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라그나로크 (1)
기우뚱.
순간적으로 주헌의 몸이 넘어지듯, 뒤로 기울였다.
동시에 세계가 크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슬로우모션처럼 시간이 점점 느려지는 듯한 감각.
주변의 소리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하고, 시야도 점점 흐려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똑똑히 보이는 것이 있었다.
"단장...!"
"단장!"
자신을 보며 놀라는 단원들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주헌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여기는 잊어야 할 세계였다.
처음부터 요람을 얻기 위해 보내졌던 곳.
미련이 남았지만, 주헌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서른 살의 녀석들.
추억을 나누었던 TKBM 시절의 녀석들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전에는 하지 못했던 걸 해볼 수 있었으니까.
'내가 진짜 사표는 던져보고 싶었다.'
물론 원수도 제거했겠다, 저 세계에서 새 인생을 살아도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긴 하겠지만...
'진짜 가야 할 곳은 이쪽은 아니다.'
묵시 유물들.
돌아가서 놈들을 제거해야 했다.
'그래도 이대로 떠나는 건 아쉽네.'
그래도 미련 없이 주헌이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좋아, 이제 부장 새끼 빼고 다같이 여행이나 가자! 캬캬캬! 잘가라! 개같은 단장아!"
"?!"
지금 저 새끼가 뭐라고?
울컥한 주헌이 벌떡 일어서려는 순간 시야가 완전히 바뀌었다.
"!"
눈에 들어온 것은 사막 같은 황무지.
[원래의 시간선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건가.'
그렇게 주헌이 주변을 살피려고 할 때였다.
쿵! 쿵쿵!
멀지 않은 곳에서 폭격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전쟁이라도 벌어진 듯한 소리.
'!'
그리고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순간.
주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
쾅!
주헌은 황급히 일어나 옆으로 몸을 굴렀다.
뒤이어 터지는 폭발.
콰과과과광!
"크윽!"
엄청난 폭발의 기세에 주헌의 몸이 튕겨져 나갈 정도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다리가 잘려나갔을 수준.
그리고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자신이 있던 자리가 초토화되어있었다. 그것도 상당한 범위로.
결국 주헌은 몸의 흙을 털어내며 일어났다.
"여긴 어디야. 사막으로 떨어진 건가?"
그러자 뭔가가 자신의 팔을 끌어당겼다.
"!"
그건 다름 아닌 동아줄.
실이었던 놈이 동아줄의 모습으로 돌아온 걸 보니 원래 세계로 돌아온 게 맞긴한 모양이지만...
"음?"
주헌은 동아줄이 가리킨 장소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유의 여신상?"
동시에 주헌은 주변을 살피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여기 뉴욕이었어?"
얼핏 봐서는 고비사막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물론 도시의 건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할 뻔했지만, 확실히 있었다.
아직 파괴가 덜 된 뉴욕의 도시들이.
그런데 이때였다.
"잠깐, 저게 뭐야?"
돌연 주헌은 제 눈을 의심하듯, 주머니에서 소형 유물 망원경을 꺼냈다.
그리고 뭔가를 본 주헌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당연했다.
"미친, 저거 만리장성 아니야?"
***
그랬다.
마치 대륙이라도 이동한 듯, 뉴욕에서는 볼 수 없는 아이사의 건축물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대륙 채로 이동한 것 같은...!
"뭐야, 이 새끼들. 설마 대륙이동이라도 한 거야?"
[아무래도 묵시 유물들이 판 이동을 한 것 같습니다.]
"!"
[묵시 유물들이 대륙으로 땅따먹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새끼들이.
주헌은 같잖다는 듯 웃으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칫. 돌덩어리가 됐군."
뭐 애초에 핸드폰은 무용지물이었겠지만.
왜?
현재 세계는 흡사전쟁 상황.
혹은 종말 영화를 보는 듯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기지국이 멀쩡하게 남아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상황이 이쯤 되자 주헌은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내심 불안해졌다.
'설마 혹성탈출 찍는 건 아니겠지.'
자신이 저쪽에 다녀온 사이, 수십 년이 흘러버렸다거나.
뭐 그런 개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럴 때 동아줄이 뭔가를 물고 왔다.
그건 다름 아닌 신문.
비록 찢겨진 조각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날짜 부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옳지 잘했어."
하지만 날짜를 본 주헌은 드물게 놀랐다.
'미친, 2120년?'
설마 100년의 시간이 흘러버린 건가?
주헌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고 보면 준도 차라리 그 세계가 편할 거라고 했었고.'
그 자식, 전부 이걸 알고서 한 소리 아니야?
눈살을 찌푸린 주헌이 날짜확인을 위해 요람을 불러내려 할 때였다.
"주헌 씨!"
"!"
낯익은 목소리에 주헌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건 틀림없는 아이린의 목소리!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린이 달려오고 있었다.
"정말 주헌 씨 맞죠?!"
주헌은 정말 안도했다.
아이린은 얼마 전에 봤던 모습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아이린은 주헌을 보자마자 바로 와락 끌어안았다.
주헌도 그런 그녀를 반가워하며 꼭 끌어안아주었다.
"주헌 씨, 보고 싶었어요!"
뭐, 사실 자신이야 저쪽에서 그녀를 보긴 했었지만...
"...주헌 씨, 걱정했... 앗!"
아이린은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법한 게, 자신을 안은 주헌이 조물딱, 조물딱 탱탱한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던 것이다.
"잠깐, 주헌 씨! 아앗...!"
비록 속옷 위라 맨살보다는 느낌이 덜했지만 상관없었다.
옷감 위로 전해지는 찹쌀떡 감각에 주헌은 좋아했다.
'좋아. 이 느낌이야.'
틀림없이 저쪽에서는 이렇게 만질 수가 없어서 아쉬웠던(?) 것이리라.
"자, 잠깐 주헌 씨...!"
"좋아. 여기도 여기도 똑같고."
"아앗! 아아 잠깐 거긴!"
"뭐야. 역시 시간은 별로 안 흘렀네."
"네, 네?"
도대체 뭘로 확인 하는 건지, 주헌이 여기저기를 확인할 때였다.
"야이, 망할 단장아!"
멀지 않은 곳에서 유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씩씩거리며 주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와, 묵시 유물이 댁을 날려보내서 쌩 걱정을 했더니, 어떻게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그런... 부러운... 아니, 지금 상황이 어떤 줄은 알고! 어?! 이 파렴치한 놈아!"
하지만 그는 됐다는 듯 주헌을 반겼다.
"그래도 단장님, 무사해서 진짜 다행이..."
그러나 유재하는 돌연 주헌에게 얻어맞았다.
뻐억!
"?!"
졸지에 얻어맞은 그는 정말 황당했다.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퍽! 퍽! 퍽!
"아야! 아야! 아야! 씨이 내가 도대체 뭘...!"
"넌 맞아도 싸."
"아니, 도대체 왜!"
"모르면 네 미래. 아니 과거 놈한테 물어보든가."
"?!"
하지만 유재하가 억울해하거나 말거나 주헌은 손을 툭툭 털었다.
"됐으니 상황 설명부터 해봐라. 내가 저쪽... 아니, 나 기절하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 그전에."
주헌은 신문을 내밀었다.
"이거 2120년이라는 거 뭐야. 진짜 100년 흐른 거야?"
"아, 걱정말아요. 중간에 시간 유물이 설쳐가지고... 아무튼 3일 밖에 안 지났어요."
아씨, 쫄았잖아.
주헌은 신문을 냅다 던졌다.
천하의 주헌도 내심 쫄았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놀랄 만하긴 했다.
'...최소한 일주일은 지났을 줄 알았는데.'
저쪽에 있었던 기간이 최소 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며칠 안 지난 건 다행이군.'
"그리고 묵시 유물들이 주헌 씨의 몸을 던져버리는 바람에 전부 찾고 있었고요."
"그 뒤에 묵시 유물들이 세상에 깽판을 치기 시작했고... 막 미국이랑 북한도 떡 붙어버리고, 유럽은 호주랑 붙어버리고, 아무튼 지금 난리도 아니라니깐!"
"사람들은?"
"지금은 거의 주헌 씨가 예전에 만들어 둔 대피소로 피신했어요."
전 세계 곳곳에는 고분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주헌이 만든 대피소가 있었다.
천하의 주헌이 허투루 만들었을 리도 없고, 묵시 유물들도 쉽게 대피소의 결계를 뚫지 못하고 있다고.
"그래서 빡쳐가지고 열심히 도시나 때려부수고 있죠."
유재하는 캡쳐해두었던 뉴스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사진들에는 낯익은 괴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폐허가 된 마을.
그리고 도시 한복판에서 꽈리를 튼 북유럽 신화의 거대뱀.
'요르문간드.'
놈뿐만이 아니었다.
라그나로크를 몰고 왔던 유명한 악수들부터, 성경 속 최후의 날의 괴물.
각 신화 속에서 나오는 재앙 유물들이 거의 다 출현해 있었다.
"이 새끼들이 아주 살판이 났구나. 살판이 났어."
그 험악해지는 목소리에 주헌의 유물들은 파르르 떨었다.
심지어 재하와 아이린까지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주헌의 까마귀 오라가 흉흉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단장님, 좀 기운이 바뀐 것 같은..."
그랬다.
요람을 차지한 주헌은 전보다 더 강한 힘을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헌이 비웃으면서 물었다.
"그래서 다른 녀석들은?"
"아, 그게!"
동시에 그들은 황급히 주헌을 붙잡았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뭐?"
"조이가!"
***
"젠장, 역시 이 이상으로는 다가가기가 힘들어!"
아프리카 대륙.
뭐 아프리카라기엔 험준한 에베레스트 산까지 보이는 판국이지만 아무래야 좋았다.
사막 한복판에는 수상한 궁전이 생겨나 있었다.
그건 바로 마제스티의 옥좌 흘리드스캴브가 있는 오딘의 궁전 발할라.
그 안에는 전대 마제스티, 그리고 묵시 유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건 흡사 괴물들의 성.
그리고 모두가 죽어나가는 그 궁전에 쥐새끼처럼 숨어든 게 율리안 일행이었다.
"하여간 망할 묵시 유물들...!"
"역시 저건 인간들은 아무도 못 당해낼 것 같은데요."
"하지만 조이를 구하려면 일단 저놈들을 뚫어야..."
단과 설아의 말에 율리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그들이 조이를 빼앗긴 건 불과 하루 전.
물론 쉽게 빼앗길 단원들도 아닌만큼, 묵시유물들도 이를 갈았었다. 하지만 변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망할 놈의 능구렁이 영감...!"
그랬다.
권혁수.
"하필 그 영감이 묵시유물한테 무릎을 꿇냐! 인간의 자존심도 없나! 사황 주제에!"
사실 묵시 유물이 나타나자 전 세계의 왕급들은 놈들을 잡겠노라 설쳤었다.
그 정도로 강한 유물이면 주헌을 물리치고, 자신들이 마제스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잡기는 개뿔.
'아아아악!'
멋도 모르고 설치던 놈들은 만지자마자 끔찍하게 죽어나갔다. 그리고 묵시 유물들은 최소한의 인간만을 남겨놓겠다며, 인간 선발 작업에 들어갔다.
아마 자신들에 대해 역사를 새로 기록해줄 지식인들, 혹은 시중을 들어줄 친화력 능력자 등 득이 될 사람들 위주로 뽑아가는 듯했다.
그 외의 뛰어난 인간들은 전부 사냥감.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나타났던 것이 바로 권혁수.
묵시 유물들에게 살해당할 것이 무서웠던 건지, 아니면 주헌이 사라지자 마제스티 자리가 탐났던 건지.
놈이 조이를 찾아주겠다며 묵시유물들에게 사바사바 아부를 하고, 비위를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발할라 성의 주인이 되고 말았다.
권혁수라면 조이를 찾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테고 말이다.
"분명해. 단장의 몸에서 아카식레코드도 빼갓겠다. 권혁수는 조이를 마제스티로 만들어버릴 거야."
"묵시 유물들이 전대처럼 조이를 시체로 만들겠지...!"
그러자 부단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율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주헌이 오기 전에 빨리 조이를 구해내야 하는데...!"
안 그랬다간 돌아온 주헌에게 진짜 죽을지도 몰랐다.
어디 그뿐인가.
'뭐야. 니들 이것 밖에 안 됐던 거야? 좋아 니들 벌칙으로 평생 내 노예야.'
그렇게 개무시를 하며 평생을 부려먹을 것이었다.
"천하의 단장이 이 건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그러니 조이의 안전을 위해서기도 하지만...
"억울해서라도 반드시 주헌이 오기 전에 구해내야 해."
그런데 그때였다.
"오, 그래에? 근데 내가 오기 전까지 할 수 있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