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라그나로크 (2)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율리안은 움찔 떨었다.
'이 목소리는...!'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폭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상상을 초월하는 폭격!
그 소리는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단단하게 버티고 있던 문짝이 초박살이 나고 말았다. 다른 왕급들도 뚫지 못한 철벽의 괴물의 성이 사정없이 파괴된 것이다.
'이 무슨...!'
자신들조차도 들어오는데 애를 먹었던 발할라 궁이 아니었던가. 드루이드 탑하고는 좀 개념이 달랐다.
그 드루이드 탑은 멀린이 입맛에 맞게끔 세운 철벽의 성.
자신의 성을 세우는데 발할라 유물을 활용했다고 해야 하나. 일종의 가공품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래봐야 신이 아닌 인간이 신을 만든 모방품.
일종의 하위호환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 이 성은 달랐다.
'진짜 발할라 그 자체.'
완전한 신의 궁전.
지금이야 이미 묵시 유물들이 차지한 괴물의 성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한때 마제스티가 세상을 평정했던 거대한 황제의 유적.
"그런 유적을...!"
그러나 정작 유적의 벽을 부순 침입자는 귀를 후볐다.
"황제의 유적? 난 무슨 고물창고인 줄 알았지."
"단장!"
주헌은 유유히 고대 유적 안으로 들어왔다.
율리안은 무사한 주헌을 보고 안도했지만, 곧 아차 싶어 되물었다.
"밖에 있던 괴물들은?"
"아. 저 액기스들?"
"애, 액기스?"
그리고 뒤를 돌아본 율리안은 기겁을 했다.
"저게 다 뭐야!"
주헌이 지나온 장소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괴물들이 시체가 되어있었다. 갈리고 뜯기고, 아주 즙이 되어 유적 곳곳에 왁스로써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뭔 건강주스라도 되는 양, 주헌은 착즙한 놈들의 액기스를 병에 담아왔다.
"허, 허허."
아무리 묵시 유물들의 똘마니라고 해도 저건 아니지 않나.
"우리가 저놈들하고 안 마주치고 들어오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하지만 그딴 건 개똥으로 생각하는 건지 주헌이 귀를 후볐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고 설아가 아차 싶어서 외쳤다.
"단장님, 주원이가...!"
그러자 주헌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그래, 들었어."
멀리서 주헌을 쫓아오는 유재하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주헌은 주먹을 우득거리면서 눈을 번득였다.
"그 노친네가 묵시 놈들한테 사바사바 했다면서?"
뭐, 괘씸하긴 하지만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묵시 유물들은 그 정도로 감당하기 힘든 위험한 유물들.
인간들 중에는 감당할 수 있는 놈들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노친네가 이리 나올 줄은 몰랐는데.'
주헌은 같잖다는 듯이 유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성이...!"
낡아 빠진 황금의 성.
먼지와 이끼가 가득 껴 빛이 바래있던 유적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왕을 뵙사옵니다.]
[왕이시여!]
주헌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성의 모습이 변해갔다.
낡아빠졌던 장식물들은 그 빛깔이 돌아왔고, 부서졌던 기둥들도, 이가 빠졌던 물건들도 하나씩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그건 성이 허물을 벗는 게 아니었다.
'유적의 시간이 되돌아가고 있어!'
그랬다.
이 공간의 흐름이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과거, 찬란했던 마제스티의 시대.
그때 그 시절, 전대의 추억이 남아 있는 그 당시로.
그 증거로 유적에 나타나는 시종들은 주헌에게 절했지만, 주헌이 지나가자 유령처럼 그냥 뚫렸다.
이 성 자체가 거대한 과거의 망령이라고 봐도 되었다.
하지만 망령이라고 해도 현재의 인물에게 영향을 못 끼치는 건 아니었다.
"단장님! 위험해요!"
성의 함정이 발동해 주헌을 습격했다.
그건 율리안 일행이 침을 삼켜가며 겨우겨우 피했던 극강의 함정들.
주헌을 침입자로 인식한 쇠창들이 벽의 그림에서 튀어나왔다.
[침입자! 침입자를 제거하라!]
그러나 쇠창들이 주헌에게 맞닿는 순간!
콰지지직!
주헌의 목을 노리던 창이 박살이 났다.
창끝에서부터 부식되면서 손잡이 부분까지 말라 비틀어졌다.
"...!"
주헌은 미소를 지으면서 신의 영역에 들어섰다.
주헌이 밟은 곳은 드넓은 홀!
그 빛바랜 무덤이 과거로 회귀하는 순간, 다급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주의. 이 앞으로는 신의 영역입니다.]
[목숨을 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신과 인간의 품격은 그 높이로 나뉜다고 했던가.
모든 신화에서 신은 높은 곳에서 인간들을 살폈다.
그리고 그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옥좌, 흘리드스캴브 역시 신의 시야를 상징하는 유물.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즉, 이 황금성 자체가 마제스티의 절대적인 권위였고, 힘.
과거 전대 마제스티 역시 그 힘으로 신의 영역에 들어서려 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궁전 가장 깊숙한 곳에 그게 있다.'
곧 주헌이 조이가 있을 장소로 향하자 율리안이 급히 막았다.
"기다려! 그 앞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야! 그리고 묵시 유물들이 한가득...!"
하지만 그 순간, 율리안을 비롯한 단원들은 움찔했다.
쾅!
엄청난 섬광이 주헌의 옆에서 뻗어나왔다.
[카오스를 불러냅니다.]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보낼 소멸의 문을 불러냅니다.]
"...!"
그리고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쪽 무릎을 공손히 꿇은 소년.
"부르셨습니까."
마제스티의 요람이었다. 준은 깍듯하고도 기품 있는 몸동작으로 주헌의 부름에 답했다.
물론 황금빛을 머금은 낯익은 얼굴의 등장에 단원들은 기겁했지만.
"준?!"
"저 아이가 어떻게...!"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쾅!
[더러운 서주헌의 냄새다.]
홀 안쪽에서 묵시 유물들이 뛰어나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홀 천장으로 뚫려 있는 구멍으로 괴물 무리들이 보였다. 그 숫자가 최소 수천.
재앙 유물로 유명한 놈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네놈은 필요 없다! 필요 없어!]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무리들이 꿈틀거리며 주헌에게 악의를 품고 오고 있었다.
놈들은 아카식레코드에도 기록되지 못하고, 세월의 흐름에 사람들에게 잊힌 녀석들.
혹은 역사 속에서 승자에 의해 사라진 기록들까지.
전 세계에서 난동을 부리던 묵시 유물들이 주헌의 냄새를 맡고 달려온 것이다.
곧 묵시 유물들 중에서도 최강의 파괴력을 가진 녀석들이 험악한 이빨을 드러냈다.
[역시 서주헌 놈이 다시 나타났구나!]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놈 같으니!]
놈들은 조이를 붙잡아두고 굉장히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왕권의 이전 준비는 다 끝났어!]
[여기서 네 숨통을 끊어주마!]
[왕권의 교체다!]
괴물들은 주헌을 습격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자, 문을 열어라! 카오스!"
"명령 받들겠나이다."
준의 미소와 함께 황금빛 섬광이 옆에서 터져 나왔다.
준은 황금빛 빛으로 변해 하늘로 뻗어나갔다.
그 긴 빛줄기는 마치 동아줄 같기도 했고, 꿈틀거리는 용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빛의 줄기가 하늘에 원을 그리는 순간!
쾅!
하늘에 문이 열렸다.
쿠구구구궁!
태풍의 눈을 보듯, 하늘에 먹구름이 끼면서 검은 혹점이 생겼다. 그 혹점은 굳게 닫힌 쇠문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길쭉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 문.
그리고 그 혹점을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시작하는 구름들. 그리고 그 광경에 묵시 유물들은 기겁했다.
놈들이 이 강력한 힘을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 잠깐! 이건!]
[요, 요람! 요람이잖아!]
[심상세계다! 젠장, 저 문이 열렸어!!!]
[젠장, 서주헌이 카오스를 불러냈어어어어! 이젠 다 끝이야!]
한때 프로메테우스가 주헌을 대감옥채로 날려 보내려고 했던 바로 그 세계.
심상세계.
유물들이 태어나고 소멸하는 태초의 바다.
혼돈의 먼지와 가스로 가득 찬 곳, 인간의 기억과 심상들로 가득 차있는 곳, 카오스.
그 요람에서 모든 유물들은 생명을 얻어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저곳은 천하의 묵시 유물들조차도 두려워하는 공간!
[아아아악! 안 돼! 살려줘!]
놈들은 현실까지 부정했다.
[젠장, 아냐! 서주헌이 저 유물을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어!]
[그래! 카오스를 다룰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없어!]
[문까지 열지는 못할 거라고!]
그러나 이때였다.
"마제스티로서 명한다! 모두 무로 돌아가라!"
[?!]
그 외침과 함께 혹점의 철문에서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
번쩍!
문의 장식인줄 알았던 길쭉한 문양들이 번쩍 번쩍 눈을 떴던 것이다.
[!]
그리고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카오스의 문이 열렸다.
쿠구구궁!
[카오스가 시공의 문을 열어냅니다.]
[소멸의 문이 열립니다.]
그 광경에 묵시 유물들은 기절초풍을 했다.
문이 열리면서 모든 묵시 유물들을 빨아들이는 것마냥, 거친 오라 바람이 일었던 것이다.
[태초의 공간, 카오스가 묵시 유물들을 삼키기 시작합니다.]
[안돼! 잠깐! 아아악!]
[젠장! 서주허어어언! 카오스의 문까지 열어냈어!]
[이건 말도 안 돼! 미쳤다고!]
주헌을 삼키려던 묵시 유물들은 도리어 훅훅 시공의 문으로 끌려갔다. 그 장면이 흡사 허리케인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광경.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왕의 명령이시다. 모두 무로 돌아가라.]
준의 목소리와 함께 혹점에서 정체모를 기괴한 밧줄들이 나타났다. 그 밧줄은 검은 오라로 된 줄이었는데. 마치 해파리 다리처럼 꿈틀거리며 도망가는 놈들을 붙잡았다.
[아아아악! 살려줘!]
도시를 파괴하던 전 세계 곳곳의 묵시 유물들이 카오스에 빨려 들어갔다.
인간들의 사회를 완전히 박살 내고, 종말을 선고하려고 했던 놈들이 강제로 끌려간 것이다.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 놀라운 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 세상에! 괴물들이 저기로 빨려들고 있어!"
"저, 저게 뭐야?"
"저기 서주헌! 서주헌이다! 서주헌이 저 이상한 문을 연 거라고!"
"뭐? 정말이야?"
빌딩에 달라붙어 있던 요르문간드며,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수며, 하물며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아마겟돈까지 카오스에 끌려가고 있었다.
똥줄이 타들어간 묵시 유물들은 질겁하며 머리를 굴렸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서! 어서 카오스에게 먹히기 전에 아카식레코드를 발동해라!]
[그래! 카오스의 문을 연 건 서주헌이야! 시전자만 죽으면 문제 없다고!]
[어서! 급하다! 모두 이쪽으로 모여라!]
[남은 놈들은 그 사이에 어서 마제스티 교체를! 뭘 하느냐! 어서 아카식레코드를 쓰라고! 그 방법밖에는 없어!]
상급 재앙 유물들은 전력을 다해 주헌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주헌은 미소를 띠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그의 거침없는 발걸음이 황금 홀에 들어서고.
[젠장! 서주헌이 여기까지 오고 있어!]
동시에 어딘가에서 조이를 데리고 있는 묵시 유물들이 질겁했다. 그곳은 황금 홀과 이어진 유일한 방.
동시에 조이가 갇혀있기도 한 객실.
발할라 궁전에서 가장 높은 신의 자리.
주헌은 그 곳과 연결된 황금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그 계단을 밟는 순간, 안에 있던 이들은 다급해졌다.
[괜찮아. 빨리 진행해!]
그들은 급히 조이를 보았다.
[자, 괜히 저항 말고 어서 아카식레코드를 발동해!]
"으윽!"
곧 조이의 목을 조르던 묵시 유물들은 아카식레코드를 들이밀었다.
[어서 해!]
[어서 서주헌의 존재를 지워버리라고!]
동시에 조이가 친화력을 발동해 유물들을 뻐억 걷어찻다.
[아악!]
[이년이!]
"...허억! 안 꺼져? 그래 봐야 난 못한다니까!"
[아니! 넌 서주헌과 영혼을 반반 나눈 여자다. 서주헌이 계약한 물건은 너도 다룰 수 있다는 의미지.]
"...!"
[자. 어서! 험한 꼴 당하기 전에!]
흉측한 묵시 유물들은 우악스럽게 조이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옷가지까지 벗겨내려는 그 순간이었다.
"새끼들이 뒤지려고."
쾅!
[으아아아악!]
조이를 붙들고 있던 묵시 유물들이 바로 펑펑 터져나갔다.
"주헌아!"
조이는 주헌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주헌이 문을 뚫고 왕의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쿵!
벽을 뚫고 나타난 건 오딘을 삼킨 거대한 늑대.
펜릴.
"!"
주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이 오딘의 무기를 가진 건 실수였다!]
펜릴은 라그나로크 당시.
주신 오딘을 잡아먹은 괴물 늑대였다. 그리고 오딘을 포함, 오딘의 유물을 상당히 많이 가진 주헌은 펜릴에게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
그걸 잘 아는 펜릴이 포악한 입을 벌렸다.
까마귀도 바로 방어기세에 들어갔지만, 곧바로 경고했다.
[주의. 최악의 상극입니다.]
[즉시 오딘 유물의 소유권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
뭔가로 펜릴의 입이 틀어막힌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