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툭. 툭. 툭.
의자에 앉은 강한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질수록 강한의 미간은 더더욱 찌푸려졌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속삭이듯 중얼거린 강한의 두 눈은 책상을 향했다.
정확히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낡아빠진 회중시계를 응시했다.
한때 찬란한 은빛을 머금었던, 그러나 지금은 검게 변색되어 버린 그것의 이름은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다.
이것을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여전히 강한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시간의 신전이라는 초고레벨 유저 전용 던전.
가장 먼저 클리어한 보상으로 획득했을 땐,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막상 옵션을 확인해 본 순간, 드높은 기대는 실망감으로 변질되었다.
옵션 불명.
효과 불명.
설명 불명.
그저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라는 이름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아이템이었기에, 처음에 강한은 이것이 미구현된 아이템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설마 이런 효과가 있었을 줄이야.”
강한이 중얼거렸다.
시간 회귀.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현재 자신이 있는 방.
그리고 방을 찾아왔던 황 집사와 눈앞에 놓인 모니터에서 보여 주는 정보들까지.
수많은 증거를 앞두고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에 불과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정리한 강한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기억이 맞다면 로스트 월드는 오늘을 기점으로 3년 뒤에 서비스를 종료한다.
그 뒤로 유저들은 게임 속 능력을 현실에서 지니게 되며.
잇따라 하늘이 열리고 허상계의 침입이 시작된다.
허상계의 침입이 시작되고.
게임 속 능력을 각성해 스스로를 플레이어라 칭했던 사람들을 포함해 지구의 전 인류가 멸망하기까지 단 1년이란 시간밖에 흐르지 않는다.
즉, 인류의 멸망까지 4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으음.”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강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계로 향했다.
로스트 월드의 오픈까지 앞으로 30분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고작 3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정해야 했다.
다만.
“엘레멘탈 워리어는 아니야.”
강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엘레멘탈 워리어.
물론 직업 자체는 매우 좋았다.
강력한 히든 클래스에, 불꽃과 물. 대지와 바람의 속성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그 직업은 확실히 뛰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물량 앞에는 장사 없었지.”
로스트 월드 속에는 강한의 엘레멘탈 워리어보다 더욱 강하고, 더욱 좋은 직업들이 분명 존재했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허상괴들의 압도적인 물량을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씩 죽음을 맞이했다.
“역시….”
꽈악!
강한이 크로노스의 회중시계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네크로맨서밖에 없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물량에는 물량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가장 좋다.
비록 네크로맨서 또한 히든 클래스였지만, 과거에는 전직 방법이 공개된 히든 클래스 중 하나였다.
거기에 몇몇 히든 피스를 획득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다만, 네크로맨서는 직업 특성상 일대 다수에 특화된 직업.
초월적인 강함을 지닌 개인을 상대하기에는 상성상 맞지 않다.
또한 전직을 하기 위해 달성해야 하는 조건을 생각해 본다면, 네크로맨서는 확실히 유저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뭐, 그래도.
“그건 랭커들이 알아서 하겠지.”
인류가 패배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허상괴들을 상대하기 위한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부족한 숫자를 자신이 메꾼다면, 나머지는 랭커라 불리며 강함을 드러냈던 놈들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강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캡슐을 향해 걸어가며 강한은 다짐했다.
다시 한번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과거와 같은 패배는 또 다시 경험하지 않겠다고.
그러기 위해선….
“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질 거야.”
* * *
로스트 월드에 접속하기 무섭게 눈앞의 풍경이 이리저리 변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과 동시에 사방에서 튀어나온 흙이 뭉쳐 대지를 만들고, 그 대지에선 푸른 초목들이 자라났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그치면, 눈앞엔 하나의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졌다.
뺨을 간질거리는 바람의 감촉, 하늘 높이 떠 있는 태양이 내려 주는 따스한 빛.
지금까지의 가상 현실 게임들과는 차원이 다른 현실감에 강한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두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허공에 떠 있던 강한의 육신이 천천히 만들어진 땅에 내려섰다.
강한이 내려오기 무섭게 주변에서 초록색 빛무리가 뭉쳐 들더니, 곧 자그마한 요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등에 달린 두 쌍의 날개는 곤충의 그것을 닮았으며.
푸른빛을 띠는 눈동자와 머리칼은 드넓은 대해를 연상시켰다.
은은한 달빛이 깃들어 있는 옷을 걸친 그것은 말 그대로 요정이었다.
다만….
“잃어버린 세계, 로스트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요정의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목소리 또한 상당히 무기질적이라, 말 그대로 AI. 그 이상도, 이하의 느낌도 주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똑같아.’
대부분이 게임들이 유저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친숙히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로스트 월드의 튜토리얼 NPC는 확실히 이례적이었다.
다만 강한에게 있어선 튜토리얼 NPC가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이것만 제외한다면 로스트 월드는 말 그대로 또 하나의 세계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현실감이 넘쳐흘렀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냐. 진행해 줘.”
“알겠습니다.”
딱-!
강한의 말에 대답한 요정이 손가락을 튕겼다.
둔탁한 울림이 퍼짐과 동시에 하늘에서 하나의 거대한 청동 거울이 떨어졌다.
“흠.”
청동 거울에 내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에 강한이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회귀 전에는 로스트 월드에서의 외형과, 아이템들을 착용해 자신이 어떤 얼굴이었는지조차 잊어 먹기 일쑤였다.
그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이런 식으로 다시 한번 자신을 마주하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외형 설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유저 분께서 변경할 수 있는 외….”
“이대로 해 줘. 이름은 제로.”
“외형 변화 완료. 플레이어 네임 제로, 확인하였습니다.”
이미 로스트 월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강한에게 있어 이러한 것은 시간을 잡아먹는 행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강한은 최대한 빠르게 스킵할 수 있는 것은 넘기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류는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스타팅 포인트를 설정하겠….”
“6번째 마을.”
“확인하였습니다. 잃어버린 세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쟁취할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요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한의 신형이 환한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눈앞을 가린 빛무리가 걷히며 드러난 모습은….
우와! 이게 진짜 게임이라고?
현실감 미쳤네.
야야! 얼른 움직이자.
6번째 마을의 중앙에 자리 잡은 분수대.
그 앞에서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유저들은 타 게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로스트 월드의 현실감과 리얼리티에 다양한 반응을 내비쳤다.
강한 아니, 제로는 그러한 유저들을 지나쳐 마을 내부를 거닐었다.
이미 게임에 접속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강한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에 관한 정보가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었다.
개중에서 첫 번째 목표는 당연하게도.
‘네크로맨서로의 전직이다.’
히든 클래스, 네크로맨서.
그것으로의 전직이었다.
다만 전직은 시작의 도시에서 가능하기에, 우선은 네크로맨서의 전직 조건을 달성해야 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는 생각과 계획을 정리하며 움직인 제로가 도착한 장소는 마을 남쪽에 자리 잡은 푸줏간이었다.
딸랑.
“어서 오게나.”
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푸줏간 주인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스트 월드의 NPC들은 하나, 하나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 봐도 무방했다.
특히나 로스트 월드는 그 자랑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NPC들의 이름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덕분에 유저들은 상대가 NPC인지, 유저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못 보던 얼굴이군. 이번에 새로 온 여행자인가?”
“그렇습니다.”
푸줏간 NPC의 질문에 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막 이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나저나, 혹 제가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껄껄! 자네는 여행자치고 상당히 예의 바르구먼. 그래, 도울 일이라고 했나? 안 그래도 요즘 여행자들이 넘쳐나서 토끼 고기가 부족하다네. 자네가 좀 구해다 주겠나?”
[퀘스트-토끼 고기를 구하라(E)가 생성되었습니다.]
E급 퀘스트.
퀘스트의 난이도가 E급에서 S급까지 나뉜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말 그대로 초보자를 위한 퀘스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제로가 이 퀘스트를 받기 위해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퀘스트-토끼 고기를 구하라(E)를 수락하였습니다.]
“껄껄! 이거 참 고마운 여행자로구만. 그럼 이걸 받게나.”
퀘스트를 수락하기 무섭게 푸줏간 NPC가 제로에게 하나의 칼을 건넸다.
마치 중식도와 같은 모습의 그것은 도축용 칼로, 푸줏간에서 발행하는 퀘스트를 첫 번째로 받는 유저에게 지급되는 아이템이었다.
일종의 히든 피스였다.
다른 게임과는 다르게 목검 같은 아이템도 지급해 주지 않는 로스트 월드였기에, 도축용 칼은 초반 사냥에 매우 쓸 만했다.
제로의 목적은 당연하게도 도축용 칼이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도축용 칼을 받아 든 제로는 망설임 없이 푸줏간을 빠져나갔다.
“준비는 갖춰졌어.”
남문을 빠져나온 제로가 중얼거렸다.
네크로맨서로 전직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악명을 쌓아야 한다.
다만 초보자가 악명을 쌓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같은 유저를 PK해서 악명을 쌓는다고 해도, 마땅한 무기 하나 없는 상태에선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렇다고 마을 내에서 악명을 쌓자니 초보자 마을에 상주하는 경비병들 때문에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이걸 받은 거지.”
제로는 손에 쥐어진 도축용 칼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푸줏간에서 받은 퀘스트? 제로는 당연하게도 클리어할 마음이 없었다.
그저 도축용 칼을 얻기 위해 받았을 뿐이다.
이것으로 소량의 악명이 쌓이겠지만, 그마저도 네크로맨서로의 전직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남문 근처에서 열심히 토끼들을 사냥하고 있는 유저들을 훑어본 제로가 움직였다.
사냥에 열중이던 유저들 중 몇몇은 시작부터 도축용 칼을 가지고 있는 제로에 놀람을 표출하거나. 시기심을 드러냈다.
그마저도 아니면 핵유저로 의심하거나 했으나, 제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움직인 제로는 토끼 밭을 넘어, 6번째 마을 옆에 있는 울창한 숲에 들어갔다.
울창한 숲.
사슴과 늑대가 서식하는 사냥터로, 말 그대로 숲이었다.
PK를 위해 이 숲을 선택한 이유는 별거 없었다.
숲이라는 특성상 몸을 숨기기 쉬웠으며, 탁 트인 토끼 밭과 달리 머더러가 되어 역으로 사냥당할 위험이 확연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한, 울창한 숲이 있기에 제로는 시작을 6번째 마을에서 했다.
한편, 로스트 월드가 오픈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게임강국이라 불리는 한국답게.
벌써부터 울창한 숲에는 사슴과 늑대를 사냥하는 유저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럼 시작해 볼까.”
사냥에 열중인 유저들을 보며 제로가 움직였다.
지금부터의 행보는 수많은 유저들에게 욕을 얻어먹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로는 물러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미래에 일어날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