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허억-! 허억-!”
정신을 차린 제로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해 깊숙한 곳에 가라앉은 듯 온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방금 그건….’
제로는 눈앞에 떠오르는 무수히 많은 메시지 창을 지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봤던 환영은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그것은 환영이 맞기는 한 걸까?
아니, 그것보다도….
‘로스트 월드는 정말 단순한 게임에 불과할까?’
세계 최고의 가상 현실 게임이라 불리는 로스트 월드.
전체 가입자 수 5억 명을 넘겼으며, 지금도 기하급수적으로 유저들이 늘어나는 게임.
현재의 과학력으로는 재현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게임이라고도 불리는 것이 로스트 월드였다.
이것은 과연 단순한 게임인 것일까.
애초에 허상계가 침입했을 때, 플레이어들이 로스트 월드 속 능력을 각성하게 된 것이 우연에 불과했을까.
어쩌면….
제로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을 때, 균열의 틈에서 제로를 지켜보고 있던 죽음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너, 죽음과의 친화력이 상당하네.]
“그게 무슨 말이야?”
죽음의 말에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제로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이곳에서 네가 상당한 죽음을 쌓아 올렸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고작 그 정도로 외차원에 존재하는 나에게 닿을 수 있을까? 뭐, 네 앞에 나타난 건 거의 대부분이 내 흥미이기는 했지만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너, 이미 죽음을 경험했지?]
죽음의 말에 제로가 흠칫 몸을 떨었다.
공허한 눈구멍에서 피어오른 검은 귀화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제로는 과거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하고, 크로노스의 회중시계의 힘을 통해 시간을 역행해 과거로 회귀했다.
하지만 어떻게? 고작 게임 속에 존재하는 죽음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어.’
여전히 균열 속에서 붉은 안광을 터트리는 죽음을 바라보며 제로가 중얼거렸다.
죽음이란 존재 자체가 제로에게는 의문투성이였다.
제로 또한 로스트 월드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나름 랭커로 활동했음에도 죽음이란 존재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런 죽음이 속해 있다는 외차원이라는 공간 또한 죽음과 계약함으로써 처음 알게 되었다.
그뿐일까.
죽음은 로스트 월드 속에서 당당히 신의 위치에 있는 마신 알루타를 ‘거짓된 존재’라 칭했다.
그것은 어쩌면 주신 오딘 또한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죽음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그것은 로스트 월드라는 게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죽음은 무엇일까?’와 ‘외차원이란 무엇일까?’라는 의문은 곧 ‘로스트 월드는 정말 단순한 게임에 불과할까?’라는 의문으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제로가 의문에 의문을 품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균열 속 붉은 흉안의 형태로 제로를 지켜보던 죽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 다 됐네. 뭐, 나름 고생했어. 이곳에서의 언어로는 전직이라고 하던가?]
그 말을 끝으로 붉은 흉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그것이 자리 잡고 있던 균열 또한 닫히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로는 한때 죽음이 있었던 공간에서 눈을 떼며 중얼거렸다.
“상태창.”
[상태창]
이름: 제로
Lv: 257 성향: 카오스 명성: 3780 악명: ???
직업: 진 죽음의 대리자
칭호: 죽음의 대리인(외 [email protected])
소속: 외차원
종족: 상급 망자
체력: 10000 사마력: ???
내구: 200 지능: 300(+70) 지배: 318(+70) 행운: 5
잔여 스탯: 0
친화력
불: 0 물: 0 바람: 0 땅: 0
광기: 50 죽음: ??? 저주: 80
어둠: 50 외도: 50
오랜만에 열어본 상태창은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250에서 멈춰 있던 레벨은 전직 후 7 업이나 했다.
축적되어 있던 경험치가 한 번에 터져 나와 가능한 폭업이었다.
제로는 잔여 스탯을 내구와 지능, 지배에 골고루 투자하며 상태창을 껐다.
전직은 그저 레벨만 올려 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죽음의 대리자라는 직업은 진.죽음의 대리자로. 하급 망자였던 종족은 상급 망자로 변했다.
네크로노미콘을 통해 무수히 많은 스킬 또한 익혔으며, 전직을 통해 특수한 스킬 또한 익힐 수 있었다.
개중에서 제로가 가장 눈여겨본 것은….
“외차원의 문이라.”
특수 스킬, 외차원의 문.
진.죽음의 대리자로 전직을 통해 획득한 스킬로, 말 그대로 외차원으로 통하는 문을 여는 단순한 스킬에 불과했다.
허나 그 효과는 말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외차원의 문은 흑마법사의 헬 게이트와 비슷했다.
헬 게이트가 지옥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다수의 악마를 소환하는 스킬이라면 외차원의 문은 말 그대로 외차원과 통하는 문을 열어 그곳의 존재들을 소환하는 스킬이었다.
제로는 외차원이라는 곳이 명계라고 지레짐작할 뿐이었지만, 전직의 과정. 그 후에 있었던 죽음과의 대화.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석연치 않은 무언가들을 생각해 본다면 단순한 명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었다.
“강해진 건 좋은데, 의문만 늘어났네.”
제로가 중얼거렸다.
일단 지금 품은 의문들은 무의식 저편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었으며. 지금의 제로에게 있어선 강해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로는 망자의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 * *
“여기인가?”
제로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장소는 아직까지도 유저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사냥터였다.
아니, 더욱 정확히는 ‘숨겨진 던전’의 입구였다.
숨겨진 던전의 입구는 사냥터, 이단 광신도의 신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과거 제로가 전직을 위해 들렀던 던전, 이단 광신도의 소굴의 연장선 격의 사냥터로. 이곳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이단 광신도들의 광신자 무리. 이단의 성기사. 이단의 사제 등이 있으며, 보스 몬스터로는 이단 광신교의 대사제가 나타난다.
개중에서 제로가 있는 정확한 위치는 이단 광신교의 대사제가 있는 보스 룸이었다.
보스 몬스터는 당연하게도 제로가 소환한 망자의 병사와 정예병. 그리고 광전사들에 의해 처리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퀘스트 확인.”
[죽음의 조각]
상급 망자이자 진정한 대리자가 된 당신에게 죽음이 준비한 선물입니다.
거짓된 반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신전 어딘가에 죽음의 조각이 잠들어 있다고 합니다.
허나 진실은 그저 죽음이 자신의 대리자를 위해 준비해 두었을 뿐입니다.
진정한 대리자가 되신 당신은 그것을 취할 자격이 충분합니다.
난이도: S
보상: 죽음의 옷자락
“으음.”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를 본 제로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퀘스트 자체는 매우 단순했다. 퀘스트가 칭하는 ‘거짓된 반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신전’은 말 그대로 이단 광신도의 신전이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퀘스트의 난이도란 말이지.”
퀘스트 난이도는 떡하니 S급이라 적혀 있었다.
이단 광신도의 신전의 적정 레벨이 220~240 정도인 것을 생각해 보자면.
그리고 현 최상위 랭커들조차 A급. 높으면 A+급 퀘스트가 최고였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아무리 제로라 하더라도 상당한 무리가 뒤따르는 퀘스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퀘스트를 하지 않자니, 이 퀘스트는 말 그대로 죽음의 대리자 전용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는 퀘스트였다.
“일단 들어가자.”
생각을 마친 제로가 망설임 없이 사마력을 뿜어냈다.
의태의 반지를 사용하지 않아 훤히 드러난 흑골의 몸체에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고, 그것이 곧 보스 룸 바닥에 빨려들듯 흡수되었다.
그렇게 사마력을 집어삼킨 바닥에는 하나의 마법진이 새겨졌으며, 그 마법진 위로는 죽음을 불렀을 때와 똑같은 균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진 위에 나타난 균열 너머의 세계는 말 그대로 암흑. 빛 한점 보이지 않는 칠흑과도 같은 어둠의 세계였다.
“가 볼까.”
제로는 망설임 없이 균열 너머에 자리 잡은 어둠의 세계로 몸을 날렸다.
물컹-!
균열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한 생각을 하기 무섭게 무언가 젤리에 몸을 파묻는 듯한 느낌과 함께 시야가 변했다.
시야를 가리는 어둠이 걷히며 드러난 풍경은 황야였다.
가뭄을 연상케 하는 황야는 이곳저곳 갈라져 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 드문드문 황야에 자리 잡았으며. 하늘 위에는 검게 타오르는 태양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러한 황야에 나타난 제로의 등 뒤로는 균열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균열 너머의 세계는 이단 광신도의 신전이었다.
“여긴….”
제로가 신기하다는 듯 황야를 둘러보고 있을 때,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에 입장하였습니다.]
[???를 최초로 발견하였습니다. 명성이 100 상승합[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뭐야?”
처음 떠오른 메시지 창은 멀쩡했으나, 그 뒤로 이어질수록 그것들은 읽을 수 없었다.
글자는 이리저리 깨져 있었으며, 마치 노이즈라도 낀 양 한없이 불투명해 깨진 글자조차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글자가 깨졌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묘하게 몸이 가볍네.”
알아볼 수 없는 메시지 창을 지우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 제로가 입을 열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이곳에 도착한 순간, 의태의 반지는 제 기능을 잃고 흑골로 이루어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제로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있을 때, 돌연 뇌리에 하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연하지. 이곳을 구성하고 있는 기운은 죽음. 너에겐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일 거야.]
“죽음?”
뇌리에 파고든 목소리는 죽음의 목소리였다.
제로는 갑작스러운 죽음의 말에 어째서 몸이 이토록 가벼웠는지. 왜 마음이 점차 안정되는 것 같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럼 여기가 명… 아니, 외차원이란 거야?”
[그건 아니야. 이곳은 그저 대리자를 위해 내가 준비한 무대에 불과해.]
“그런.”
죽음의 말에 제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황량하기는 해도 황야의 크기는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일 뿐,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펼쳐져 있다.
그 외에도 하늘에 떠 있는 검은 태양이라던가 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죽음이 초월적인 존재라지만 ‘한 개인’이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스케일이 큰 거 아니야?’
고작 대리자를 위한 무대로 이러한 공간을 만들다니.
역시나 죽음은 신이 아닐까? 제로는 뇌리에 떠오른 생각에 다시 한번 확신을 가졌다.
“그보다…, 넌 왜 있는 거야?”
[대리자가 무대에 입장하면 알림이 울리도록 설정해 놨거든. 그나저나 이렇게 멍하니 있어도 괜찮겠어?]
“뭐…!”
죽음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리던 제로가 다급히 몸을 날렸다.
흑골로 이루어진 제로의 몸뚱어리가 황야를 나뒹구는 순간, 제로가 서 있던 자리에 수십 개의 녹슨 화살이 틀어박혔다.
“저건? 망자의 병사?”
[정확히는 망자의 궁기병이지. 아직 네가 만들지 못한 종류의 것이기도 해.]
죽음의 정정을 들으며 바라본 장소에는 검은 해골 말을 타고, 검은 장궁을 쥔 스켈레톤이 다수 존재했다.
[자, 시련은 시작됐어.]
그 말을 끝으로 죽음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하긴, S급 퀘스트가 쉬웠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겠지.”
제로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죽음의 목소리에 관심을 끄며 네크로노미콘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