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장. 재앙을 먹어치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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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용하는 기도실에 있던 퀴벨레의 여신상이 상서로운 빛을 내뿜고 있다. 퀴벨레의 신도들. 그러니까 엘프들이라면 당장 무릎 꿇고 찬양을 시작할 정도로 대단한 신성력이었지만 어차피 그 정도 힘은 직접 일으킬 수도 있는 난 차분히 대답한다.
"그래서, 엘프들을 임신시켜달라는 겁니까?"
[결론을 말하자면 그렇지. 이왕이면 많을수록.........]
"곤란합니다."
세상에는 하프라는 게 있다. 하프 엘프나 하프 드워프. 같이 이종족의 피가 섞였을 때 등장하는 존재들.
흔히 하프 엘프를 일반적인 엘프의 사생아라고 부른다. 이는 인간과 관계하면서 엘프의 피가 열화(劣化)되기 때문인데 그렇기에 하프엘프는 엘프보다 낮은 친화력과 엘프의 절반도 채 안 되는 수명. 그리고 약간이지만 떨어지는 지능과 미모를 가지게 된다.
'반대로 인간 입장에서는 좋지.'
하프엘프가 엘프보다 열등하다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뛰어나다. 보통의 인간보다 빼어난 미모와 친화력을 가지고 수명 역시 인간의 수배 이상 긴 데다 늙을 때까지 20대의 외모를 유지하게 되니까.
이는 엘프가 인간보다 상위종(上位種)이기 때문이다.
엘프는 인간보다 상위종이다. 드워프 역시 인간의 상위종이고 용종의 경우는 인간을 벌레로 밖에 보지 않을 정도의 초월종.
때문에 대부분의 상위종들은 인간과 관계하는 것을. 그리고 그래서 자식을 낳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실제로 골드 드래곤 에레스티아는 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자 날 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신족은 당연히 모든 종족을 압도하는 궁극의 종족이다. 심지어 나는 그 피를 완전히 각성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초월종인 용종조차도 나의 피를 이으면 다른 용들보다 강대한 신룡족(神龍族)이 된다.
[왜 안 된다는 거지? 너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을 텐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제가 지금까지 여성들을 임신 안 시킬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제 피는 모든 종족의 힘을 진화시킵니다. 아마........ 엘프들이 저의 아이를 가지면 하이 엘프(High Elf)가 태어나겠지요."
신혈을 가진. 아니, 이미 신이나 다름없는 내 정액은 그것만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일종의 영수(靈水)나 다름없지만 그것이 수정에 성공하여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만들면 그 종족을 부흥시키는 게 가능할 정도로 막강한 핏줄이 태어나게 된다.
이미 다 사멸하여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하이엘프나 드워프 엠퍼러(Dwarf emperor). 그 피가 흐려질 대로 흐려졌다는 신룡족. 이제는 거의 멸종이나 다름없는 신족과 고위 마족. 혹은 천사들까지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태어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몬스터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알리시아 같은 라미아나 세이린 같은 아라크네들은........ 뭉뚱그려 몬스터 로드 뭐 이런 식은 아닐 것 같은데.'
그뿐이 아니라 레나 같은 웨어 비스트 타입. 그러니까 아인종이나 팔미호 연화 같은 요괴들 역시 원래의 종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가 태어날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이니까.
[무분별한 임신은 싫다는 건가?]
"당연하죠. 자랑 같기는 하지만 제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여성은 너무나도 많아요. 그 욕구를 하나하나 다 들어주다간....... 농담이 아니라 이 대륙. 어쩌면 동대륙까지 제 아이들이 몽땅 집어 삼킬 겁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 생각을 했던 건 아니다. 맨 처음에는 근처에 있는 수많은 여인 중에서도 정실에 가장 가까운 드래곤들이 일단 임신을 하면 긴 시간동안 칩거에 들어가야 하니 다른 여인들을 먼저 임신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드래곤 로드가. 웨어 비스트 로드들이. 더불어 엘프나 드워프(놀랍게도 여성체 들은 꽤 귀여웠다. 하나같이 로리라는 게 문제지만........)들 조차도 찾아와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상황이 되자 내 핏줄이 가지는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던 것.
그리고 내 거절이 반복되자, 마침내 신으로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키벨레까지 이러고 있는 것이다.
[너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지금 엘프들 중에는 하이 엘프가 사멸해 제대로 내 뜻을 이을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걸 감안해 다오.]
"하지만 그렇다고 멸종하거나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엘프만 편애하니까 종족신이라는 말을 듣는 거라고요."
[으음. 정말 안 되느냐?]
"저도 안타깝지만 그걸 승낙하면 다른 분들 부탁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별거 아니라면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 자식을 만드는 문제인데."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해도 안 돼?]
"스스로 못 이룰 소원이 없는데요."
그녀는 신이고 나는 그녀를 [모시는]신관의 입장이지만 사실 난 신들을 그리 어려워하는 편이 아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미 난 신위(神位)를 얻어낸 데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 자리에 도전할 수 있다.
물론 정작 도전을 해도 패할 확률이 높기는 하다. 총체적인 스텟에서야 그들을 앞설지도 모르지만 신들은 그들에게 특화된 세 개의 절대권능을 가진데다가 신으로서 긴 시간 살아온 그들에게는 당연히 연륜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차피 물질계로 못 내려오니 상관없다는 말이지. 신벌도 나에게는 어림도 없고.'
과거 천신과 마신에 의해 진압 당했던 신들은 오직 신계에만 거주할 수 있으며 물질계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극히 제한된다. 막말로 내가 그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해 신들이 지상계에 가장 빈번히 사용하는 기적. [신벌]을 사용한다 해도 나는 당당히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부탁한다.]
"........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명색의 신. 게다가 오대신 중에서도 까칠하기로는 수위를 다투는 그녀였던 만큼 이런 저자세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말해줄 수 없다. 다만 하이 엘프들이 반드시 필요한 건 사실이야.]담담하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목소리는 진중하다. 내가 신들에게 휘둘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통합교황인데 이렇게 진지한 요청을 무시하는 것도 너무한 일이다.
"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게요. 다른 분들하고도 이야기 해 봐야 할 것 같고요."
[고맙군. 소망이 있다면 언제든지 기도해라.]그렇게 말하고 떠나간다. 떠나간다, 라고 표현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신상에서 몸을 빼낸 것이기에 신상에서 신성한 기운이 사라진 정도다.
"무슨 일이야? 신계도 뭔가 복잡한 일이 많나?"
그러나 신안으로도 신계를 엿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어서 별다른 짐작은 불가능했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도실에서 나온다. 기도실 밖에는 키벨레 교단의 추기경인 세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키벨레 교단의 추기경직을 맡고 있는 세리아는 흔히 청발이나 녹발을 가진 다른 엘프들과 다르게 흔치 않은 금발을 가진 늘씬한 미녀였다. 그녀들에게 있어 금발은 하이 엘프의 피가 희미하게나 남았다는 증거라고 하니 엘프 중에서는 가장 높은 귀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기다릴 필요는 없었는데."
"키벨레님을 만나시는 자리를 지키는 것은 저에게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여기 과일주스."
"아 고마....... 아 뜨거!"
"교황님!?"
내가 갑자기 허리를 꺾으며 괴로워하자 세리아가 깜짝 놀라 나를 부축한다. 그리곤 과일주스를 다시 확인하지만 당연히 과일주스가 뜨거워서 그러는 건 아니다. 과일주스는 살짝 얼려 놓은 상태라서 얼음이 동동 떠 있을 정도니까.
"아, 미안. 그 뭐냐........ 훈련 중이라서."
"훈련 말입니까?"
"그래. 지금도 내 심상세계에서 불의 마신을 만들어 전투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거든. 거기서 당했더니 고통이 역류한 거야."
되도 않는 개소리였지만 세리아는 눈을 초롱초롱 빛낸다.
"교황으로서 모든 책무를 다 하면서도 끊임없이 노력을 하시다니........ 하지만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아 미안미안. 시간이 별로 없어서."
나. 그러니까 로안 필스타인이라는 존재는 못하는 것 없고 안 되는 게 없는 인간의 이미지라서 이런 개소리를 해도 다 먹힌다. 아니, 오히려 이런 소리를 하면 [역시 저런 노력을 하니 저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거구나.]하고 알아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도, 내가 뜨거움을 느낀 건 심상세계에서 불의 마신과 싸워서 그런 게 아니다.
'그래도 다행이군. 화염면역은 소용이 없어도 생명력은 어느정도 효과를 발휘한다는 걸 알아서.'
"그래봐야 공격 수단이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인데....... 에고 힘들어. 폐가 타버렸다가 재생하는 느낌이 참 쫄깃하군."
나는 서해바다의 한 무인도에서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해면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저 멀리에는 활활 불타고 있는 거대한 불의 새가 보인다.'그나저나 반응이 신기하군. 저 불사조 녀석........ 아무래도 지능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봐야 돌고래 정도인 것 같기는 하지만 확실히. 지금 저거 봐. 내가 영역 밖에 있으니 공격하지는 않으면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 유품이라고 하면 다 시스템에 맞춰 움직이는 기계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렸던 모양이야."
로안과 지훈이 대화한다. 물론 그렇다고 인격이 두 개가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 이건 말하자면, [대화]라는 수단을 통해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 말이야. 저 녀석이 기계가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라면........ 호의를 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흥미로운 말이지만 뭔 수로?"
보통 짐승에게 호의를 이끌어 내려면 먹이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자체적인 에너지로 영구히 활동하는 유품들은 너무나 당연히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핵발전소와 같아 무진장의 에너지를 생산해 내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해준다면?'
"글쎄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 봐야 사명 밖에 더 있나? 게다가 이 정도 생각을 다른 사람들이 안 해 봤을 리 없을 텐데."
일반적으로 유품들은 사명. 혹은 철학이라는 것을 가지며 그것은 그들이 존재에 방향성을 부여한다. [전쟁을 막는다]는 사명을 위해 날아다니는 슈퍼스카이나 [불쌍한 자들을 돕는다.]는 사명을 가지고 비를 내리거나 홍수를 해결하는 소잉카처럼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
그러나 그런 목적을 도와준다고 유품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표시했다는 정보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사명은 어디까지나 밀리언들이 정해 놓은 것이지 유품 스스로가 원하는 일은 아니다. 단지 자신이 태어난 목적이기에 절대 거스르지 않고 하는 느낌이랄까?
'하긴 게다가 저 불사조 녀석은 주변 모든 존재를 말살하는 게 사명이라면 사명인데 같이 죽이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기분 좋게 만드는 정도라면 가능하겠지만........'
"기분 좋게?"
'......... 기분 좋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행되다가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결론은, 내가 너무나 잘 하는 종류의 일이다.
"하지만 접근이 불가능하잖아? 50미터 내로 접근하면 공격 문제가 아니라 그냥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 몸에 불이 붙는데."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저 불새 녀석은 D급이나 C급에 불과한. 아주 낮은 등급의 유품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온전한 하나. 네버랜드에게 능력을 부여받은 수많은 존재들 중 하나인 나로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 사실 그 앞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네버랜드에게 필요 이상으로 많은 힘을 받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
'손만 잡아도 보내 버릴 수가 있는데.'
"하지만 그 정도로도 안 돼. 가까이 가기만 해도 타는데 접촉했다가 뭔 일을 겪으려고?"
쌍생을 네버랜드와 현실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현실에서 [즉사]하는 상황만은 피해야 한다. 동시에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몸이 사라지면 네버랜드에 존재하는 로안이 과연 무사할지 장담할 수 없다. 내가 타임슬립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로안이 돌려줄 수 있는 정도가 한계인 것이다.
'그럼 손도 발도 대지 않고 기분 좋게 하는 기술을 연마하면 되겠군.'
"수단은?"
'수단이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행되던 생각이 결론을 맺는다.
"그야 눈빛이지."
'그야 눈빛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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