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그때 내가 말했지?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하아.”
젠젠의 말에 제로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젠젠이 복수할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형이 신성 길드의 간부 중 한 명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고.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안 좋은데.’
속으로 중얼거린 제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멸망의 폭풍의 사용 페널티로 하루 동안 모든 능력치가 반 토막이 나버린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수십 명의 신성 길드 정예들을 상대하는 것은 위험했다.
‘거기에 신성 계열 직업군은 천적이란 말이다.’
아무래도 신성력 자체가 정호와 파마의 성질이 강하기에 언데드와는 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제로가 가만히 서 있자, 더욱 기세등등해진 젠젠이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 했다.
그가 막 무언가 외치려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한 유저가 걸어 나왔다.
‘저놈은.’
제로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가자, 앞으로 걸어 나온 유저가 입을 열었다.
“너냐? 겁대가리 없이 내 동생을 PK한 네크로맨서가.”
“넌 아마…, 신성검왕이었지? 닉이 그게 뭐냐? 초딩도 아니고.”
빠직-!
제로의 말에 젠젠의 형, 신성검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이렇게 따까리들까지 끌고 온 이유가 뭐냐?”
제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직 저들은 자신의 능력치가 반 토막이 났다는 것을 모른다.
그렇다면 최대한 강하게 나가, 상대가 덤비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틈에 난 도망치는 거지.’
제로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신성검왕이 비릿한 미소를 내비쳤다.
“아무리 네가 네크로맨서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그 천적인 사제와 성기사들이다. 강한 척 허세 부려 봐야 소용없어.”
“그냥 얌전히 뒈져!”
신성검왕의 말을 이어, 젠젠이 버럭 외쳤다.
갈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고, 신성검왕을 등에 업고 나대는 젠젠의 행동에 제로의 두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말이 통하지 않네.”
조용히 중얼거린 제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제로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망자의 병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이상, 차라리 선빵을 쳐서 도망칠 틈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지금 여기서 죽게 된다면, 그 손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모조리 죽여 버려.”
그아아아-!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망자의 병사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사제들. 턴 언데드를 사용해라.”
턴 언데드!
턴 언데드!
턴 언데드!
파앗-!
신성검왕의 명령에 맞춰 사제들이 스킬을 사용했다.
사방에서 환한 빛이 뿜어지며 달려가던 병사들의 육체가 무너져 내렸다.
‘칫.’
제로는 너무나도 허망하게 망가지는 망자의 병사들에 낮게 혀를 찼다.
반 토막이 나 버린 능력치의 공백은 현 상황에서 너무나도 크게 작용해 버렸다.
그나마 정예병들이라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겠지만….
‘현 상황에선 정예병도 꺼낼 수 없어.’
제로가 ‘이제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을 품으며 주변을 훑어볼 때, 신성검왕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성기사와 성전사들 돌격. 감히 우리에게 엄니를 드러낸 머저리를 죽여 버려.”
우아아아-!
신성검왕의 명령에 맞춰 성기사와 성전사 유저들이 제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스킬을 사용하며 달려드는 그들에 망자의 병사들은 다시 한번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외에도 뒤에서 각종 버프 스킬을 사용하는 사제들 덕분에 제로는 순식간에 열세에 몰렸다.
“칫, 다크 캐논.”
쾅!
제로에게서 튀어나온 거대한 탄환에 부딪친 유저 몇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다시금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며 달려드는 모습은 그들이 별다른 데미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나마 입힌 데미지마저 사제들의 회복 스킬에 사라지는 모습은….
“완전 좀비가 따로 없네.”
제로는 순식간에 다가와 휘둘러지는 검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가뜩이나 방어에 특화된 성기사라 딜도 잘 안 박히는데, 뒤에서 사제들의 버프와 회복이 날아온다.
쓰러져도, 쓰러져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드는 모습은 누가 언데드인지 헷갈리게 만들 지경이었다.
“좀 꺼져라! 다크 웨이브!”
콰가강-!
제로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죽음의 파동에 성기사 몇이 튕겨져 나갔다.
제로는 몇 명의 성기사들이 튕겨져 나감으로써 만들어진 틈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신성 길드의 유저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로가 만든 틈을 다른 유저들이 순식간에 메꾼 것이다.
확실히 미래의 10강 중 하나인 신성 길드라는 것일까.
그들의 움직임은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일사불란했다.
‘슬슬 위험한데.’
제로는 점차 바닥을 보이는 사마력에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이대로 소모전이 이어지면 결국 지치는 것은 자신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쳐 나가떨어지면….
‘죽음을 피할 수 없어.’
그 전에 어떻게든 이 성기사들의 벽을 돌파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몸을 빼내야 한다는 생각에 잠겼기 때문일까.
제로는 자신의 등 뒤로 접근하는 한 성기사의 기척을 놓쳐 버렸다.
“죽어라-!”
살금살금, 마치 도둑처럼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접근한 성기사 한 명이 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충만한 신성력이 담겨져 있는 검은 제로의 등을 훑고 지나갔다.
“크윽-!”
기습 아닌 기습에 당한 제로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특히나 검에 베인 상처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신성력이 자신의 육체를 이루는 죽음을 밀어내는 감각에 제로는 정신이 뒤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꼈다.
‘이거 진짜 위험한데.’
“칫! 본 월!”
쿠르르-!
스킬을 사용하자, 제로의 앞으로 거대한 흑골의 벽이 솟아나 성기사들의 공격을 튕겨 냈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직업의 상성에서 차이가 나고, 스킬의 페널티로 능력치가 깎여 나갔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열세에 몰릴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난 내 힘을 너무 과신하고 있었나 보네.’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린 제로는 결국 도망치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허망하게 죽어 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한 의지를 품은 제로가 가만히 멈춰 서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신성검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저 제로의 의도를 모르는 젠젠만이 신성검왕의 곁에서 ‘빨리 죽여 버려!’라고 외칠 뿐이었다.
“데스 캐논.”
“어…! 커헉!”
제로가 날린 데스 캐논을 막아선 유저가 비명과 함께 튕겨져 나갔다.
그는 성기사답게 순백의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데스 캐논에 의해 흘러 들어간 죽음은 그 순백을 검게 변질시켰다.
한편, 신성 길드 유저들은 갑자기 달라진 마법의 위력에 당황한 표정을 내비쳤다.
제로는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니들이 내 목을 원한다면 줄게. 하지만… 쉽게 가져갈 순 없을 거야.”
서늘하게 퍼져나가는 제로의 목소리에 성기사들이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최대한 많은 숫자의 유저들을 길동무로 삼겠다.
또한, 더 이상 힘을 아끼지도, 숨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제로는 각종 마법들을 난사했다.
블라인드와 사일런스. 혼란 따위의 디버프 계열 저주부터 시작해 데스 볼과 데스 캐논. 본 스피어 따위의 공격 마법까지.
제로로부터 뿜어지는 다종다양한 마법들에 성기사들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제로 개인이 사용하는 스킬의 위력이, 수십의 성기사와 사제들로 이루어진 방어와 회복, 버프 따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아무리 제로가 히든 클래스라지만 밸런스 따위 씹어 먹었다는 듯 선보이는 그 모습에 결국 신성검왕이 버럭 외쳤다.
“모두 물러나!”
신성검왕의 명령에 성기사들이 물러나며 제로와 거리를 벌렸다.
물러난 유저들의 숫자는 몇 줄어들지 않았지만, 그 정도의 손해도 신성검왕에게 있어선 불만이었다.
“과연, 단신으로 내 동생의 길드를 박살 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네. 너, 평범한 네크로맨서가 아니지?”
스릉.
허리춤에 매인 순백의 검을 뽑아 쥐며 앞으로 나선 신성검왕이 입을 열었다.
신성검왕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네크로맨서들을 상대해 왔다. 그것이 로스트 월드의 네크로맨서이든, 아니면 타 게임의 네크로맨서이든.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만나 왔던 네크로맨서 중, 제로와 같은 강함을 보여주는 유저는 없었다.
그렇기에 신성검왕은 제로가 ‘평범한’ 네크로맨서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야. 내가 지금까지 죽인 네크로맨서의 숫자만 해도 수백…!”
카가가각-!
말을 하던 신성검왕이 검을 휘둘렀다.
그에 신성검왕의 안면을 노리며 쏘아진 본 스피어가 갈려 나가며 바닥에 처박혔다.
“사람이 말을 할 땐 들어야지? 홀리 오라.”
후웅-!
신성검왕을 중심으로 성스러운 오라가 퍼져 나갔다.
그것은 제로가 내뿜는 죽음과 충돌해 검고 하얀 스파크를 만들었다.
제로는 눈앞의 신성검왕에 칫! 하며 혀를 찼다.
신성검왕은 위험했다.
닉네임만 보면 초딩 같은 유치함이 묻어 나오지만, 그의 강함은 진짜다.
제로가 아무리 죽음을 각오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을 상대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약간의 틈이라도 만들겠다는 의도 또한 섞여 있었다.
로스트 월드에서의 죽음은 타 게임에서의 죽음보다 더욱 리얼해, 대부분의 유저들은 어지간해선 죽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거기에 신성 길드에 가입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레벨을 올리고 나머지는 아이템에 투자를 했다는 뜻.
괜히 죽어 레벨이 깎이고, 아이템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들에게도 막심한 손해였다.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거냐?”
투쾅-!
제로를 비꼬듯 말한 신성검왕이 움직였다.
그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대지가 폭탄 터지듯 터져 나갔다.
그에 제로가 뒤로 물러나며 마법을 사용했다.
“스파이크 본 월!”
콰르르-!
콰가가강!
제로의 앞으로 솟아난 흑골의 벽에, 수십 개의 스파이크가 튀어나와 신성검왕의 몸을 꿰뚫었다.
아니, 꿰뚫은 것처럼 보였다.
신성검왕은 자신의 전신을 노리며 튀어나오는 스파이크를 거대한 방패를 앞세워 박살 냈다.
“소용없다! 홀리 실드 대쉬!”
퍼억-!
“커헉!”
제로와 가까워지는 순간, 신성검왕이 다시 한번 방패를 앞세워 더욱 가속했다.
갑작스런 신성검왕의 가속에 제로는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아 수십 미터를 튕겨져 나갔다.
‘칫.’
바닥을 구르던 제로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고작 일격을 얻어맞았을 뿐인데 체력이 바닥을 기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한두 대만 더 허용한다면 자신은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뭐, 어차피 죽음은 각오하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말했지? 쉽게 죽어 주지는 않겠다고. 데스 캐논!”
꽈앙!
제로에게서 튀어나온 데스 캐논이 신성검왕의 방패와 충돌하며 폭발했다.
하지만 신성검왕은 데스 캐논의 폭발에 뒤로 밀려났을 뿐, 데미지를 입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멍청한 놈. 대쉬.”
쾅!
제로의 의미 없는 발악을 비웃은 신성검왕이 다시 한번 가속했다.
방금 전과 비교해 배 이상 빨라진 신성검왕은 순식간에 제로의 앞에 도착했으며, 제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죽어라. 홀리 크로스.”
신성검왕이 십자가 모양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에 맞춰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십자가 형태의 칼날이 튀어나와 제로의 몸을 베어 냈다.
적어도…, 신성검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막 신성검왕의 홀리 크로스가 제로를 죽이려는 찰나, 제로의 등 뒤에서 날아온 검은 화살이 신성검왕의 홀리 크로스를 박살 내며 바닥에 틀어박혔다.
“거기까지!”
동시에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