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제로가 검은 성배를 회수하고 시작의 도시를 떠난 순간, 암흑신교와 몬스터들에 맞서 싸우던 유저들의 앞에 하나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암흑신교의 침공을 막아라!를 실패하였습니다.]
유저들은 뜬금없이 떠오른 퀘스트 실패 메시지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누가, 언제, 어떻게 시작의 도시에 침입해 검은 성배를 가져간 것일까?
이벤트라는 특수한 상황에 의해, 시작의 도시로 침입할 수 있는 성문은 하나로 제한되었고.
그마저도 수많은 유저가 철통같이 막아서고 있었기에 그러한 의문은 더더욱 증폭되었다.
한편, 암흑신교 측에 가담해 시작의 도시를 공략하고 있던 유저들 또한 하나의 메시지를 받았다.
그것은….
[도둑맞은 암흑신교의 성물, 검은 성배를 되찾아라!를 실패하였습니다.]
악명을 쌓아 암흑신교 측에서 시작의 도시를 공략하고 있던 유저들 또한 퀘스트에 실패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결국, 검은 성배에 관한 이벤트는 그 누구의 승리도 아닌, 양쪽 모두의 실패로 끝을 맺었다.
그 사실이 밝혀진 이유는 첫 대규모 이벤트의 실패에 로스트 월드 커뮤니티가 불타오르며 다양한 글들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벤트에 참여한 모든 유저들은 공통된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왜? 어째서 그 어느 진영도 성공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 * *
“이쯤이면 되겠지?”
검은 성배를 지닌 채 시작의 도시를 빠져나온 제로가 중얼거렸다.
제로는 어느새 처음 이벤트가 시작되었던 숲에 서 있었는데.
그런 제로의 등장을 눈치챈 암흑신교의 사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형제여! 간악한 오딘의 종을 따돌리고, 그분의 성물을 되찾아 오셨군요!”
제로의 앞에 나타난 사제의 숫자는 총 다섯 명.
개중 가장 급이 높아 보이는, 그리고 가장 늙은 사제가 감동 어린 표정을 지으며 제로를 향해 걸어왔다.
제로는 그런 사제의 말에 피식 웃으며 품에서 검은 성배를 꺼내 보였다.
“오오! 마신 알루타 님의 성배! 형제여, 당장 그것을 저에게 넘기시지요.”
사제는 제로의 손에 쥐어진 검은 성배를 보며 감동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이번 검은 성배를 되찾기 위한 전쟁의 지휘자로 선출되었지만. 그 등급이 높지 않아 실제의 검은 성배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편 제로는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사제와 검은 성배를 번갈아 바라보다, 돌연 왼손을 들어 보였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엿이나 먹으라고.”
사제의 말에 제로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상큼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검은 성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그와는 반대로 네크로노미콘을 꺼내 쥐었다.
“형제여.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짓이지요?”
제로의 돌발 행동에 뒤에 서 있던 네 명의 사제들은 물론. 제로의 앞으로 걸어가던 사제의 표정이 악귀와도 같이 일그러졌다.
그나마 제로가 검은 성배를 되찾아 온, 암흑신교의 입장에서는 은인이나 다름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곧바로 다섯 사제들의 합공을 받아 죽음을 맞이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미안하지만 검은 성배는 내가 가져가야겠어.”
“도대체…. 그게…. 무슨…. 개소리란…. 말이죠…?”
“무슨 말이긴. 이런 말이지. 데스 캐논.”
꽈앙-!
암흑신교 특유의 검은 신성력을 내뿜는 사제를 향해 제로가 데스 캐논을 날렸다.
제로의 등 뒤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검은 탄환은 가까이 있는, 암흑신교의 늙은 사제와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네-! 놈-!”
폭발에 의해 피어오른 먼지구름 사이로 늙은 사제의 성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제로는 기습적으로 날린 데스 캐논으로도 사제 한 명 죽이지 못했다는 것에 쯧! 하며 혀를 찼다.
“아무리 사제라 해도 지휘관으로 선출된 이유가 있다 이건가.”
이번 일만 잘 마무리 한다면, 최대한 빨리 레벨부터 올려야겠다고 제로는 다짐했다.
한편, 제로의 배신을 확인한 나머지 네 명의 사제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제로를 중심으로 사방을 점하며 암흑신교 특유의 파괴적인 신성 마법을 뿜어냈다.
“쯧, 본 월.”
콰르르-!
제로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검은 스켈레톤들이 얽힌 뼈의 방패가 솟아난다.
그것들은 오딘의 대신전 내부에서 센게라에게 허망하게 박살 났던 것과는 비교되게, 암흑신교 사제들의 공격을 어느 정도 막는 모습을 보였다.
“감히! 감히 그분의 성물을 가져가겠다고? 이래서 이방인들이란! 네놈을 죽여 그분의 성물을 되찾고, 네놈의 영혼을 갈아 마셔 버리겠다!”
푸확-!
제로가 네 명의 사제들의 합공을 막아 내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늙은 사제의 성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광풍이 휘몰아치며 먼지구름이 걷히고 드러난 늙은 사제는 검은 신성력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한 손에 악마의 얼굴을 형상화한 메이스를 쥐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암흑의 철퇴!”
콰앙-!
휘둘러진 메이스와 충돌한 본 월이 거대한 폭발과 함께 산산이 터져 나갔다.
‘이 정도면 최소 마스터 레벨은 되겠네.’
늙은 사제의 강함은 오딘의 대신전에서 상대했던 신의 방패 센게라보다 확연히 약하다.
그렇다 해서 제로보다 약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벤의 소환은 쿨타임 때문에 힘들고. 어떻게 해야 하나.’
제로는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악마의 머리를 형상화한 메이스를 휘두르는 사제의 공격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마스터 레벨 이상의 사제가 한 명.
그에 근접해 보이는 사제가 네 명이다.
그에 반해 제로의 레벨은 이번 이벤트를 통해 막 250을 찍었다.
단순하게 따져 봐도, 현 상황에서 제로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수렴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처음부터 검은 성배를 가져갈 생각은 아니었어.”
사제들의 공격을 회피하고, 방어하며 이리저리 도망치던 제로가 입을 열었다.
“놈! 그분의 성물을 그 더러운 입에 담지 말거라!”
콰앙!
제로의 말을 비아냥으로 들은 사제들의 공격이 더욱 매서워졌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로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어쩌냐? 내가 강해지기 위해선 검은 성배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로 또한 처음부터 암흑신교의 뒤통수를 쳐 검은 성배를 빼돌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돌발 이벤트를 통해 네크로노미콘이 성장하고, 자신의 레벨이 250을 찍는 순간.
제로는 하나의 퀘스트를 받았다.
그것은 죽음에게 받은 퀘스트로, 스스로의 ‘성장’에 관한 퀘스트였다.
“노오오오옴-! 지금 그것을 변명이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암흑의 진노!”
“쉐도우 점핑.”
콰가강-!
그림자를 통해 사라진 제로가 서 있던 자리에 검은 번개가 내리꽂혔다.
제로는 근처 나무의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진짜 장난 아닌데.’
차라리 센게라와의 전투가 한결 편했다.
적어도 센게라와의 전투에선 벤이라는 히든카드가 있었고, 센게라는 단 한 번도 공격다운 공격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암흑신교의 사제들. 그들은 말 그대로 자신을 ‘죽이기 위해’ 공격하고 있었다.
‘한 번 더 데스 그라운드를 펼쳐?’
그러한 생각과 함께 슬쩍 확인해 본 바, 데스 그라운드의 쿨타임은 무려 일주일이었다.
이로써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이 또 하나 사라져 버렸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의태의 반지부터 뺀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제로는 결국 의태의 반지를 빼버렸다.
가뜩이나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의태의 반지로 힘을 제한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의태의 반지를 빼자, 제로의 외형이 변화했다.
인간의 껍질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려 사라지고. 드러난 것은 흑골의 뼈로 이루어진 몸뚱어리다.
공허한 눈구멍에는 검은 귀화가 피어오르고, 이마의 정 중앙에는 제로의 생명력이 뭉친 붉은 보석이 반짝였다.
변화한 제로의 모습을 본 암흑신교의 늙은 사제가 빠드득! 거칠게 이를 갈았다.
“네놈! 검은 마탑에서 나온 것이었더냐!”
“이 모습만 보면 죄다 검은 마탑, 검은 마탑 거리네.”
사제의 외침에 제로가 실없는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제로 본래의 모습은 누가 봐도 리치를 떠올린다.
그렇기에 제로 스스로가 검은 마탑과 아무런 연이 없다 말해도 누구 하나 믿어 주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제 어떡한…, 데스 웨이브.”
콰가강-!
중얼거리던 제로가 다급히 마법을 사용했다.
제로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죽음의 파동은 사제들의 공격과 충돌하더니 공멸하며 사라졌다.
“감히 그분의 성물을 노리다니. 검은 마탑은 암흑신교와의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겠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겠지?”
‘그런 게 있었어?’
사제의 말에 제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제로라 하더라도 로스트 월드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미래 혹은 과거에 존재했던 랭커들에 비해 극히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때의 제로는 파티 플레이도 하지 않고, 특정 길드에 가입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냥, 사냥, 사냥.
오직 사냥에만 열중하며 레벨을 높이기 위해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암흑신교와 검은 마탑 간에 불가침 조약이 있었다는 것도 지금, 사제의 말에 알아차렸다.
“글쎄? 어떨까나.”
최대한 이 정보를 이용해야 한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이어지는 제로의 말에 사제가 다시 한번 빠드득! 거칠게 이를 갈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너희들과 적대할 생각이 없다니깐? 나도 그냥 명령을 받고 움직일 뿐이야.”
“놈….”
이어진 제로의 말에 늙은 사제가 낮은 울림을 토해 냈다.
어느새 사제들의 공격은 중지되고, 잠시간의 소강상태에 돌입했다.
“네놈들이 그분의 성물을 가져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그건 나야 모르지.”
“네놈은 스스로가 리치로서의 자긍심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냐!”
“자긍심? 그게 뭐냐? 먹는 거냐? 우걱우걱? 나야 뭐, 날 사역한 놈의 명령을 들을 뿐이야.”
“네놈을 사역한 놈은 누구지?”
“너희들에게 그걸 말해 줄 의리는 없지 않나? 우리가 그 정도로 친했던가?”
….
제로와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늙은 사제의 몸에서 슬금슬금 검은 신성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헀다.
아니, 늙은 사제뿐만이 아니라, 사방에서 제로를 포위하고 있는 나머지 사제들 또한 슬금슬금 검은 신성력을 꺼냈다.
제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제 슬슬 몸을 빼낼 때가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추 준비도 끝났고. 이제 진짜로 가야겠네.’
“아, 한 가지 말해줄 건 있어.”
“그게 뭐지?”
“그게 뭐냐면 말이야….”
돌연 제로가 한 명, 한 명 사제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이번에 만나서 즐거웠고, 다음에 다시는 만나지 말자! 데스 클라우드!”
푸쉬이이익-!
제로의 발밑에서부터 죽음으로 이루어진 잿빛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에 닿는 모든 것.
대지와 풀, 나무 따위는 물론이요, 공기마저 죽여 버리는 안개에 사제들이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제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쉐도우 점핑을 통해 사제들과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콜 데스 홀스.”
히히힝-!
쉐도우 점핑으로 거리를 벌린 제로는 망설임 없이 망자의 군마를 소환해 올라탔다.
“가자!”
히히힝-!
제로를 태운 망자의 군마가 거친 투레질을 하며 허공을 질주헀다.
한편, 뒤늦게 죽음의 연기를 처리한 사제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제로에 으득!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