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썩어 문드러질 그 육신을 일으켜라, 망자의 군단.”
쿠르르-!
제로를 중심으로 주변의 대지가 들썩이더니, 곧 검은 뼈로 이루어진 몸체를 지닌 스켈레톤. 망자의 병사와 정예병, 광전사 따위가 몸을 일으켰다.
망자의 군단은 말이 좋아 군단이었지, 그저 단순히 망자의 병사와 정예병. 광전사 따위를 동시에 소환하는 스킬에 불과했다.
“돌격. 모조리 쓸어버려.”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소환된 병사와 정예병. 광전사들 따위가 망자의 궁기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공허한 눈구멍에서 흉흉한 귀화를 피어 올리며 돌진해 오는 망자의 군단에, 망자의 궁기병들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병의 속도를 활용해 군단과 거리를 벌리고. 궁병이라는 특수성을 이용해 화살을 쏘아 댔다.
수십에 달하는 망자의 궁기병들이 쏘아 대는 화살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망자의 군단을 이루는 병사들에 틀어박혔다.
콰지직.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 하나, 하나의 위력은 가히 발리스타와 필적할 정도다.
그에 화살에 맞은 것들은 병사, 정예병, 광전사를 가리지 않고 육체가 박살 나 대지를 나뒹굴었다.
애초에 망자의 병사와 정예병들은 제로가 소환할 수 있는 언데드 중 하위에 속한다.
평범한 네크로맨서와 비교하자면, 중상급의 듀라한과 맞먹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 상위에 속하는 망자의 궁기병들의 공격을 받아 낼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망자의 광전사들은 나름 중위에 속하기는 했으나 그 특성상 공격에 치중되어 있다 보니 방어적인 측면에선 어떻게 보면 병사나 정예병들보다 더욱 낮았다.
그럼에도 숫자는 무시할 수 없다는 듯, 몇몇 병사들은 망자의 궁기병들이 쏘아 대는 화살의 비를 뚫으며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후웅-!
카가각!
끈질기게 따라붙은 망자 몇이 무기를 휘두르자, 망자의 궁기병들 또한 장궁을 휘두르며 응수했다.
병사들의 무기와 궁기병들의 장궁이 맞부딪치자 듣기 싫은 괴음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숫자가 많다 한들 단순한 병사들로는 처리할 수 없다 이건가.”
전장을 지켜보는 제로가 중얼거렸다.
아니, 애초에 망자의 병사들로 처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레시피라도 드랍하면 좋겠는데. 데스 캐논.”
후웅-!
콰아앙!
작은 소망을 드러낸 제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로가 비어 있는 왼손을 펼치자, 그 앞으로부터 다수의 마법들이 쏟아졌다.
사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 데스 애로우를 시작으로 거대한 포탄을 연상케 하는 데스 캐논. 망자의 궁기병들의 재빠른 기동력을 상실하기 위한 명계의 사슬과 하늘에서 죽음의 불꽃을 비처럼 쏟아 내는 데스 파이어 레인 등등.
제로로부터 쏟아지는 다종다양한 마법은 적아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에 제로는 수십 기의 망자의 궁기병들을 처리할 수 있었지만, 그에 배 이상 되는 망자의 병사들을 잃어버렸다.
“상관없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병사들을 처리했음에도 제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애초에 병사들은 소모품에 불과하다.
사마력만 충분하다면 언제 어디서든 꺼내 쓸 수 있는 도구. 그것이 망자의 병사와 정예병들의 위치였다.
“망자의 광전사는 좀 아깝지만, 어차피 언제든지 보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모품이나 다름없지.”
음음!
속삭이듯 중얼거린 제로가 발을 내딛으며 걸어 나갔다.
그런 제로의 뒤로는 어느새 소환한 것인지, 수백에 달하는 망자의 군단이 뒤따랐다.
* * *
“슬슬 귀찮네.”
얼마나 걸었을까.
제로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망자들에 인상을 찌푸렸다.
나름 죽음이 직접 만든 시련이다 이걸까. 제로의 앞을 가로막는 적의 숫자는 많았으며, 그 강함 또한 특출났다.
망자의 궁기병을 시작으로 제대로 된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망자의 기사. 그 외에도 고레벨 네크로맨서가 아니라면 소환할 수 없는 듀라한을 닮은 망자와 짐승의 외형을 한 망자들까지.
하나하나의 강함이 일반 네크로맨서들이 소환할 수 있는 언데드들 중 상위에 속할 강함이었지만 제로에게 있어선 불나방에 불과했다.
다만 그 숫자가 너무 많다 보니, 제로에게 있어 이제는 귀찮음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뭐, 그래도 나름의 수확은 있었으니.”
그렇게 중얼거린 제로가 인벤토리에서 하나의 양피지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장인 계열 유저라면 누구나 탐낼 아이템 중 하나인 레시피로, 지금까지 만난 망자들을 제작할 수 있는 재료가 적혀 있었다.
다만, 모든 망자들이 레시피를 드랍한 것은 아니었으며, 레시피라 하더라도 몇몇 재료들이 빠져 있는 등. 완전한 레시피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 끝물이네.”
손에 쥔 레시피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걸어가는 제로가 중얼거렸다.
퀘스트의 보상, 죽음의 옷자락.
그것이 자리 잡고 있는 장소에 도착했는지 나타나는 망자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 대신 그 강함은 증가했으나, 제로는 숫자가 줄어든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다시 앞을 가로막는 망자들을 처리하며 어느 정도를 걸었을까.
제로의 눈앞에 돌연 하나의 거대한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길함을 자아내는 거대한 신전.
그것을 이루는 것은 검은 대리석이었는데, 그러한 대리석에선 너무나도 익숙한 기운. 죽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로는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거대한 신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캔슬.”
콰르르.
제로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뒤를 따르던 수백의 망자의 군단이 무너져 내렸다.
지금까지 만난 적들에게도 고기 방패, 그 이상의. 그리고 그 이하의 역할도 하지 못한 망자의 군단이다.
그것들은 보스 몬스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신전에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캔슬해 사마력을 회수하는 편이 좋았다.
“다음은 망자의 축복. 망자의 견갑. 망자의 삭풍.”
군단을 캔슬하여 회수한 제로가 자신에게 온갖 종류의 버프 마법을 발동시켰다.
이것으로 어느 정도 보스 몬스터의 공격에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준비는 끝났어.”
다종다양한 버프 마법을 사용한 제로는 망설임 없이 신전 내부로 들어갔다.
신전의 내부는 예상 외로 단출했다.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의 양옆에는 다종다양한 직업군을 묘사한 조각상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을 뿐.
이렇다 할 함정도, 이렇다 할 몬스터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왠지 불안하단 말이지.”
제로는 양옆으로 늘어선 조각상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저 감에 불과했지만, 왜인지 저것들은 보스 몬스터가 나타나면 움직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제로가 약간의 긴장감을 품으며 몇 분을 걸었을까.
짧지 않은 길의 끝에 하나의 거대한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로 보인 신전의 크기가 상당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홀이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저도로 거대한 홀.
홀의 천장에는 음울한 잿빛을 발하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인간의 뼈가 이리저리 얽힌 왕좌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또한 그러한 왕좌에는….
“리치…?”
머리에는 검은 보석이 박혀 있는 왕관을 뒤집어쓰고. 한 손에는 썩어 문드러진 나무로 만들어진 스태프를 쥐고 있다.
몸에 걸친 옷도.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들도.
하나같이 무시 못 할 힘이 느껴지는 장비들로 치장한 리치의 등장에 제로는 더더욱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이제야 왔느냐.]
우웅-!
제로가 홀 안으로 한 발 내딛자, 공허했던 리치의 눈구멍에 제로와 같은 검은 귀화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거대한 홀 내부를 가득 울리는 목소리가 리치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제로는 고작 목소리만 들었을 뿐임에도 전신이 저릿저릿해지는 감각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강해.’
지금까지 로스트 월드를 플레이 해 오면서 이 정도로 강한 적은 처음 만났다.
현 최상위 랭커들? 그들이라고 해도 눈앞의 리치와 같은 기백을 뿜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제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대, 위대하신 분의 옷자락을 원하는 자여.]
[그대, 위대하신 분의 옷자락을 취할 자격을 지닌 자여.]
[그대, 위대하신 분의 선택을 받은 자여.]
우웅-!
리치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홀의 벽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대의 강함을 증명하라.]
[그리하면 그대, 위대하신 분의 옷자락을 취할 수 있는 영광을 그 손에 거머쥘 터이니.]
콰르르-!
말을 마친 리치가 몸을 일으켰다.
리치가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해골 왕좌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으며, 리치의 전신에선 잿빛의 죽음이 넘실거리며 뿜어졌다.
“칫. 어쩐지 너무 쉽다 했어.”
신전까지 오는 길에서 만난 망자들의 강함과 숫자는 상당했다. 하지만 퀘스트의 난이도가 S급임을 생각해 보면 수십 프로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신전 밖에 자리 잡은 망자들은….
‘애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이거지.’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가 네크로노미콘을 꽉 움켜쥐었다.
[나의 이름은 헬데이븐.]
[나는 위대하신 분의 신봉자.]
[지금은 잊혀진 망자의 왕국의 지배자였던 존재.]
콰르르.
리치, 헬데이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로의 등 뒤로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에 제로가 슬쩍 뒤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홀까지 이어졌던 길목을 지키고 있던 조각상들이 움직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제로는 수백에 달하는 조각상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달려오자, 헛웃음을 터트렸다.
“오냐. 어디 한번 해 보자고. ■■■■ ■ ■■■ ■ ■ ■■, 망자의 역린.”
전직을 통해 한층 강해졌기 때문인지, 과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던 망자의 역린이 금방 완성됐다.
제로에게서 흘러나온 망자들이 허공에 뭉쳐 들며 다수의 창의 형태를 띠었으며. 검은 스파크를 튀기는 그것들은 망설임 없이 달려오는 조각상들을 향해 쏟아졌다.
콰가가가강-!
망자의 역린이 조각상과 부딪히는 순간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미치겠네.”
나름 상위의 마법 중 하나였던 망자의 역린이었지만, 그것이 처리한 조각상의 숫자는 고작해야 3~4개였다.
나머지 조각상들은 ‘모기가 물었나?’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데미지를 입은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대, 자격을 가진 자여.]
[그대의 진정한 강함을 드러내거라.]
우웅-!
헬데이븐에서 흘러나온 죽음이 조각상에 깃들었다.
그러자 조각상들의 표면이 강철의 빛을 띠며, 안 그래도 단단했던 몸뚱어리가 더욱 단단하게 변했다.
“가지가지 한다. 데스 웨이브.”
콰가강-!
제로를 중심으로 죽음이 방사형으로 퍼져 나갔다.
가장 앞에 있던 조각상들은 죽음의 파동에 얻어맞으며 뒤로 튕겨져 나갔지만, 뒤에 있던 조각상들이 그 빈자리를 순식간에 메꿨다.
“어쩔 수 없지.”
이대로는 안 된다.
그러한 판단을 내린 제로가 영창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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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의 언어로 된 영창이 이어지자 흘러나온 죽음이 제로를 뒤덮으며 회전했다.
제로의 손에 쥐어진 네크로노미콘은 ‘파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펼쳐지며 다수의 책장이 미친 듯이 넘겨졌다.
제로에게 다가간 조각상들이 무기를 휘둘렀지만, 제로를 보호하듯 휘몰아치는 죽음을 뚫지 못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영창이 이어졌을까.
돌연 제로의 귀화가 한층 크게 일렁이며….
“깊은 죽음의 심연에서 기어 올라와라. 데스 솔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죽음의 병기여. 지금 그 모습을 드러내 눈앞의 적을 멸하라, 어보미네이션.”
쿠구구궁-!
대기가 떨렸다.
동시에 제로의 등 뒤로 거대한 균열이 생기며, 그곳에서 제로가 아끼고 아끼던 ‘비장의 패’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