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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왕-365화 (365/409)

365화. 왕관을 차지하는 자 (2)

아주 오랜 옛날이었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비보를 얻어야 한다며, 욕을 하며 죽어가던 놈과 계약을 했던가.

확실히 다른 유물들은 골라도 그딴 놈을 주인으로 고르냐며 비웃어댔었다.

[동방 놈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아무리 비보전쟁에 관심이 없다지만 저건 아니지!]

[저렇게 못생기고, 써먹을 곳도 없는 놈은 이쪽도 사양이다.]

유물들은 꺄륵 꺄륵 비웃었고, 까마귀도 탄식했었다. 인간과 계약하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계약하지 않기는커녕 무슨 생각으로 골라도 이런 놈을 골랐을까.

'있는 재주라고는 유물의 말을 듣는 것밖에 없는 놈을.'

실제로 노예는 억울해했다.

"야, 까마귀야! 저것들 뭐야! 물건들 주제에 인간을 비웃잖아!"

친화력이 높아 유물들의 봉 취급.

그만큼 유물들의 비웃음을 샀지만, 노예는 빼액거리며 화만 낼 수 있을 뿐 별다른 수는 쓰지 못했다.

덕분에 까마귀를 원했던 다른 재력가들과 왕들은 저딴 약골 노예에게 빼앗겼다며 분해했다.

"어떻게 저딴 놈에게...!"

"허, 돼지 목의 진주 같으니!"

"한낱 노예가 왕의 물건에 손을 대? 분수도 모르는 것!"

"뺏어라! 소유권을 뺏어!"

비보전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노예는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니 고래싸움은 개뿔.

"허억, 까마귀야, 나 죽어...! 살려줘!"

[이 멍청한 것! 상대는 하급(C급) 유물이다! 저것도 상대 못해서 어떻게 마제스티가 되겠다는 거냐!]

"아야! 쪼지 마! 쪼지 말라고! 아프다니까!"

노예 놈은 겨우 C급 전갈 유물한테도 콱콱 물리며 괴로워했다. 덕분에 까마귀는 늘 노예의 뒷바라지를 해주면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뭐,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쓸만한 게 있다면 대화능력 외에 버프능력 정도.

물론, 버프라 해도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유물의 능력을 꿰뚫어보고 본연의 힘을 더 끌어낸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에휴, 이 쓸모 없는 놈. 네놈은 내가 없었으면 진작 죽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비보전쟁에 참가하게 된 건지.

그럴 때마다 노예는 하하 웃어댔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옆에 있는 건 나한테 반했기 때문 아냐? 그치? 그치?"

"뭐래, 배불뚝이 돼지가."

"자기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하지."

정작 다른 사람들이 꺄르르 비웃고 가자 노예는 억울해했다.

"우씨! 야! 지금은 내가 그 노친네 유물들 때문에 이리 된 거지! 본판은 쓸만하다고! 안 긁은 복권이라니까!"

뭐, 그 말은 맞았다.

전쟁이 시작되고 몇 년 뒤, 노예는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고, 여느 무장들처럼 강해졌으며 유물을 쓰는 능력도 유일무이한 경지에 이르렀다.

치유 유물로 조금씩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놀랐고,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생겼다.

"자, 까마귀야. 어때. 이제 조금은 반할 것 같으냐?"

노예는 은근 기대하듯, 눈을 반짝이면서 바라봤지만 글쎄.

[인간의 몸엔 흥미가 없어서.]

"..."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늘 노예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까마귀. 어렵고 힘들 때 늘 함께 있던 파트너.

둘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파트너였다.

마제스티가 되고 나서도 줄곧 그랬다. 간신들의 말에 넘어간 노예가 까마귀를 버리기 전까지도.

[버러지 같은 인간왕을 죽여라!]

[죽여라! 죽여!]

그렇게 마제스티가 죽고 나서 까마귀는 괴로워했다.

왕이 자신을 배신한 것보다, 그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슬펐다.

본래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파트너를 애정하게 된 탓일까. 그가 속한 인간 전체가 사랑스럽다고 여길 수 있게 된 자신이 아닌가.

물론 그걸 보며 유물들은 까마귀 여신의 저주라며 비웃어댔었다.

왜?

자신은 인간을 사랑한 까마귀 여신.

모리안의 처형자였으니까.

당시 까마귀 여신 모리안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처형식에 자신의 포식 능력이 사용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힘이 제 힘이 되었을망정,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남아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가엾구나. 가여워.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 여신이 그렇게 저주를 내렸을지언정 인간을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 텐데.

'왕을 모독한 까마귀를 추방한다.'

하물며 이미 죽은 인간에게 아무런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개새끼들. 내가 앞으로 유물을 가진 새끼들을 믿나 보자!"

왜 그와 닮은 인간을 다시 만났을 때 묘하게 그리운 기분이 들었을까. 게다가 이번에 만난 사내는 유물ㅇ게 상냥하기는커녕, 박살 내기나 하는 척하의 폭군이거늘.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거늘.

" 내 거에서 다 떨어져, 새끼들아."

왜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일까.

***

"새끼들이 거지들처럼 우르르 몰려 있기는."

치우의 투구를 쓴 주헌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검은 안개로 이루어져 있는 몸이 넘실거렸고,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몹시 사나웠다.

그 고요하지만 맹렬한 기세에 간수들은 침을 삼켰다. 그건 당연할지 몰랐다. 사나운 치우의 투구.

그 압도적인 지배력.

유물은 물론 인간들의 사기까지 휘어잡을 사기.

마제스티에게서 느껴지는 불굴의 카리스마.

[놈이다, 놈이 왔다!]

[또 마제스티가 되려는 분수 모르는 인간 놈이 왔다!]

간수들이 주헌을 보고 겁에 질리는 것도 당연할지 몰랐다. 이곳의 간수들은 대다수가 전대를 처형한 패거리. 죽은 놈이 되살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그리고 전대는 호구였어도 그래도 마제스티는 마제스티.

가끔 유물에게 내비치던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유물들의 심장을 조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이 녀석은 다른 의미로 더 심장을 조이게 했다.

왜?

[뭐 저리 흉악한...!]

[전대 놈보다 더한 놈이다!]

틀림없었다.

풍문에 서주헌 서주헌, 많이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본 주헌은 생각 이상이었다.

[젠장!]

[누가 닮았다는 거야!]

그래봐야 인간.

또 호구 놈이 아닐까 싶었거늘.

주헌은 부드러움은 개나 처먹으라는 듯, 닥치고 제 앞에 꿇으라며 흉흉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니 어디를 보나 전대보다 훨씬 더 지독한...!

[죽여라!]

[절대 살려 보내지 마라!]

그 외침에 멍하게 주헌을 보고 있던 까마귀는 움찔했다. 이곳의 간수들은 보통이 아니란 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

까마귀 주변에 몰려 있는 간수들을 본 주헌은 눈을 번득이며 사라졌다.

[!]

그 대신에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한 안개.

[어디냐! 어디로 사라졌냐!]

감옥 내부는 지독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곧 등골을 쓸어내리는 섬뜩한 침묵에 간수들은 침을 삼켰지만...

[뒤, 뒤!]

[?!]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간수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

소리가 들려온 곳은 꽤 먼 곳!

섬뜩한 안개의 발톱은 간수들에게 사정없이 작렬했다.

콰과각!

간수들은 치우의 비정한 안개에 썰려나가고 분쇄됐다.

주헌은 썰려나가는 간수들의 사이를 여유롭게 거닐었다. 그가 한 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주변의 간수들은 안개에 갈려나가고.

[커허억!]

가까워진 놈들은 주헌의 지배력에 터져나갔다.

쾅! 콰과광!

[...이 인간이!]

주헌은 꽤 빡쳐 있는 듯했다.

원래도 유물의 사정은 생각도 않고 뻥뻥 터트리곤 했지만, 복원을 위해 일말의 잔해는 남겨둔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빨리 꺼지랬지. 거슬리니까."

일말의 잔해는 개뿔. 형체도 남기지 않고 버러지를 치워버리는 느낌. 개떼들처럼 몰려든 간수들 사이로 길이 생겨났다.

그 모습이 흡사 모세의 기적을 보는 듯했다. 곧 주헌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간수들은 다급해졌다.

[놈이 까마귀에게 향한다!]

[결계를 쳐라!]

[함정을!]

[상급 간수들이 올 때까지만 버텨라!]

그러나 함정을 치면 뭘 하나.

간수들을 붙잡은 주헌은 그대로 유물로 덩크슛!

[으아아악!]

그렇게  함정을 깨부수고 주헌이 까마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주헌이 한 발자국, 한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까마귀의 눈도 흔들렸다. 마침내 까마귀까지 거리는 불과 10미터.

"곧 거기서 풀어주마."

까마귀는 쇠사슬에 묶여 꼼짝도 못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자해를 했는지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마침내 눈 앞.

주헌은 까마귀를 묶고 있는 쇠사슬에 손을 뻗었다. 이게 까마귀의 힘을 묶고 있는 유물이리라.

그리고 그 쇠사슬을 파괴하려는 순간!

쾅!

"!"

주헌의 앞에 거대한 뱀이 나타났다.

한때 자신을 잡아먹었던 그 원수가.

****

한편 그 무렵, 권 회장은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건방지구나."

기억을 찾은 지금, 권 회장에게 주헌의 단원들은 감회가 아주 새로웠다. 기껏해야 자신의 노예였던 놈들이 뭐가 어째?

"네놈들 주제에 비보를 얻고 왕급이 되었다고 보이는 게 없나보..."

하지만 그 순간 권 회장은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사나운 번개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선공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율리안.

그 강렬한 번개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포교왕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순식간에 불타올랐을 일격.

"어디에서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단원들은 눈에서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그들은 권 회장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를 감옥으로 보내줄 생각도!

"넌 단장의 믿음을 배신했고, 모욕 했어."

자신들을 위해서 권 회장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주헌이었다.

그런데 희망고문을 해가면서 최종적으로는 보란 듯이 쓰레기 처리 취급.

어디 그뿐인가.

'저게 재하를 갈아 만든 언노운.'

유재하뿐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개처럼 부려먹고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그 시체를 빼돌려 유물로 만들다니!

"사람이 한 짓이 아니지...!"

"그래서 그 수치를 준 것이냐?"

치를 떤 그는 도리어 주헌과 단원들을 비웃었다.

"그래. 솔직히 날 여기까지 몰아넣은 건 칭찬해주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기가 끝난 건 아니지?"

"뭐라고?"

"전반전에서 날고 뛰어봐야 뭘 하지? 결국 후반전에서 이기는 게 진짜 승리자지."

무슨 개소리인가 했지만 권 회장이 웃으며 뭔가를 불러냈다.

그건 다름 아닌 다른 단원들로 만든 언노운 유물들!

"!"

권 회장은 소리를 높였다.

"너희들이 기를 쓰고 발버둥쳐 봐야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다!"

"!"

"그 무덤에서 죽은 놈들이 벌써 잊은 거냐? 그 무덤엔 보통 유물이 있는 게 아니야. 네 단장도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 거기서 죽을 거라고!"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다.

곧 권 회장이 감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비슷한 시간.

쾅!

지면을 뚫고 나오는 육중한 머리.

결국 물러선 주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꽤 낯익은 놈인데."

틀림없었다.

저놈은 과거 설아를 산채로 씹어먹고, 자신의 다리까지 물어뜯어갔던 놈.

최후의 순간엔 자신을 졸라대며 어떻게 먹을지 침을 뚝뚝 삼켰던 놈이었지.

아주 그때 제 머리에 흐르던 침의 축축한 감각이 지금도 되살아날 지경이었다.

뭐, 그때는 무슨 유물인가 했지만 이제는 모를 것 같지도 않았다.

'바실리스크.'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풍겨오는 고약한 악취.

뱀 중의 왕이라 불리며 상당히 난폭한 유물이었다.

놈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주헌을 습격했다.

쾅!

[고놈 참 맛있겠구나!]

그 독기는 어느 생명체든 즉사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주헌 역시 치우의 투구로 신의 몸이 되지 않았으면 버티지 못했을 터!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횟감으로도 써먹지 못할 놈이."

순간적으로 도는 목소리의 살기.

그리고 그 순간, 날카로운 칼이 바실리스크의 몸통을 찔렀다.

푸욱!

눈을 찔린 바실리스크가 요동을 쳤지만, 레비아탄도 횟감으로 만든 칼솜씨는 뱀의 가죽까지 벗겨냈다.

푸우욱!

이내 가죽이 잘려나가고, 육중한 몸뚱어리가 바닥에 추락했다.

쿵!

그 속도가 가히 전광석화.

그렇게 한때 주헌을 먹어치웠던 뱀은 허공에서 순식간에 뱀고기로 변하고 말았다.

간수들은 경악했다. 바실리스크면 그래도 상당한 급의 간수일 텐데. 실제로 과거 주헌도 무참하게 찢어발겨졌고.

그러나 위압적인 지배력을 흘리며 다가오는 주헌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리고.

"분명 꺼지라고 했다."

그 말과 함께 까마귀 주변의 간수들이 터져나갔다.

쾅! 콰과광!

[커허억!]

[빠, 빨리 상급 간수를...!]

하지만 그 전에 지배력을 담은 주헌의 손이 쇠사슬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큭!"

봉인구의 저항력에 주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당한 열기와 고통이 주헌의 손을 불태웠다.

까마귀는 상처를 입는 주헌을 보며 괴로워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콰직!

까마귀를 묶고 있던 쇠사슬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쨍강!

수천 년을 까마귀를 옭아맸던 사슬이 박살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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