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내가 왔다 (1)
째각, 째각.
캄캄하고 좁아터진 사무실.
[특수발굴사업부]
주헌은 낯익은 사무실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무실 안에는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책꽂이로도 모자라 가득 쌓인 자료들.
그리고 칠판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면도와 공략방법 등,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텅 빈 사무실을 메우고 있는 건 째깍째깍 시계소리뿐.
마침내 천사 모양의 유물 시계가 빼애애액 저녁 7시를 알릴 때, 주헌은 퍼뜩 몸을 일으켜 세웠다.
"...!"
자신이 깨어난 곳은 바로 사무실 내부의 소파였다.
그리고 그 소파 역시도 낯익은 유물 의자.
그 광경에 주헌은 황급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양복 주머니에서 잡힌 건 핸드폰.
재빨리 내용물을 살펴본 주헌은 미간을 좁혔다.
'역시.'
확실했다. 날짜도 그렇고, 주고 받은 문자기록도 그렇고, 전부 현재의 내용이 아니었다.
'여긴 내가 살던 그때다.'
그러니까 회귀하기 전, 과거였던 것이다.
물론 원래 같으면 자신이 과거를 바꾸면서 사라졌을 미래지만...
'혹시 분리된 시간선 같은 건가.'
이를테면 두 개의 시간선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회귀 전의 시간선과 회귀 후의 시간선.
즉, 자신이 마제스티가 된 시간선.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자신이 죽는 미래가 기다리는 시간선. 그렇게 말이다.
'뭐, 유물의 힘일 테니 깊게 생각해봤자 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건 회귀 전의 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마도 서른 살 무렵으로.
물론 굳이 날짜나 기록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때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왜?
'몰골 한번 끝내주네.'
주헌은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그저 웃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정말 못 봐줄 정도로 초췌했다.
서른 초반쯤인가.
나름 직장인이랍시고 셔츠에 목에 건 TKBM 사원증.
눈 밑엔 볼까지 내려올 것 같은 퀭한 다크서클.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 거친 피부. 거기에 머리는 엉망이고. 잠들면 영락없는 시체라고 오인 될만한 모습.
딱 봐도 유물증후군에 찌든 낯익은 모습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큭...!"
가슴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고통에 주헌은 신음을 흘렸다.
콱.
주헌은 오랜만에 겪는 고통에 입술을 깨물면서 주먹을 쥐었다. 호흡은 짧아졌고, 숨쉬기는 굉장히 버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깨질 것 같은 머리의 두통.
'젠장.'
물론 그나마 아직은 약으로 버틸만한 시기였다.
자신들이 죽을 때 무렵, 30대 중반에는 유물증후군 말기라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그 고통은 상당했다.
주헌은 인상을 쓰면서 재빨리 자신의 주머니를 뒤졌다.
"약이 분명...!"
분명 있을 것이었다.
먹으면 대충 반나절은 버틸 수 있는 약이.
노친네가 보상이랍시고 던져준 일회용짜리 그 약이.
하지만 약통을 꺼낸 주헌은 혀를 찼다.
기껏 꺼낸 약통은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주헌은 괴로워하면서 전대 놈을 욕했다.
'젠장, 하필 보내도 왜 이때로...!'
그렇게 주헌이 살짝 이를 갈 때였다.
'!'
갑자기 숨을 쉬는 게 편해졌다.
그리고.
[내성 스킬이 발동합니다.]
[몸에 침식하는 유물 바이러스의 침투를 막아냅니다.]
평소의 메시지와 함께 주헌의 고통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유물 증후군의 원인은 오라.
유물의 오라가 인간의 몸에 침투하면서 극심한 고통과 합병증을 야기하는 질병이었다.
그러니 오라에 직접 대항하는 내성 스킬이 발동하면서 고통도 잦아드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SS급 내성스킬의 추가 버프 능력이 발동됩니다.]
[추가효과로 약간의 신체회복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미약하게나마 질병의 치료효과까지!
주헌은 그제야 편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고통이 사라졌다.'
확실히 약이 없어도 될 정도로 회복이 된 것이리라.
하지만 희한했다.
'까마귀가 발동을 하다니.'
이 시대는 까마귀와 만나지 않았을 때가 아닌가.
주헌은 혹시나 싶어 유물을 소환해보았다.
마제스티의 재보들은 물론, 계약한 유물을 쓸 수 있나 확인해봐야 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에 막혀 유물들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마제스티의 권능을 발동하기엔 환경조건이 적당하지 않습니다.]
[해당 환경에서는 소환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
뭐, 대충 시대를 거스를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차원을 통과하는 유물을 쓰지 않는 이상, 유물들이 이곳에 소환될 수는 없다는 것이겠지.
'그래도 계약이 해지된 것 같진 않아 다행이군.'
주헌은 제 몸에 나타나 있는 계약 문신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 까마귀 놈하고만 연결되어 있으면 됐어.'
메시지 창과 내성 스킬 등, 유용한 스킬은 필요했으니까.
그래도 늘 졸졸 쫓아다니던 동아줄이 없는 건 좀 아쉽긴 한데...
그런데 그때였다.
나 찾았어? 찾았어?
"?!"
주헌은 순간 기겁했다.
***
그는 제 옷자락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실밥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아니, 자신이 걸치고 있는 니트 가디건.
여름철이긴 하지만 이 시절의 자신은 환자(?)다 보니 냉방병도 냉방병이지만, 추위도 많이 탔다.
그래서 회색의 가디건을 걸치고 있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긴 한데...!
이거 뭔가 불편해! 불편해!
실밥이 제 혼자 낑낑거리면서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그리고 그 순간!
우드득!
"?!"
실밥이 지 멋대로 움직이며 슬슬 실을 풀기 시작했다.
"아니 잠...!"
드물게 당황한 주헌은 가디건의 실이 풀려 스르륵 사라지는 광경을 봐야 했다.
입고 있는 가디건은 뜨개질로 뜬 수제였다.
그러다보니 한번 실이 풀리면 뜯어지는 건 한 순간!
그렇게 실이 풀어지면서 주헌의 가디건도 점점 줄었고, 순식간에 가디건은 증발했다.
아마도 이 시간선의 누군가가 직접 떠주었을 가디건이...!
"...허!"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실은 그제야 움직이기 편해졌다며 해맑게 좋아했다.
이제 편해! 편해!
실은 주헌의 다리에서 좋은 듯이 머리를 비볐다.
확실했다.
"이 녀석 동아줄...!"
행동, 목소리, 말투(?)를 보면 대충 알았다.
여전히 알아먹을 수 없는 목소리지만 틀림없는 동아줄.
하지만 그래서 주헌은 황당해하는 것이었다.
"이 녀석은 어떻게...!"
뭐, 보나마나 제 가디건의 털실에 빙의했다든지, 유물핵이 옮겨졌다든지... 대충 그런 것 같긴 하지만...
'어떻게 된 거지.'
그럴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따라왔습니다.]
"아니 가능한 일야 그게?"
[전대 마제스티가 보낸 것 같습니다.]
"아니 보낼 수 있으면 좀 다른 더 쓸모 있는 녀석을... 하 아니 됐다."
주헌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튼 여기에 요람이 있다는 거지."
주헌의 눈이 번득였다.
틀림없었다.
묵시 유물들은 자신이 거슬린다며 무(無)의 세계로 보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전대 놈이 그 궤도를 비틀어서 이곳으로 날려보낸 것이다.
그리고 뭐라고 했더라.
'여기서 요람을 찾아서 재보를 다 모으랬나.'
대감옥은 물론,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재보.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시간선.
이 시간대가 그 유물이 출현할 때라는 거겠지.
그 사실을 인지한 주헌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잘 됐다 싶었던 탓이다.
'여기서 요람을 찾아낸다.'
묵시 유물은 확실하게 놈들을 휘두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면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놈들을 처리하고 완벽한 마제스티가 되기 위한 열쇠 요람.
그렇게 주헌이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서주헌 발굴팀 말이야. 이번에도 지원은 10%만이야?"
"그러게, 거기 완전 낡았던데. 유물도 고물들만 쓰고."
"딱 걔네 수준이지 뭐. 하하하."
사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다른 팀들의 목소리.
그 말처럼 자신들의 사무실은 낡아빠져 있었다.
'다른 팀들은 책상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쫙 A급 유물로 세팅했을 텐데 말이지.'
지원팀에서도 으레 없는 부서 취급하며 비품을 안 챙겨준다거나, 업무 처리를 느리게 해주거나, 아무튼 무시하기 일쑤였다.
아니나 다를까.
똑똑.
"?"
사무실 안으로 어떤 여자가 불쑥 들어와 말했다.
"서 부장님. 여기 특수발굴팀에서 대여해간 유물 당장 반납해주세요."
지원팀의 여자였다.
"어제 대여해가시고 아직도 반납 안 하시면 곤란하죠. 어떻게 항상 특수발굴팀은..."
그러자 주헌이 뭐라는 거냔 듯 비웃었다.
"어제 빌려간 걸 반납? 유물 대여기간은 기본 일주일이잖아."
그러자 직원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비웃었다.
"뭐래... 특수팀한테 귀한 유물을 대여해주는 것도 고맙게 여겨야지."
그때였다.
쾅!
"꺄악!"
갑자기 날아온 유물 단검에 직원은 까무러쳤다.
그러나 주헌은 태평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잘 안 들려서."
"네? 아, 아니... 저기!"
"역시 잘 안 들리는데. 그 뚫린 입이라도 찢어줘야 하나?"
여자는 낯선 주헌의 모습에 정말 당황했다.
평소 주헌이라면 빡쳐하긴 해도 곧 알겠다면서 고분고분 반납했을 텐데...!
"저, 저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대여기간을 착각했나봐요...! 죄송합니다!"
곧 허둥지둥 직원이 뛰쳐나가자 주헌은 가볍게 탄식했다.
'여전하구만. 어지간히도 우리 부서를 호구로 보는 건.'
이해는 갔다.
문제를 일으키면 안 돼서 될 수 있으면 참았으니까.
그래서 유재하도 자신을 병신단장이라 무시할 때고, 회사에서도 으레 호구 취급할 때인가.
아무래야 좋았다.
여긴 어차피 잠시 머물다가 갈 세계.
무시당하는 건 그다지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 주헌은 지금 상황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것이다.
"뭐, 됐어. 일단 나가서 요람에 대한 정보라도..."
그럴 때였다.
여기! 여기!
실이 된 동아줄이 주헌의 손을 잡아 끈 곳은 다름 아닌 캐비닛. 이에 주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긴 내 유물 사물함.'
주헌이 가까이 가자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강력한 유물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요람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주헌은 표정이 밝아졌다.
'맞다. 이땐 온갖 유물을 넣어놓았었지.'
굳이 이 시대, 이 날짜에 보냈다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그래서일까. 주헌은 재빨리 사무실 캐비닛을 열었다.
***
벌컥!
하지만.
"엉?"
없었다.
요람은 둘째 치고 캐비닛이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
정말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기엔 자신의 메인 유물들도 있을 텐데.
결국 이상하게 여긴 주헌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도굴단의 서포터로 일하던 마지막 동료, 준이었다.
"어, 준아. 보통 네가 사무실 청소하지? 그럼 캐비닛에 있는 내 유물들 못 봤어? 왜 아무것도 없지?"
그러자 상대는 오히려 당황하며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기억 안 나세요? 캐비닛의 유물은 이틀 전에... 유과장님이 청소하다가 실수로 전부 박살 냈다고 했잖아요. 핵이 깨져서 복원도 못 한다고... 그래서 단장님도 알겠다면서 그냥 넘어가셨...]
동시에 주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유과장이라는 건 유재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뭐? 실수로 박살을 내?
핵이 깨져서 복원을 못해?
'보나마나 몰래 팔아버리려는 거구만.'
이 시기의 유재하는 그러고도 남았다.
그래서일까, 주헌은 골치가 아파졌다.
'젠장. 요람이 그 안에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참았다.
그래도 부하 아닌가.
이틀 전이면 아직 팔지 않았을 수도 있을 터.
그러니 일단 잘 타일러서...
그런데 이때였다.
띠링.
[단장님. 재하가 단장님 성과급 빼돌린 거 정말 그냥 넘어가실 거예요?]
주헌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 그래도 이때의 나는 제법 참을성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사무실에서 나와 주차장.
주차된 차에 타려고 할 때였다.
"네가 서주헌이냐?"
수상한 남자들이 다가와 주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냐? 니들은 또."
"아 됐고, 유재하라는 놈 알지? 그놈이 우리 돈 빌려놓고 튀었어."
"그래? 그래서 뭐."
"뭐긴. 보증인이 대신 갚아야지! 보증인 서주헌!"
그 말에 주헌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 자식, 설마...
아니나 다를까.
"봐! 분명히 네가 사인하는 거 다 봤다고!"
남자들이 보이는 서류에는 분명 자신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서명했을 리 없는 서류에!
하지만 주헌은 분명 알 수 있었다.
[가짜 서명입니다.]
[당신의 복제를 만들어 서명했습니다.]
"아 그래 요람. 요람 찾아야지."
그 전에 몇 명 죽이고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