬데이븐이 서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잿빛의 망치가 존재했으며, 그것에 얻어맞은 헬데이븐은 수십 미터를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과연. 나름 강해졌다 이것이냐.]

콰르르.

무너지는 잔해를 치우며 나타난 헬데이븐이 입을 열었다.

자신의 권능, 죄악의 무게. 눈앞의 존재는 그것에 당하기 전과 후가 극명할 정도로 달라졌다.

죄악의 권능이 무언가 계기가 되었던 것일까.

허나 죄악의 권능에 그러한 효능은 없을 터인데.

[아니, 생각 따윈 필요 없다.]

[내가 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

화륵! 화르륵!

몸을 일으킨 헬데이븐이 다시 한번 스태프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불꽃으로 이루어진 화살과 창, 검과 도끼. 거대한 망치 따위의 다종다양한 무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헬데이븐.]

[위대하신 분의 신봉자이자.]

[과거 폭염의 지배자라 불리었던 존재.]

[그런 날 이길 수 있겠는가? 자격을 지닌 자여.]

콰가가가-!

무기가 쏟아졌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무기들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열기만으로도 홀의 대지를 녹이며 용암으로 만들었다.

수십 종류의 그러한 무기들이 제로를 노리며 하늘에서 쏟아졌다.

제로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작열의 무기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네크로노미콘을 펼쳤다.

파라랏-!

책장이 펼쳐지고.

페이지가 넘어간다.

네크로노미콘의 크기를 생각해 보자면 고작 수십 페이지밖에 없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넘어가는 페이지는 수백 장이 되어서야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외차원의 무기고.”

영창도 필요 없었다.

단순히 시동어를 내뱉는 것만으로 죽음이 호응하며 움직였다.

펼쳐진 네크로노미콘의 페이지에 마법진이 새겨지고, 그것에서 죽음으로 이루어진 연기가 뿜어진다.

연기는 회오리처럼 회전해 허공에 뭉쳐 들고, 곧 하나의 문의 형태를 띠었다.

스윽.

잿빛의 거대한 문, 외차원의 무기고.

그것을 등에 진 제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외차원의 무기고가 열리며 다수의 무기들이 쏟아졌다.

제로에 의해 열린 외차원의 무기고.

그것에서 쏟아지는, 죽음으로 이루어진 무기들이 헬데이븐이 만들어 낸 작열의 무기들을 요격하며 공멸했다.

검에는 검으로.

창에는 창으로.

도끼에는 도끼로.

망치에는 망치로.

화살에는 화살로.

암기에는 암기로.

헬데이븐이 만들어 낸 무기와 같은 종류의 것을 토해내며 요격한 외차원의 무기고는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직 멀었어. 외차원의 손아귀.”

파랏.

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크로노미콘의 페이지 몇 장이 넘어갔다.

동시에 헬데이븐의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지며, 죽음으로 이루어진 안개를 두른 거대한 뼈의 손이 튀어나와 헬데이븐을 움켜쥐었다.

[크윽-!]

헬데이븐은 자신을 움켜쥔 손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죽음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죽음은 농밀했다.

위대하신 분의 신봉자로서 자신이 품고, 쌓아 올린 죽음보다 더욱 농밀했으며, 더욱 정순했다.

마치….

[그분의 죽음을 직접 대면하는 것만 같은! 허나!]

[아직 멀었다! 인페르노 타워!]

콰아아-!

헬데이븐을 중심으로 불꽃의 기둥이 치솟았다.

아니, 그것은 불꽃이 아닌 용암이었다.

탁한 검은색이 다소 첨가된 용암의 기둥은 헬데이븐을 움켜쥔 뼈의 손, 외차원의 손아귀를 녹여 나갔다.

헬데이븐은 인페르노 타워에 의해 녹아내린 외차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며 제로를 노려봤다.

[날 얕보지 말거라!]

[파이어 체인! 프로미넌스 레인!]

촤라락-!

헬데이븐의 발밑에서 청염으로 이루어진 사슬이 튀어나와 제로를 휘감았다.

동시에 하늘에서 온도조차 측정할 수 없는 작열이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일공 일방의 공세.

헬데이븐과 제로.

그 둘이 사용하는 마법을 포함한 전투는 현 최상위 랭커. 아니, 랭킹 1위의 유저라 하더라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선보였다.

“소용없다 했잖아.”

제로는 슬쩍 하늘에서 쏟아지는 작열의 비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제로의 시선에 따라 죽음이 움직였다.

움직인 죽음은 제로의 육체를 휘감은 파이어 체인을 집어삼키고. 나아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프로미넌스 레인을 지워 버렸다.

[으으음!]

그 모습에 헬데이븐이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이번의 공격은 나름의 마력을 담아 시전했다.

특히나 프로미넌스 레인은 7서클의 마법이지만, 그 위력이 8서클에 버금간다 알려진 마법이다. 그러한 것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지워 버릴 줄이야.

그것은 제대로 된 대마도사는 아닐지언정, 살아생전 모든 시간을 마도에 쏟아부은 헬데이븐의 상식을 모조리 부정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어째서 위대하신 분이 내가 아닌.]

[그대를 선택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군.]

[허나 그 힘. 막대하면서도 막강한 만큼 오랜 시간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을 터.]

[그렇다면 승리는 나의 것이다.]

화륵-!

헬데이븐이 한줄기 불꽃이 되며 사라졌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제로의 뒤.

허공에 피어오른 불꽃에서 모습을 드러낸 헬데이븐은 망설임 없이 제로를 향해 스태프를 휘둘렀다.

제로의 목을 노리며 휘둘러지는 스태프에는 작열로 이루어진 검날이 깃들어 있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제로는 시선조차 움직이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그에 헬데이븐의 미간이 꿈틀거리는 순간….

콰직!

콰지직!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작열의 칼날이 깃든 스태프가 우뚝! 멈추었다.

[끄으윽-!]

제로의 등 뒤에서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로를 향해 작열의 칼날을 휘둘렀던 헬데이븐. 그의 양팔과 다리는 죽음으로 이루어진 사슬에 휘감겨 박살이 난 상태였다.

[이 무슨…!]

헬데이븐은 믿을 수 없었다.

눈앞의 제로라는 애송이. 그는 확실히 강했다.

다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그가 위대하신 분의 선택을 받았다 한들, 자신의 강함에는 발끝만도 미치지 못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어찌하여.]

[어찌하여 이토록 강해졌단 말인가!]

화륵!

억울하다는 듯 외치며 헬데이븐의 몸이 다시 한번 사라졌다.

불꽃으로 화해 사라진 헬데이븐이 나타난 장소는 처음 서 있었던 공간.

하지만.

“소용없어.”

콰지직-!

마치 나타날 장소를 알고 있었다는 듯, 제로부터 쏟아진 죽음의 화살이 불꽃 속에서 나오는 헬데이븐의 양팔과 다리를 꿰뚫었다.

한 번 죽음의 사슬에 의해 박살이 난 헬데이븐의 팔과 다리는, 죽음의 화살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무슨…!]

설상가상으로 재생마저 되지 않는다.

사라진 팔과 다리를 복구하려 해도 복구가 되지 않았다.

상처 부위에 깃든 농밀한 죽음이, 복구를 위해 쏟아붓는 마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죽음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헬데이븐의 지식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죽음을 하나의 점에 고정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고마워. 네 덕분에 머리가 한층 맑아진 느낌이야.”

저벅. 저벅.

쓰러진 헬데이븐을 향해 걸어가며 제로가 입을 열었다.

제로의 입이 열리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헬데이븐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일그러졌다.

만일 그가 피부를 가졌다면, 그 형상은 분명 악귀의 그것과도 같았을 것이다.

[네… 놈…!]

[웃기지 마라! 웃기지 말란 말이다!]

[나는! 본인은! 본 왕은!]

[위대하신 분의 신봉자! 잊혀진 왕국의 지배자이자 폭염의 지배자다!]

[언젠가 위대하신 분의 사도가 될 존…!]

“정말 그렇게 생각해?”

…!

제로의 말에 헬데이븐의 입이 멈추었다.

“애초에 네가 여기에 처박혀 있는 것부터가 탈락 확정이란 거야. 죽음이 그랬거든. 이곳은….”

나 같은 존재를 위해 만들어진, 단순한 ‘무대’에 불과하다고.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단 말이다!]

제로의 말에 헬데이븐이 외쳤다.

아니, 그것은 외침이 아닌 절규에 가까웠다.

헬데이븐은 턱뼈가 빠져라 입을 벌리며, 이제는 알아듣지도 못할 괴성에 가까운 소리만을 내지를 뿐이다.

“추하네. 그냥 순순히 받아들여.”

[네노오오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헬데이븐에게서 작열이 피어올랐다.

“그럼 바이 바이. 파괴의 일격.”

콰직-!

제로가 헬데이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 제로로부터 흘러나온 죽음은 허공에 뭉쳐 거대한 주먹이 되었으며, 그것은 망설임 없이 헬데이븐의 몸뚱어리를 부숴 버렸다.

[위대하… 신 존… 재시여…!]

파괴의 일격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헬데이븐은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 죽음을 향한 열망과 집착을 거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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