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네버랜드(Never Land).
-- >
다만
[추천요리 100선]
.
[연금기법]
.
[제약비법]
처럼 뭔가 만들거나 기술이 필요한 책들은 '암기 후 이해'가 아니라 '단순 암기'라는 메시지가 떴다. 하긴 요리 같은 걸 책으로 보고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리고 남은 건....... 이것들이군."
내 손에 들린 두 권의 책은 하드커버 양장본이다. 알 수 없는 생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갈색 책이었는데 화려한 문양의 금테로 장식되어 있다.
무려 500페이지나 되는 이 두 권의 책은 뭐라 말하기 힘든 기운을 풍기고 있다. 척 봐도 다른 수십 권의 책과 다른 가치를 지닌 물건. 표지에는
[카엘 투격술]
과
[천관 학파 초-중반 주문서]
라고 쓰여 있다.
"오 마법하고 무공인가?"
책을 살펴본다. 카엘 투격술이라는 책에는 이런저런 자세를 표현한 그림과 육체 단련 법이 실려 있고 검법과 권법. 각법 등 여러 가지 무공이 담겨 있었다. 무협지에서 흔히 나오는 '마음을 가다듬고 하늘을 떠올려라~~'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현대 스포츠처럼 기본자세와 거기에서 파형 되는 동작을 직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능(99)보정 실패! 카엘 투격술을 읽었습니다.>
"쉽지 않네."
페이지도 많은데다 마나의 유동방법. 아마 운기법(運氣法)이라 짐작되는 방법이 매우 난해하다. 어디의 혈도로 내공을 보내고 소주천에 대주천을 하는 방식을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전혀 다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주천하고 대주천은 있지만 단순히 기를 돌리거나 근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쓸 수는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지 메이킹(Image Making)이다.
단순히 마나를 오른손이나 왼손으로 움직이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마나를 구체적인 모양으로 형상화시켜 몸 안에서 움직인다고 상상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경지가 낮은 검사가 검에 예기를 증가시키고 싶을 때에는 삼각형으로 상징 화(Symbolization)시킨 마나를 검에 담으면 된다. 사각형으로 상징화시킨 마나를 피부에 주입해 방어력을 증가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원으로 상징화시킨 마나를 손바닥에 주입하면 타격 에너지를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 경지가 높다라면 선명한
[검]
의 이미지를 검에 보냄으로서 검기(劍氣)를 만들어낼 수 있고
[방패]
나
[갑옷]
의 이미지로 호신기를 일으킬 수 있다.
[대포]
의 이미지로 장풍을 쏘아낼 수도 있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선명하게 그려낸 이미지가 가지는 힘은 단순한 삼각형이나 사각형이 가지는 힘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어렵군. 전혀 체감을 못하니 이해는커녕 암기도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그건 마법서도 마찬가지여서 책을 세 번씩 읽어도 이해가 뜨지 않는다. 두 책을 10번씩 읽음으로서 간신히 이런 메시지가 띄우는 게 한계였다.
<지능(99)보정 성공! 카엘 투격술을 단순 암기하였습니다.>
"이건 가지고 다니면서 봐야겠군."
하지만 두 권의 책을 들고 난감해한다.
[카엘 투격술]
과
[천관 학파 초-중반 주문 서]
는 두껍고 무거워 휴대하기 불편하기 때문이다.
"무슨 놈의 게임이 인벤토리도 없냐......."
투덜거리다 방 한 쪽에 있는 주머니를 챙긴다. 버리기도 마땅치 않으니 가지고 가려는 것이다. 주머니가 그리 크지 않아 두 권이 다 들어갈지 모르지만 잘 구겨 넣는다면........
"어?"
하지만 쏙. 하고 사라지는 두 권의 책을 보고 깜짝 놀란다. 순간 이게 무슨 일인가 했지만 주머니에서 말풍선이 떠오른다.
[마법물품의 이해]
라는 서적에 실려 있던 정보다.
거인의 주머니.
공간주문이 걸려 있어 크기 이상의 물건을 담을 수 있는 마법의 주머니. F. E. D. C. B. A. AA. S. SS EX의 등급 중 S등급에 해당하는 보물이다. 담긴 물품의 1/1000의 무게를 가지며 5*5*5의 공간을 담고 있다. 생명체는 들어갈 수 없다.
"득템이다!"
전혀 생각지 못한 소득에 탄성을 내지른다. 딱 봐도 엄청 좋은 아이템. 심지어 인벤토리도 없는 네버랜드에서 마법주머니가 가지는 가치는 엄청나리라.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 게임의 기본 개념 중 하나를 알 수 있었다.
"그렇군. 형평성 따위는 없군."
보통의 온라인 게임에서는 모든 유저가 동등한 입장에서 게임을 플레이한다. 누가 더 유리한 입장에서 시작하거나 하는 건 없다. 물론 직업별 유리함이나 불리함 정도는 있을 수 있겠지만 누구는 100의 경험치가 있어야 레벨 업을 하는데 누구는 1의 경험치가 필요하다거나 누구는 만렙이 50인데 누구는 100이거나 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시스템 자체가 다르다는 거군. 하긴 빙의 시스템이면 모두 공평할 수가 없지. 가난뱅이로 시작한 녀석하고 부자집 아들로 시작한 녀석하고는 똑같이 초보라도 가진 골드의 자리수가 다를 텐데."
지구보다 10배 이상 크고 넓다는 네버랜드에는 수없이 다양한 NPC들이 존재하는 만큼 일단 빙의 시스템이라면 어디에 빙의할지 모른다. 시작하자마자 사방이 전쟁터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고 주변에 죄다 좋은 녀석만 있어서 도움을 받으며 살 수도 있다. 주사위를 굴려 정하는 능력치도 그렇지만 다 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 속에서 나는 상당히 유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모든 능력치가 99일 정도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모든 재능을 타고난 데다 육체도 강건하고 심지어 운까지 좋다. 어떤 녀석도 이렇게 좋은 시작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주머니를 들고 다니며 방안에 있던 물건들을 깡그리 담기 시작했다. 책장 가득히 있던 책들과 약초들. 옷가지 조금과 상당량의 식료품을 챙겼다. 건빵 비슷한 빵들과 훈제고기가 꽤 많이 있어 한동안 먹을 걸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무기 같은 건 없나? 무기?"
그러나 방을 다 털어도 장비류는 하나도 없다. 애초에 이 공간 자체가 비밀창고라기보다는 대피실에 가까운 곳이기 때문인 것 같다.
"뭐 전 능력치 99니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겠지. 그 멸망의 마수인가? 그 녀석만 안 만나면 될 거야."
중얼거리며 천장에 있는 문. 그러니까 지상에서 보면 땅에 있는 문을 열고 나온다. 엉망으로 박살난 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때는 환한 대낮이고 주위에 몬스터는 없어 보였다.
"휘우~ 아주 박살이 나셨군. 그 괴물하고 싸우던 과정 때문인가?"
나는 박살 난 집 근처를 샅샅이 뒤져 아이템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아이템은 묘하게 윤곽이 뚜렷하게 보여서 찾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발견한 물건들은
[냄비]
나
[프라이펜]
같은 주방용품부터
[금괴]
나
[다이아 목걸이]
같은 귀금속까지. 생각 외로 짭짤한 발굴에 좋아하고 있다가 문득 언덕 위에 모여 있는 덩어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이었다.
"으아 고어라니......."
그들은 멋지고 아름다운 외모의 선남선녀였지만 보는 순간 기겁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버지'라는 남자는 몸이 반으로 잘려 내장을 쏟아낸 상태이고 '어머니'라는 여자는 가슴팍에 머리통만한 구멍이 나 있어 그 내부 구조가 다 보인다. 그야말로 하드코어. 마음 약한 이들이라면 구토를 할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다.
아니 뭐 나야 사고를 하도 많이 당하는데다 병원에 살다시피 한 인생이라 이런 광경에 면역에 가깝다. 새삼스럽게 토하고 할 필요까지야.
"네버랜드가 19세 미만 플레이 금지인 이유를 알겠군."
이 가상의 세계에는 그 어떠한 제약도 없다. 성행위는 물론 살인까지 쉽게 경험할 수 있고 아무리 잔혹한 광경이라도 모자이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상대를 죽이려면 상대보다 강해야 하고 성행위를 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입장벽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시스템적인 제한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서 실로 위험천만의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을 죽여 경비병이 추적해온다거나 하는 일이라면 있을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특정 영지라거나 제국법이 강한 지역이라거나 하는 특정 장소에서일 뿐 대부분의 공간에서는 힘이 곧 법이라 할 수 있는 세계관인 것이다.
"미안해요. 아버지 어머니. 무덤은 만들어드릴게요."
작게 사과하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니고 있던 물품들을 챙긴다. 원래의 로안 필스타인이라면 부장품으로 같이 묻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당연히 난 그럴 수 없다. 비싼 장비면 당연히 챙겨야지 묻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게다가 부모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나에게는 NPC일 뿐으로 부모의 정을 느끼는 게 더 우스운 일이리라. ============================ 작품 후기 ============================ 닥치고 운이 좋아야 합니다. 전쟁터 병사로 시작하면 아무리 용을 써도 시작하자마자 죽을 수 있거든요. 물론 안 죽고 이겨낸다면 최적의 사냥터가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