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검은 성배]
등급: ???
분류: 성물
마신 알루타를 신봉하는 암흑신교의 성물입니다. 이 잔에 물을 담으면 특별한 힘이 깃든다고 하는데…, 글쎄?
“마지막의 글쎄는 뭐야?”
제로는 검은 성배에 관한 설명을 읽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암흑신교의 추적을 따돌린 제로는 자신의 던전, 망자의 연구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망자의 연구실에 도착한 제로는 무언가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전직이라 볼 수 있었다.
로스트 월드의 전직 시스템은 10레벨 이상부터 할 수 있는 1차 전직을 시작으로, 100레벨에 2차 전직, 250레벨에 3차 전직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렇게 따지자면 현 250레벨을 달성한 제로는 3차 전직을 해야 했지만, ‘죽음의 대리자’라는 직업이 지닌 특수성에 의해 지금 2차 전직에 들어갔다.
“어디 보자…, 염소의 피와 죄인의 피. 거기에 영혼석하고….”
인벤토리에서 각종 재료를 꺼낸 제로는 망설임 없이 바닥에 하나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직을 위해 죽음을 소환하기 위한 마법진이었다.
“준비는 끝!”
원 안에 다종다양한 언어를 새겨 넣은 제로가 허리를 피며 말했다.
“이 정도는 자동으로 해도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진심 아닌 불평을 내뱉은 제로는 곧 의태의 반지를 빼며 마법진 앞에 자리 잡았다.
전신이 검은 뼈로 이루어진 스켈레톤의, 공허한 눈구멍에 검은 귀화가 피어오르고.
검은 로브를 걸친 채, 한 손에 네크로노미콘을 쥐고 있는 모습은 사뭇 기괴한 위엄을 풍겼다.
“시작이다.”
다소 긴장 어린 말투로 중얼거린 제로는 마법진에 사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때때로 죽음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막상 이렇게 다시 한번 죽음과 마주하는 것은 게임임을 감안해도 상당히 긴장됐다.
어쩌면 로스트 월드 특유의 리얼리티와 현실감 덕분에, 죽음이 내뿜는 위압감이 더욱 강하게 다가오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제로가 마법진에 사마력을 불어넣길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상당수의 사마력을 잡아먹은 마법진의 중심으로부터 회색의 빛이 폭발하듯 뿜어지며, 그 중심의 공간이 갈라졌다.
꿀꺽.
갈라지고, 무너지며 망가진 공간의 틈을 바라보는 제로가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무너진 공간 너머로 보이는 것이라곤 끝없는 어둠뿐.
그 안에 존재하는 것은….
[이렇게 마주하는 건 또 오랜만이네.]
거대한 붉은 흉안의 형태를 한 죽음이 제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너진 공간 너머에서부터 웅웅 떨리며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신’ 그 자체를 떠올리게 만드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그래, 날 불렀다는 것은 한계를 맞이했다는 것이겠지?]
“그래.”
죽음의 말에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였다. 통상의 직업들은 굳이 상위 전직을 하지 않아도 레벨 업이 가능했지만, 제로의 직업인 죽음의 대리자는 달랐다.
전직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레벨 업이 불가능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제로는 어이없어 헛웃음을 터트렸었다.
하지만….
‘상위 전직을 통해 나는 더욱 강해진다.’
기본 전직만으로도 제로의 강함은 어중간한 랭커들을 뛰어넘었다.
현 랭커들의 레벨이 300 이상임을 감안하자면, 비상식적인 강함이었다.
로스트 월드 내에서 레벨이라는 수치는 절대적인 강함에 대한 수치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스트 월드 또한 게임이라는 틀에 갇혀 있기에, 레벨의 차이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고작 250레벨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랭커들과 비슷한 강함을 가지고 있는 제로는 밸런스 붕괴라 칭해도 할 말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한계를 돌파할 수 있게 해 주고 싶은데…, 네놈과 계약을 맺는 순간부터 나 또한 이 차원의 틀에 일정 부분 갇혀 버렸단 말이지. 참 귀찮은 세계야.]
‘차원의 틀에 갇혀? 마치 자신은….’
제로는 죽음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저 말은 마치 자신은 로스트 월드라는 게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 느껴졌다.
[어디 보자. 그래, 이게 좋겠다. 너, 알루타의 성배를 가지고 있지?]
끄덕.
죽음의 말에 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내 성물로 바꾸자. 필요한 재료는 간단해.]
타 신의 성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제로는 죽음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내비쳤으나, 죽음은 그런 제로를 무시한 채 성물의 강탈에 필요한 재료를 나열했다.
그런 죽음이 나열하는 재료들을 들으면 들을수록, 제로는 어느 순간 당혹감 어린 표정을 찌푸렸다.
* * *
“으음.”
전직 퀘스트를 받은 제로가 나타난 장소는 던전 이단 광신도의 소굴이었다.
이단 광신도의 소굴은 오딘교에서도, 암흑신교에서도 퇴출당한 자들이 모인 동굴이다.
또한 이단 광신도의 소굴은 적정 레벨 160을 조금 넘긴, 말 그대로 중수 유저들이 애용하는 사냥터 중 하나였다.
그들은 주신 오딘도, 마신 알루타도 아닌 듣도 보도 못한 신을 신봉하는 자들로서, 특이한 것은 그들 또한 신성력을 다루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신성력은 주신 오딘의 신성력저럼 자애로운, 혹은 마신 알루타의 신성력처럼 파괴적인 신성력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제3의 신성력.
그렇기에 유저들은 사실 이단 광신도들이 신봉하는 신 또한 게임 내에 존재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뭐,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지만.”
제로는 이단 광신도의 소굴에서 사냥하는 유저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로스트 월드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제로였기에, 그들이 신봉하는 존재 또한 알고 있었다.
그들이 신봉하는 존재는 오딘이나 알루타처럼 ‘신’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반신일 뿐이다.
제로의 기억에 따르면, 이단 광신도들이 믿고 따르는 반신은 오딘과 알루타의 견제로 신이 되지 못했을 뿐, 그 강함은 신에 필적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천계와 마계에 속해 중간계에선 그 강함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오딘과 알루타를 떠올리자면 중간계라는 공간에서만큼은 그들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훗날 이벤트의 하나로 전 유저들이 모여 레이드를 뛰긴 했지만 말이야.”
반신의 레이드에는 당연하게도 제로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제로는 더더욱 반신의 강함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어디 보자. 그나저나 나도 슬슬 움직여야 하는데 말이야.”
이단 광신도의 소굴에서 사냥하는 유저들을 바라보며 제로가 움직였다.
한창 사냥에 열중이던 유저들은 얼굴을 가리는 후드를 젖히며 드러난 제로의 붉은 눈동자.
머더러 특유의 그것을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제로를 알아보고 몸을 떨었다.
“학살자 제로?”
“쟤가 왜 여기에 있어?”
“젠장! 도망쳐!”
제로의 등장에 누군가는 의문을.
누군가는 신기함을 드러냈으나, 유저들이 가장 많이 드러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학살자 제로.
레벨의 높낮이를 막론하고 눈앞에 보이는 유저라면 닥치는 대로 죽이는, 그렇기에 붙은 이명 학살자.
제로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장인의 도시 베이른에 있는 강철의 무덤이란 던전에서 일으킨 대학살이었다.
그때 던전에서 사냥 중이던 유저 90% 이상을 몰살시킨 제로였기에, 유저들은 제로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이번에도 학살을 자행하기 위함임을 눈치챘다.
제로는 자신을 발견하기 무섭게 몸을 내빼는 유저들에 네크로노미콘을 펼쳤다.
“어딜 도망가려고. 망자의 벽.”
콰르르-!
이단 광신도의 소굴의 입구가 거대한 벽에 막혔다.
검은 스켈레톤들이 이리저리 얽힌 그것은 언뜻 보면 본 월을 연상시켰다.
허나 망자의 벽이 본 월과 다른 점은….
“으아악-!”
“벽에 붙지 마! 공격받는다!”
망자의 벽을 이루는 검은 스켈레톤들은 본 월과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각기 손에 쥐어진 다종다양한 무기를 휘두르며 가까이 있는 유저들을 공격했다.
도망치던 유저들은 망자의 벽을 단순한 네크로맨서의 본 월로 착각하고 넘어가려다 기습을 받았다.
“내가 기껏 와 줬는데 도망가면 안 되지.”
이익!
제로의 말에 몇몇 유저가 억울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넌 양심도 없냐? 네 레벨에 맞는 놈들이랑 놀라고!”
“양학하면 재밌냐!”
“야! 신성 길드에 당장 연락해! 학살자 제로가 이단 광신도의 소굴에 떴다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유저들은 멍하니 죽어 주지 않겠다는 듯, 무기를 뽑아 쥐며 제로와 대치했다.
제로는 그런 유저들의 반응에 음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도 저레벨 유저들을 학살하기는 싫거든. 근데 어쩌냐. 퀘스트가 떴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직을 위해 제로가 죽음에게 받은 퀘스트는 망자의 보옥이라 불리는 검은 구슬에 이방인의 죽음을 축적하는 것.
즉, PK를 하라는 소리였다.
다만, PK를 해야 하는 유저의 레벨에 제한은 없다.
그렇기에 제로는 1레벨 초보자를 죽이든, 300레벨 랭커를 죽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럼에도 제로가 굳이 이단 광신도의 소굴에 나타난 이유는 그저 배려이자 최대한 빨리 퀘스틀 끝내기 위한 것이었다.
초보자가 아닌, 어느 정도 레벨이 되는 유저들을 죽임으로써 로스트 월드의 유저 이탈을 막기 위한 배려.
그와 동시에 괜히 고레벨 유저를 죽이는 고생을 하지 않기 위한 이유.
그 두 가지가 합쳐져 이단 광신도의 소굴이 선정되었다.
“그러니 후딱후딱 죽자? 광기에 취해 살육을 멈추지 않는 망자여, 지금 이곳에 그 광기를 드러내라. 망자의 광전사.”
콰르르.
제로의 앞으로 땅이 들썩이더니, 10구의 언데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갑옷 따윈 걸치지 않은, 오직 검은 뼈로 이루어진 앙상한 몸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다.
허나 무기만큼은 달랐다.
몸을 일으킨 10구의 망자의 광전사들은 서로 다른 무기를 들었다. 어떤 것은 롱 소드를, 어떤 것은 대검을. 어떤 것은 창을, 어떤 것은 둔기를.
망자의 광전사들은 서로 다른 무기들을 꼬나쥐고 있었다.
“이익! 달려들어!”
“고작 10구야!”
“제까짓 게 아무리 강해도 네크로매서지! 술사를 노려!”
제로가 망자의 광전사를 꺼내자 유저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처음 제로를 봤을 때 드러냈던 공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제로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고작 10개의 언데드만 소환한 것을 보고 할 만하다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로는 네크로맨서이기에 근접전에 약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할 만하다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모조리 죽여 버려.”
그 모든 것은 약자의 망상에 불과했다.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망자의 광전사들의 입이 쩍! 벌어지고.
곧 ‘그아아아-!’하는 괴성을 내지르며 망자의 광전사들이 움직였다.
그것들이 쥐고 있는 무기가 한 번,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달려들던 유저들이 서너 명씩 나가떨어졌으며.
나름의 방어력을 갖춘 탱커들마저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즉사했다.
이단 광신도의 소굴에는 수백, 수천의 유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10구의 망자의 광전사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저들이 죽어 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 유저들은 망자의 광전사의 공세를 뚫고 제로에게 달라붙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멍청하긴. 다크 웨이브.”
콰가가강-!
제로에게 달라붙은 몇 안 되는 유저들마저 제로가 사용한 마법을 피하지 못하고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제로는 그렇게 유저들이 죽을 때마다, 망자의 보옥에 죽음이 쌓이는 것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