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뒤로 걷는자 캔슬러-96화 (96/283)

< --9장. 발현-- >

쏴아아아---!

조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찬물로 온 몸을 씻는다. 상태는 더 없이 상쾌하다.

"신기하네. 어째 몸이 점점 좋아지는 것 같은데?"

물론 근육이 생긴다거나 체력이 늘어나는 그런 걸 보고 놀라는 게 아니다. 근력운동과 조깅을 매일매일 하고 있으니 근력과 체력이 늘어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내가 신기해하고 있는 것은 그쪽이 아니라 내 몸을 망가트렸던 부상들이 점점 호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내 몸은 거의 누더기다.

샤워를 하다 슬쩍 거울을 바라보자 온갖 흉터로 가득 차 있는 몸이 보인다. 참으로 많은 사고가 있었다. 교통사고는 그야말로 부지기수였고 길가다 강도한테 습격당해서 죽을 뻔 했던 적도 있다. 그냥 걷다 넘어져서 부상을 입은 적도 있고 강풍으로 날아온 간판에 충돌해 입은 적도 있다. 사실 이정도로 다쳤다면 운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십 수 회의 치명상. 수십 회의 중상. 그리고 수백 번의 경상이라는 화려한(?)부상 전적은 내 몸을 심각할 정도로 상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달리다 보면 절단에 가깝게 끊어졌던 다리근육이 심각하게 당겨왔었다. 강도의 칼을 맞았던 복근도 윗몸일으키기를 할 때마다 욱신거리고 권투를 하다 보면 부러졌던 뼈들이 부어오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슬슬 괜찮아지고 있어. 고통에 익숙해져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좀 이상한데."

사실 오늘은 좀 무리하게 달렸는데도 몸 어디에도 아픈 곳이 없다. 오히려 힘이 넘친다고나 할까? 보름. 아니, 한 달 전부터 몸이 천천히 호전되더니 요새는 부상이 없는 정상인들보다 더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

이건 착각 같은 게 아니어서 알렌의 신전에서 확인해 보니 근력과 체력. 그리고 생명력이 30~40을 넘어선 상태다.

"거 참 특이하네."

신기해하며 집을 나와 근처 편의점으로 향한다. 어느덧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시간인  만큼 사람이 없었기에 가볍게 쉐도우 복싱을 한다. 요새 들어서는 권법보다 검법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라 권투를 배워도 큰 도움은 안 되지만 그래도 배우던 게 있어서 계속 하는 편이다.

"응? 저건 민정씨하고 보람이 아닌가?"

하지만 그러다 문득 아는 얼굴을 발견한다. 그녀들은 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자매. 보람과 민정으로 청수 체육관의 트레이너인 강현 형의 동생들이다.

다만 특이한 건 그들이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옆에는 험악한 얼굴의 사내가 동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뭐, 뭐야? 납치....... 분위기는 아닌데?"

현재 시각은 오후 9시. 야밤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상당히 늦은 시간이다. 제법 미녀라고 할 수 있는 여인들이 어두운 골목에 들어가기에 썩 좋은 시간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뜻밖에도 민정과 보람은 험악한 얼굴의 사내를 앞세워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다. 어째서인지 그 험악한 사내는 부상이라도 입은 듯 쩔뚝이고 있었다.

"따라가 봐야겠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그녀들의 뒤를 밟는다. 주위가 어둑어둑한데다 내 복장도 그리 밝은 색은 아니어서 들키거나 하지는 않았다.

우르르.

'응?'

그때 갑자기 나타난 5~6명 정도의 무리 때문에 몸을 숨긴다. 무슨 이유인지 전쟁이라도 하러 갈 듯 각목이라든가 야구배트 등을 들고 있다.

'뭐야. 깡패들끼리 패싸움이라도 하나?'

그리고 그렇다면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어쨌든 그 안으로 보람과 민정이 들어간 상태가 아닌가? 나는 주변에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왕이면 조용히 들어가 그녀들을 데리고 오자는 마음에 천천히 이동했는데....... 그러다 문득 소리를 듣는다.

퍼억! 퍽!

"크악!"

"씨발! 이 썅녀....... 컥?!"

"한꺼번에 덮쳐! 뭐 하는 거야 등신...... 켁!?"

그리고 드러난 광경은 비현실을 넘어 초현실적이다.

"하압!"

"악!"

"흡!"

"아 썅! 이런 개..... 크억!?"

보람의 칼날 같은 돌려차기가 허공을 가르자 덤벼들던 불량배가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튕겨나간다. 허공에 떠오르는 대여섯 개의 이빨은 그가 한동안 치과에 꽤나 많은 돈을 써야한다는 걸 가르쳐 주고 있다.

'이....... 게 뭐야?'

민정은 각목을 들고 주변에 있는 불량배들을 후려치고 있었는데 그 실력이 사뭇 비범 하다. 몸을 던져 엉켜들려고 하는 불량배의 얼굴을 찌르듯 후려쳐 정신 못 차리게 만들고 발차기로 남자의 중심축(!)을 차 버린다. 모든 동작은 그야말로 물이 흐르듯 부드러워서 그녀들이 수십 수백 번이 넘는 실전의 달인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커...... 억."

마침내 최후의 한 명이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나는 반사적으로 쓰러진 불량배의 숫자를 세 보았다. 하나 둘 셋 넷……열하나 열 둘 열 셋.

'세상에. 여자 두 명이 건장한 장정 열세 명을 박살내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라는 말은 필요 없다.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보람이 녀석 사범이라고 했었지만.......'

보람은 태권도 사범. 다시 말해 그녀가 최소 4단 이상의 실력자라고 했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정상이 아니다. 여자의 몸으로 대놓고 덤비는 13명의 불량배와 싸우는 건 태권도 4단 정도가 아니라 격투기 세계 챔피언이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후우. 힘들어."

민정은 각목을 늘어트리고 땀을 닦았다. 아닌 게 아니라 격한 움직임으로 땀을 상당히 흘린 상태. 보람은 근처에 쓰러져 있던 사내의 머리를 퍽 하고 걷어찼다.

"하여간 이 인간쓰레기들은 갱생의 여지가 없네. 여자를 강간하려다가 얻어맞은 주제에 뭘 잘났다고 안 오면 재미없다고 협박이야?"

보람의 말에 쓰러져 있던 불량배가 고개를 들었다. 녀석들도 설마 민정과 보람에게 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한 듯 치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이미 악과 깡만 남은 듯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크윽....... 킥킥. 썅년. 너흰 이제 죽었다."

"무슨 헛소......"

뭔가 불길함을 느낀 보람이 슬쩍 민정의 팔을 잡는 순간 인기척이 느껴진다.

우르르.....!

"여기! 여기야!"

"와 진짜 다 쓰러져 있네."

"킥킥. 병신들. 열 세 명이 몰려가서 여자 두 명한테 지냐? 나 같으면 가서 자살한다. 자살해."

"아오 김경원 저 병신새끼는 우리 학교 망신 다 시키네."

골목 건너편에서 한 무리의 불량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자 반대편에서도 비슷한 숫자가 몰려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나이들이 꽤 어려 보이는 게 고등학생 쯤 되는 나이대인 것 같았다. 불량서클이랄까.

'오메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이게 뭔 일이야.'

기가 막혀 헛웃음만 짓는다. 이건 서른이 넘는 숫자가 아닌가? 어지간한 고등학교 한 클래스의 학생을 다 모아놓은 규모에 순간적으로 기가 질린다. 이건 무술실력으로 해결을 볼만한 숫자가 아니다. 기관총을 들고 있다면 모를까 어림도 없는 수준. 과연 민정과 보람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얼굴이 흙빛이다.

"........ 뭐야 너희. 설마 쪽팔리게 이 숫자로 여자한테 덤비려는 거야?"

보람이 불량배들을 도발한다. 네버랜드 속에서처럼 내공이나 마법을 쓰는 것도 아니고 현실에서 이만한 상대와 싸우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량배의 리더로 보이는 녀석이 그녀를 비웃는다.

"뭐? 킥킥킥! 이 미친년이 진짜 골고루 하네. 그냥 지나가다 들린 거지 계집애들 때문에 이만큼 몰려올 것 같아?"

"글쎄. 그렇게 말해봐야 몇 명 얻어맞으면 다 덤빌 거면서. 어차피 너희 같은 인간쓰레기들한테는 자존심도 없잖아?"

"뭐? 이 미친년이 돌았......"

"아 잠깐만."

녀석이 으르렁거리는 모습에 불량배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선다. 어차피 더 숨어 있어봐야 별 소용도 없다. 다만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는 상태다.

"지훈아?"

"엑 오빠? 여기는 웬일이야?"

보람과 민정과는 제법 친해져 말을 놓은 상태다. 어쨌든 난 그녀의 목숨을 구했던 데다가 그녀의 오빠가 있는 체육관을 다니고 있으니 친해지는 데에 별 문제는 없던 것.  나는 포위된 채 바짝 긴장해 있던 민정과 보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에 한숨 쉬었다.

"그러는 너희야 말로 뭐하고 있는 거야? 여자 둘이서 불량배들이랑 싸우다니."

"아, 여기에는 좀 복잡한 사정이......."

"이 씨발이 날 쌩까? 그리고 넌 또 뭐......."

뻐억!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아채는 녀석의 면상을 후려치자 녀석이 끽소리도 못하고 쓰러진다.

"오, 오빠?"

"잠깐 지훈아 이게 무슨......."

그리고 그 돌발 행동에 민정과 보람조차 깜작 놀라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누구보다 놀란 건 바로 나였다.

"....... 어라?"

이건 내 원래 생각이 아니었다. 내가 핸드폰을 들고 이렇게 들어온 건 경찰에 신고 했으니 빠지라고 그들을 설득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니까. 그런데 그 두목을 이렇게 패 버렸으니 설득이고 뭐고 다 꽝이 아닌가? 그러나........

'어, 어라? 이건 뭐지? 왜 할 만하다고 느껴지는 거야?'

불량스러운 외모에 사납게 으르렁 거리는 깡패가 무려 서른이다. 거기에 두목이라는 녀석을 패버린 만큼 그 시선은 곱지 못한 상태.

사실 어지간한 강심장이라도 이런 녀석들에게 포위되면 두려움을 느낄 텐데 어쩐 일인지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 마치 키가 1미터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유치원생들 사이에 들어선 것처럼 그들이 연약하고 우습게만 보이는 것이다.

"이 미친 새끼가 돌았...... 컥?"

으르렁거리며 내 멱살을 잡으려던 녀석을 가볍게 후려치자 숨 막히는 신음과 함께 고꾸라진다.

"아 미안. 내 몸에 손대지 말아줄래? 불쾌하게 시리."

"........"

"....... 뭐, 뭐?"

민정과 보람은 물론 불량배들 전부가 할 말을 잃고 버벅이는 사이 나는 태연히 민정과 보람의 옆에 섰다. 불량배 녀석들과의 거리는 1~2미터 정도다.

'이상해.'

감정이 고양된다. 주변 모든 움직임이 피부에 닿듯 느껴지고 아무리 싸워도 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내가 그리 펀치력이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슬쩍 때려준 두 녀석은 인사불성이 되어 일어나지도 못한다.

'아, 확인을 위해서라도 한 번 싸워봐야겠는데.'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명백한 이상 상태다. 어쩌면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미친 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확고한 확신이 든다.

당연하지만 두려움 따위는 없다. 수틀리면 시간을 돌리면 되니까. 어차피 요즘은 워낙 마나가 많아서 하루 정도는 아무 때나 돌릴 수 있으니까. 하루의 시간을 돌려 게임 속으로 돌아가면(사실 24시간 중 20시간 이상을 게임에 투자하기 때문에 조금만 돌려도 게임 속이다.)현실에서 시간을 돌려도 게임 속의 마나를 소비하는 게 가능한 것이다.

"저기 우리 내기할래?"

"엑? 무슨 내기?"

"누가 더 많이 쓰러트리나 하는 내기."

그렇게 말하며 씩 하고 웃는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현실 파트군요. 한편 한편을 정말 아슬아슬하게 올립니다 ㅠㅠ 지금 막 쓴 따끈따끈 분량이요. 정말 아슬아슬하게 올립니다 ㅠ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