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쿠구구구-!
연구실 대지가 떨리며, 배신자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온갖 시체를 짜깁기해 만든 것만 같은 그것의 크기는 4층짜리 건물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저건 또 뭐야?”
몸을 일으킨 거인은 딱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특히나 종족 특성으로 무시할 수 있었기에 다행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거인의 존재감에 압도당해 온갖 디버프를 받을 뻔했다.
“크큭. 보이는가? 이것이 바로 나의 완성품! 최고의 예술 작품이다!”
배신자는 몸을 일으키는 거인에 기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런 배신자의 목소리에 제로가 ‘뭐라는 거야?’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쾅-!
“커헉!”
돌연 거인이 거대한 주먹을 휘두르며 배신자를 강타했다.
배신자는 짧은 단말마와 함께, 수십 미터를 날아가더니 벽에 처박히며 즉사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제로는 자신이 만든 언데드에게 죽음을 당하는 배신자의 모습에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배신자의 지배력으로는 강력한 거인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거인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도 있었겠지만, 제로의 등장으로 다급해진 배신자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상태로 거인을 일으켰다.
그것이 배신자가 죽게 된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몰랐다.
한편.
“하, 저걸 어떻게 처리하냐.”
제로는 거인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덩치와,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고레벨의 네크로맨서를 일격에 죽여 버린 강력함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에 언데드라는 특성상, 제로가 가진 대부분의 마법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임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퀘스트-잿빛 마탑을 배신한 네크로맨서를 척살하라의 난이도가 A에서 A+로 상향됩니다.]
“하, 미치겠네.”
제로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창에 고개를 내저었다.
안 그래도 불안하다 싶었는데, 거인의 등장으로 퀘스트의 난이도가 올라갔다.
이것은 잿빛 마탑을 배신한 네크로맨서보다 눈앞의 거인이 더욱 강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벤을 소환하기에는 아직 쿨타임이고. 일단 어떻게든 부딪쳐 봐야 겠네.’
생각을 정리한 제로가 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저 거인을 죽여 버려.”
그아아아악-!
제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 시립해 있던 망자의 병사와 정예병들이 달려들었다.
제로는 거인을 향해 달려드는 병사와 정예병들을 망자의 불꽃과 망자의 원한. 명계의 삭풍으로 강화시킨 후, 새로운 영창에 들어갔다.
“■■■ ■ ■■ ■■■■■ ■■. 명계의 사슬.”
촤라락-!
제로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명계의 언어로 된 영창이 끝나자 칠흑의 사슬이 튀어나왔다.
하나하나가 농밀한 죽음을 품고 있는 사슬들은 제로의 손짓에 맞춰 나아가 거인의 다리를 휘감았다.
쿠웅-!
명계의 사슬에 발이 구속당한 거인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그 틈을 노려 망자의 병사와 정예병들은 거인의 몸에 올라타 무기를 휘둘렀다.
불꽃과 냉기, 바람의 속성이 담겨 있는 그것들의 공격은 거인의 체력을 착실하게 깎아 나갔지만, 덩치에 걸맞게 거인의 체력은 방대했으며. 같은 언데드라 죽음 속성이라는 상성에 제대로 된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았다.
“일단 발은 묶었고. 다음은….”
■■ ■■■■ ■■ ■ ■■■ ■ ■■.
■■ ■■ ■ ■.
■■ ■■■ ■ ■ ■■.
제로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영창이 이어졌다.
평소의 그것과는 다르게 2분여 가까이 이어진 영창이 끝을 맺으며….
“헬 그라운드.”
콰가가강-!
대지가 뒤엎어졌다.
연구실의 바닥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양 흔들리고, 쩍쩍 갈라졌으며. 그렇게 갈라진 틈 사이로 지옥의 불꽃이 치솟았다.
그 외에도 갈라지는 대지에서 뾰족한 가시가 튀어나와 거인을 꿰뚫는 등.
제로가 발동한 스킬은 헬 그라운드라는 이름 그대로의 풍경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걸로도 안 죽었다고?”
고위 마법을 사용하느라 지친 제로가 놀랍다는 듯 거인을 바라봤다.
거인의 육체는 헬 그라운드에서 피어오른 지옥의 불꽃에 탄화되고, 가시에 꿰뚫렸을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망자의 병사와 정예병들의 공격에 엉망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인은 끈질긴 생명력을 바탕으로 차츰차츰 재생해 나갔다.
“어처구니가 없…!”
숨을 고르며 거인을 바라보던 제로의 두 눈동자가 빛났다.
탄화된 살덩이가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살점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그때. 제로는 그 틈 사이로 하나의 보석을 발견했다.
그것은 투명한, 하지만 그 속에 잿빛의 기류를 품고 있는 다이아몬드였다. 그 보석에는 제로조차 몸이 떨릴 정도로 농밀한 죽음이 깃들어 있었다.
“저게 잿빛 마탑의 보물?”
제로는 얼핏 보였던 보석이 바로, 배신자가 잿빛 마탑에서 훔친 보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야 좀 이해가 되네.”
음음!
고개를 끄덕인 제로가 네크로노미콘을 꽉 움켜쥐었다.
거인의 비상식적인 강함. 아무리 언데드라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재생력과 체력까지.
그것들에 대한 모든 의문이 방금 본 보석에 의해 풀렸다.
그렇다면.
“내가 할 행동은 하나지.”
속삭이듯 중얼거린 제로가 움직였다.
양발에 명계의 삭풍을 두르며 연구실 곳곳을 누비는 제로는 말 그대로 바람과도 같았다.
그어어어-!
한편, 대부분의 재생을 끝마친 거인은 날파리처럼 자신의 주변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제로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제로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하면서도 모든 것을 파괴할 것만 같은 거력이 담긴 거인의 주먹에 입을 열었다.
“본 실드.”
쩌엉-!
흑골의 방패가 제로의 전신을 뒤덮었고, 그 위로 거인의 주먹이 떨어졌다.
꽈앙-!
거인의 거력이 담긴 주먹질에 본 실드와 함께 튕겨 나간 제로가 벽에 처박혔다.
우수수 떨어지는 파편을 이리저리 치우며 몸을 일으킨 제로는….
“칫.”
혀를 차며 거인을 바라봤다.
본 실드를 전개했음에도 완전히 막아 내지 못한 충격에 전신이 저릿저릿하게 울렸다.
그와 더불어 한계에 가까운 데미지에 의태의 반지로 만들어 낸 인간의 껍데기가 불안전하게 일렁거렸다.
“짜증 나네.”
조용히 중얼거린 제로가 거인을 바라봤다.
거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제로에 ‘그아아아!’ 하는 괴성을 내질렀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끝내 줄 테니깐.”
제로가 의태의 반지를 빼며 입을 열었다.
손가락에서 의태의 반지가 뽑히는 그 순간, 짙은 죽음이 휘몰아치며 제로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심연보다 어두운 칠흑을 담고 있는 흑골의 육체.
이마의 정중앙에는 제로의 생명력이 응축된 붉은 보석이 반짝였으며, 공허한 두 눈구멍에는 검은 귀화가 피어올랐다.
제로의 몸을 뒤덮고 있던 검은 로브는, 그 죽음을 버티지 못해 바스러지기 시작했으며. 제로의 오른손에는 꺼림칙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네크로노미콘이 쥐어졌다.
“금방 죽여 줄게. 그리고 만일 시체가 남는다면.”
‘그건 내가 잘 사용해 줄게.’
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인이 돌연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거인 또한 느낀 것이다.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죽음 그 이상으로 농밀하면서도, 진득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제로의 죽음을.
제로는 그런 거인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파앗-!
구우우웅-!
제로의 손가락이 까딱함에 맞춰, 거인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검은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을 뒤덮은 마법진은 방금 전, 제로가 사방을 누비며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아아아아-!”
움직이지 않으면 당한다.
어떻게든 이 마법진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한다.
거인은 본능에 가까운 생각을 품으며 움직였다.
하지만.
쾅-!
거인의 몸뚱이가 마법진과 충돌하는 순간, 거대한 굉음과 함께 거인이 튕겨져 나갔다.
바닥에 처박힌 거인은 몸을 일으키며 마법진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지만, 그저 쾅! 쾅! 하는 굉음만이 울려 퍼질 뿐.
마법진은 단 1의 미세한 흔들림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소용없어.”
제로는 마법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악하는 거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마법진은 일반적인 물리력으로는 부술 수 없다.
제로가 지닌 사마력의 80%를 쏟아부어 만들어 낸 것으로, 저것을 부수기 위해서는 최소 마스터 레벨의 공격이 필요했다.
“그러니 그냥 사라져.”
■■ ■■■ ■ ■■ ■■.
■■■ ■ ■■■ ■■ ■.
제로의 입에서 영창이 시작되자, 마법진으로부터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거인은 갑작스레 나타난 폭풍에 더욱 난폭하게 날뛰며 마법진을 부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 ■ ■■■ ■ ■ ■■. 멸망의 폭풍.”
콰가가가가-!
영창이 끝나고, 마법이 발동되었다.
마법진의 중심에 머물고 있던 폭풍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며 거인을 집어삼켰다.
폭풍의 내부는 언데드도 버틸 수 없는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휘몰아쳤다.
그 영향으로 폭풍에 휩쓸린 거인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그아아아아아-!
멸망의 폭풍에 죽음이 확정된 거인이 괴성을 내질렀다.
아무리 그것의 동력원이 잿빛 마탑의 보물이며. 그 보물의 힘으로 버그와도 같은 생명력과 재생력을 지녔다 한들 소용없었다.
만일 거인을 만든 존재가 네크로 마스터 베드로이고, 보물의 힘을 100% 끌어냈으면 모를까. 마스터의 경지에도 오르지 못한 배신자는 보물의 힘을 100% 이끌어 내지 못했다.
그것이 요인이 되어 거인은 제로가 시전한 멸망의 폭풍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
멸망의 폭풍이 가라앉으며, 거인이 서 있었던 자리에는 잿빛 기류가 담긴 투명한 다이아몬드만이 덩그러니놓여 있었다.
제로가 땅에 떨어져 있는 잿빛 마탑의 보물을 쥐어 드는 순간이었다.
[멸망의 폭풍의 사용으로 하루 동안 모든 능력치가 50% 감소됩니다.]
[멸망의 폭풍의 사용으로 레벨이 3 감소합니다.]
“끙.”
제로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창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하루 동안 모든 능력치의 50% 감소에, 레벨 다운까지.
고작 영혼석을 얻기 위해서 한 일치고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점차 레벨이 높아질수록, 레벨업을 하기 힘들어지는 것은 로스트 월드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레벨이 3이나 감소한 것은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에휴. 내 팔자가 그렇지 뭐.”
깊은숨을 내쉰 제로는 의태의 반지를 끼며 움직였다.
그래도 달리 생각해 보자면, 언데드 제작에 필요한 1회성 던전을 발견했고 영혼석도 획득했다.
그 사실에 위안을 삼으며 배신자의 은신처를 빠져나간 제로였으나….
“니들은 또 뭐냐?”
제로는 백인의 무덤에 진을 치고 있는 유저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로를 포위하듯 에워싼 유저들은 하나같이 성기사나 성전사, 사제 따위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가슴팍에는 새하얀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새하얀 십자가는 길드 신성의 상징.
즉, 제로를 포위하고 있는 유저들은 신성 길드에 속한 유저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신성 길드의 유저들을 해치며 누군가가 앞으로 나왔는데….
“오랜만이다? 이 개새끼야.”
앞으로 걸어 나온 유저는 과거에 제로에게 한 번 털린 적이 있었던 매드독 길드의 길드 마스터, 젠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