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로 걷는자 캔슬러-144화 (144/283)

< --14장. 기연. 기연. 기연.

-- >

타이탄이었다.

[그나저나 이 자식! 들어오자마자 치면 어떻게 해?]

화가 난다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내심 놀랐다. 왜냐하면 타이탄에 아무도 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타이탄이 말도 하잖아?"

내 의문에 타이탄이 슥 얼굴을 내민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타이탄이 어떻게 말을 하냐?]

너무나 태연한 대답에 황당해 한다.

"지금 말하고 있잖아?"

당연하다고 생각한 말인데 녀석이 듣기에는 아니었는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모욕이다! 나는 타이탄 따위가 아냐! 나는 이 하네스트(Hanest)를 움직이는 제어정령 라이카다!]

"그걸 굳이 구분하는 거야?"

[당연하지! 그럼 네가 타이탄을 타면 네가 타이탄이야?]

길길이 날뛰는 걸 보면 제법 민감한 문제인 모양이다. 뭐 어쨌든 중요한 건 녀석이 이 지하유적에 있다는 거겠지만.

"그나저나 넌 여기서 뭐 하는 거냐?"

[타이탄이 뭐 하겠어? 주인이 될 녀석을 기다리는 거지.]

"자격이 뭔데?"

[하여튼 넌 불합격이야!]

뚱한 목소리에 피식하고 웃는다. 이런 적대적인 반응은 오랜 만에 보는 거라 꽤 신선하다. 어쨌든 이 로안이라는 몸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 전체가 나에게 친절해서 자신감 과잉이 되 버릴까 걱정될 정도니까.

"그럼 잘 있어."

지하유적에 타이탄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가차 없이 몸을 돌렸다. 정말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내 태도에 놀란 라이카가 깜짝 놀라 소리친다.

[자, 잠깐! 어디 가!?]

"어디가긴. 집에 가지. 일이 바빠서 쓸데없는데 낭비할 시간이 없어."

[나, 낭비라니! 지금 이거 안 보여? 타이탄이야! 만드는데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서  어지간한 강국에도 세대가 넘지 않는다는 타이탄! 제발 조종사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거 아냐?]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 있어."

[........ 뭐?]

"있다고. 타이탄."

태연한 말에 라이카가. 정확히 말하면 녀석이 조종하는 타이탄이 휘청거린다. 아마 당혹의 뜻이겠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소리친다.

[거, 거짓말 하지 마! 어떻게 네가 타이탄을.......]

"와라 오딘."

끼이익----!!!

공간이 찢어진다. 그리고 라이카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그러니까 약 10여 미터 정 도의 신장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몸을 가진 거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법 폐인이라 불릴 정도로 마법에 심취해 사는 궁극의 대마법사. 골드 드래곤 에레스티아가 만든 오딘이었다.

[이, 이게 뭐야?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마력량........]

라이카는 오딘에서 전해지는 압력에 뒷걸음치며 신음했다. 그 역시 타이탄을 제어하고 있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타이탄. 하네스트와 내 오딘은 그야말로 격이 다른 물건이다. 하네스트는 인간 마법사들과 드워프 기술자. 그리고 엘프 정령사들이 힘을 합해 만든 물건이지만 그래봐야 초월자인 에레스티아의 솜씨를 당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대마법사인 동시에 뛰어난 기술자이기까지 한 것이다.

"돌아가."

팟!

그러나 더 압박하는 대신 재빨리 오딘을 돌려보낸다. 사실 오딘은 완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뽀대용이야. 알았지?]

에레스티아는 말했었다. 물론 지금의 오딘도 소환과 탑승이 가능하며 움직이는 데에도 문제가 없지만, 그럼에도 오딘은 진정한 타이탄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와 마법적인 문제는 모두 끝났지만 오딘을 통제하는 제어정령이 없는 것이다.

물론 대마법사인 에레스티아는 궁극의 정령술사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오딘이 너무나 강력한 기체라는데 있었다.

기본적으로 제어정령이라는 건 인공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정령계에서 불러들인 정령을 강제로 타이탄에 묶어 그 시스템을 제어하게 만든 존재를 말한다. 그런데 오딘은 몸 전체가 오리하르콘을 포함한 온갖 레어메탈의 집합체이자 수십 수백 개가 넘는 마법으로 유지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최상급 이상의 정령만이 제어하는 게 가능한 것.

그런데 최상급 정령쯤 되면 정령계에서도 많지 않은 숫자이기 때문에 함부로 납치해 타이탄에 묶어버리는 게 불가능하다. 물론 대마법사인 에레스티아라면 납치에 가까운 행패를 부려 강제로 주저앉힐 수도 있겠지만 그딴 짓을 했다가는 정령계와 정면으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런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지.'

때문에 에레스티아는 나에게 오딘의 제어권을 주면서도 오딘이 반쪽짜리 타이탄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제어정령이 없으니 조작 난이도가 높아 전투 같은 고차원적인 행위를 할 수 없어서 폼으로 돌아다니거나 물건을 옮기거나 하는 데에만 쓸 수 있다고 했다.

"어쨌든 이야기 끝났지? 간다."

[자, 잠깐만. 그럼 난 언제까지 이런 데 있으라고?]

"네가 내 타이탄도 아닌데 신경 써 줘야 해?"

당연한 말이지만 끌려가는 입장은 딱 질색이다. 귀여운 소녀가 그래도 해줄까 말까인데 이런 생물도 아닌 무생물한테 자비로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저, 저기 말이야. 사실 너는 시험에 합격이야. 사실 조건이 되지 않으면 저 문이 열리지 않거든.]

"부수고 들어왔는데?"

[조건이 충족되어서 그래. 그리 간단한 문이 아니라고. 게다가 네 몸에서 느껴지는 힘도 넘칠 정도로 강하고. 느낌도 좋고.]

나름 칭찬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난 요새 칭찬을 너무 많이 들어서 어지간한 칭찬은 칭찬으로 들리지도 않는 상태였기에 고개를 흔든다.

"칭찬 고마워. 하지만 미안. 그럼 안녕~"

주르륵 말을 토해내고 빙글 몸을 돌려 문으로 나간다. 그러자 결국 라이카가 매달린다.

[아 왜 이러세요. 주인님~~! 계약 좀 해 줘요! 한 사람이 두 타이탄하고 계약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어지간히 갇혀 있는 게 싫었던지 징징대는 녀석의 모습에 웃는다. 이미 문을 열었으니 나가면 되는데 이런다는 건 뭔가 금제가 걸려 있다는 뜻이겠지. 솔직히 맨몸으로 타이탄을 이길 수 있는 나는 타이탄이 필요 없는 수준이지만, 부자들이 스포츠카를 사 모으는 것처럼 타이탄이 있어도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가고 싶어?"

[그걸 떠나서 배가 너무 고파! 300년을 굶었더니 마나 맛이 뭔지 기억도 안 난단 말이야!]

그의 말에 나는 그제야 녀석이 정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문에 나는 물었다.

"너 속성이 뭐야? 등급은?"

[전기 중급 정령. 왜?]

의문을 표하는 녀석에게 답한다.

"아 좀 생각난 게 있어서. 그나저나 난 전격 속성 피스가 없는데 괜찮아?"

[정령계약이 아닌 타이탄 계약이니 상관없지. 계약 해 줄 거야?]

"대신 실체화 해봐. 솔직히 난 중급 정령을 상대해 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지만....... 은총을 내려주지."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지만.]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기잉- 하고 타이탄의 움직임이 멈추더니 파직파직 전기를  뿜어내고 있는 쥐가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 중급 정령은 실체화를 해도 거의 만지기 어려울 정도로 밀도가 떨어지지만 녀석은 타이탄의 마력을 사용하는 만큼 제대로 실체화 하고 있다.

"다행이군. 실체화 수준이 괜찮아. 그럼 이번에는 여자. 그중에서 미녀로 변해봐."

[너, 너 뭐 하려는 거야? 혹시 변태?]

뜨악하는 녀석의 반응에 확신한다.

'정령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잃었군.'

그렇다. 제어정령이라는 건 그냥 멀쩡한 정령을 타이탄에 가두는게 아니라 정령을 특수한 마법으로 가공한 존재기 때문에 상당히 변질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녀석이 일반적인 정령이었다면 절대 나에게 뻗대지 못한다. 내 친화력에 취해 절로 굽히는 마음이 들게 되니까.

'하지만 에레스티아는 이게 잘못된 방식이라고 했었지.'

정령은 정령 본연의 힘을 가질 때 가장 뛰어나다. 다만 마법사들이 녀석을 이렇게 만든 건 그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이며 원하지 않는 정령을 강제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싫으면 나간다?"

[우우. 찝찝하지만........]

주먹두개 합친 정도에 불과했던 쥐가 순식간에 커져 소녀의 모습으로 변한다. 약간 어려보이는 외모였지만 충분히 미소녀에 가까운 만큼 아슬아슬 세이프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럼 시작하지."

<타이탄의 하네스트(Hanest)의 제어정령과 계약합니다!>

<100테라의 최대 마나와 1000테라의 가용 마나가 이전되기 시작합니다!>

하찮은 마나가 새어나간다. 뭐? 1000테라? 그것도 마나인가요? 그러나 그 마나가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웃....... 세, 세상에. 이 마나는.......!]

라이카는 농밀하게 스며드는 마나에 자기 몸을 꽉 껴안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정령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다 잃었다 해도 마나를 흡수했을 때의 감각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아니, 이제 그녀가 된 라이카가

[배고파!]

라고 떠들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어때?"

[굉장해. 오랜만에 식사를 해서 그렇다고 하기에도 이건 너무 엄청나잖아? 너 생각보다 더 대단...... 엣?]

뒤에서 몸을 안아 다리 위에 앉히자 흘러 들어오는 마나의 흐름을 음미하며 부르르 떨던 라이카가 당황한다.

[뭐, 뭐하는 거야?]

"걱정 마. 더 기분 좋은 걸 해줄게."

[거짓말 마. 이것보다 더 기분 좋은 게 세상에 있을 리 없어.]

단호한 녀석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분신을 꺼내든다. 그러자 녀석은 과거 니힐리티가 보였던 반응을 보였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방해 당하자 짜증을 내는 것이다.

[야 너. 아니, 주인. 취향 특이한 거 알겠고 충분히 감내해 줄 수 있지만 나중해 하면 안 돼? 나 지금 식사 중........ 하악---♡?!?!?]

푸욱. 하고 분신이 몸을 찔러 들어가자 파지지직! 하고 라이카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너무나 강렬한 쾌감에 일순간 정령력의 통제가 무너진 것이다. 만약 내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감전될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난 전격을 흡수까지 가능한 존재이다.

"어때? 정말 그것보다 좋은 게 세상에 없어?"

[자, 잠깐만. 이, 이 느낌은....... 으-----으! 헉------♡!?]

퍽! 퍽! 철썩!

자그마한 체구의 라이카를 번쩍 들어 거침없이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한다. 당황한 라이카는 잠시 버둥거렸지만 이내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신음과 함께 교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와, 와앗! 뭐야. 이거 뭐야........ 조, 좋....... 엄청나게 달콤한 마나가........ 머리가 이 상........ 흐아앗♡♡♡♡!!]

뭐 그 다음은 뻔하다. 그녀는 다른 정령들이 그랬듯 많이 기뻐했지만, 어쨌든 중급 정령이었던. 게다가 성의 있게 육체를 구성하지 못한 그녀의 몸은 그저 그런 리얼돌에 불과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노력해라."

[우우....... 왠지 분해........ 능욕 당했어.......]

투덜거리는 그녀를 보며 웃는다. 한층 성장해 키가 커진 그녀의 위로 익숙한 텍스트가 떠오른다.

<초월적인 성질의 마나를 주입하셨습니다! 제어정령에게 존재 보너스가 붙습니다!>

<제어정령의 정령력이 일정 수치를 넘어 상급 정령으로 진화합니다!!>

인간들이 만드는 타이탄의 제어정령은 보통 중하급에 불과하다. 어지간한 주문으로  상급 이상의 정령을 묶어놓기는 몹시 힘든 일이기 때문. 아마 상급 정령이 깃든 타이탄은 이 대륙에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딘도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난 이제 강력한 정령사이기도 한데 말이야.'

그러나 일단 최상급 정령을 소환한 다음의 일이었기에 일을 미룬다. 그리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되겠지.'

조급해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는 시간이 많으니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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