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까마귀는 안 돼! (3)
"아 망할 왕, 그 빌어먹을 노친네가 진짜!"
까마귀는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곳은 유물도 인간도 없는 골짜기, 서역(西域)의 외진 땅이었다.
기껏 고향 문명 땅도 버리고 낯선 곳에서 눈 좀 붙이려고 했건만.
"개새끼들, 내가 앞으로 유물을 가진 새끼들을 믿나 보자!"
까마귀는 계속되는 욕설에 한숨을 쉬었다.
시대는 기원전, 헬레니즘 문명이 남아있던 전란의 시대.
유물사용자에게 당하고 저렇게 이를 가는 인간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기껏 명당자리에서 잘 자고 있었는데.'
잠은 다 잤군.
죽어가는 인간의 얼굴은 괴물상이었고, 몸집에도 살집이 많이 붙어 상당히 통실통실했다. 그리고 인상착의를 봤을 때도 권력과 재력과 거리가 먼 노예.
즉, 유물이 왕위쟁탈전에 이용해먹을 만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까마귀는 질려 있었다.
인간들을 괴롭히고 죽이는데 혈안이 된 유물에게도. 그리고 질리지도 않고 유물에 세뇌되어가는 인간들에게도.
'그 까마귀 여신은 끝까지 인간을 옹호했지만.'
그래서일까.
[시끄러워죽겠군.]
까마귀는 한숨을 쉬었다.
[인간. 여기는 인간이 죽기엔 좋은 터가 아니다. 유물들에게 잡아먹힌다. 죽으려거든 저쪽으로 가서 죽으려무나.]
뭐, 말해줘봤자 인간이 제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지만 노예는 이를 아득아득 갈았다.
"가긴 뭘 가. 네가 옮겨줄 것도 아니면 닥쳐!"
[!]
그 외침에 까마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냐?]
인간은 유물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결코 같이 공존할 수 없는 이들이라고 여기지 않았었나.
하지만.
"아 시끄럽고! 너, 이 근방에 있는 신급 유물 몰라?"
사내는 분명히 까마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까마귀가 멍하게 있자 사내는 답답한 듯 외쳤다.
"귀 먹었어? 난 이곳에 있는 신급 유물과 계약해야한다고!"
그 말에 까마귀는 가볍게 탄식했다.
[소용없을 것이다. 어차피 계약은 못할 테니까.]
"뭐? 왜?"
왜긴 왜인가.
이 근방에 있는 신급 유물은 자신 뿐인걸.
[난 어느 인간하고도 계약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유물들이 냄새 맡고 오기 전에 어서 돌아가거라.]
그러자 노예는 같잖다는 듯 비웃었다.
"뭐래. 내가 필요한 건 크윽... 너 같은 새대가리가 아니라 이곳에 있다는 뱀 신이거든? 빌어먹을 그 노친네를 없애려면 그 비보라는 뱀이 필요하단 말이야."
[...]
아, 그러고 보면 이 근방에 뱀 놈이 둥지를 틀었다고 했나.
'분명 나가라는 서방 놈이었지.'
결국 까마귀는 탄식했다.
[알았나 인간. 그놈이라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았다. 놈은 여기가 아니라 옆 산 호수...]
"아, 기껏 죽을 고생을 해서 왔더니 이딴 약해보이는 새대가리만 있고, 뱀은 어디에 있는 거야! 그 아줌마, 돈만 쳐먹고 사기 친 건 아니겠지? 확실히 여기에 있다며!"
[그러니까 여기가 아니라 옆 산 호수...!!]
까마귀가 목소리를 높이자 노예는 미심쩍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옆 산? 확실하겠지? 이 딱 봐도 쓰레기나 먹을 것처럼 생긴 하급 유물 놈이."
울컥.
뭐? 누가 하급 유물이라고?
신급이란 걸 알든 모르든 상관은 없지만.
남들은 다 느끼는 기운조차도 못 느끼다니.
'지지리도 급이 낮은 유물사용자로군.'
까마귀는 한숨을 쉬었다.
아마 저런 수준이라면 나가한테 가기 전에 죽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노예가 말했다.
"아무튼 알았...다! 널 주워가고 싶지만 하급은 필요 없어서. 대신 마을 쓰레기장 알려주지. 캬 거기 음식물 쓰레기가 진짜 죽여주는데..."
아이고, 쓰레기는 무슨 쓰레기!
그러나 노예는 아파 죽으려는 주제에 자신만만했다.
"하여간 유물 놈들. 나한테 다 걸리면 다 죽었어. 그 비보라는 뱀 놈도 별거 아닐걸?"
결국 답답해진 까마귀는 눈을 부릅떴다.
[이 기본도 안 된 놈!]
"뭐, 뭐라고?"
[너 같은 놈은 옆 산의 비보는커녕, 하급(C급)한테도 얻어맞고 죽는다!]
"허, 어이가 없어서. 내가 왜 너 같은 하급 쫄따구한테 그딴 소리를...!"
[하급 아니다! 이놈아! 그 뱀 놈 보다 내가 세다! 서역의 하찮은 뱀 주제에!]
"아야! 아파! 쪼지 마! 나 아파, 진짜 죽어! 야!"
그렇게 까마귀는 홧김에 전대와 계약을 하고 만 것 같았다. 아무튼. 그래서일까.
굴러다닐 것 같은 모습이라 이건 뭐 미인계(?)도 쓸 수 없지. 권력도 없지. 재력도 없지. 유물 다루는 능력은 형편없지.
유물들은 까마귀가 선택한 노예 주인을 보며 비웃었다.
[그 동방 까마귀 놈. 정말 왕위에 관심이 없나보네. 1승을 양보하려나보다. 거저먹기로군.]
[아냐 현명해. 주인이 괴로워하는 꼴을 보기 위해서 저런 주인을 택한 거지.]
그러나 아무도 마제스티가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천한 노예는 전설이 되었고, 당당하게 마제스티가 되었다.
15년에 걸친 긴 마제스티 쟁탈전.
비보 전쟁이었다.
물론 그 노예가 마제스티가 되었을 때도 유물들은 말했다.
[역시 괜히 군단장급이 아니시네. 저런 인간을 골랐던 것도, 사실은 일부러 길들이기 쉬운 놈을 고른 거야.]
[역시 엘리트 까마귀. 주신들에게도 인정받을만해.]
[그런데 그 마제스티 놈의 인간 친화정책, 짜증나지 않아?]
[걱정 마. 주신들이 까마귀를 설득하러 갔어.]
[까마귀도 그 머저리 같은 마제스티를 처리하겠지.]
그런데.
[미쳤느냐?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커헉!]
[까마귀, 까마귀가 미쳤다!]
***
오딘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 듯했다.
[까마귀는 설득하러 간 주신들과 주요 신급들까지 삼켰다.]
동시에 오딘의 어깨에 뭔가가 앉았다.
그건 오딘이 부리는 까마귀 중 하나.
[놈은 내 형제도 삼켰어!]
그 말에 주헌이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주신들이 까마귀에게 뭐라고 설득하러 갔는데?"
[인간 말살. 마제스티에게 최저한의 인간만 남겨두고 지옥불에 넣으라고 했다. 거부하면 마제스티를 죽여서 교체하겠다고.]
그런데 도리어 마제스티를 죽이려는 신급들을 삼켜버렸다는 것이다. 뭐, 그때는 유물 반란이 일어나기 전.
프로메테우스 같은 놈들이야 눈엣가시들을 처리해줬으니 도리어 까마귀를 좋아했지만...
'그것도 유물 반란 전 이야기지.'
[어쨌거나 그 까마귀는 자기 동지보다 인간을 택한 것이다!]
[신급 유물이라는 놈이 하찮은 인간 따위를 마음에 품다니.]
그 말에 주헌은 이죽거렸다.
이제 대충 까마귀의 정체도 알 것 같고.
"그래서. 마제스티를 죽인 복수로 세상에서 유물의 존재를 없애려 하는 거라고?"
[그래. 유물이 인간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다 없애려는 거라고.]
[본인도 유물이라는 걸 망각한 건지!]
하지만 주헌은 하하 웃는 것이었다.
"까마귀 괜찮네. 역시 필요하겠어."
유물들은 기겁했다.
[제정신이냐? 그놈이 나오면 네가 쓸 수 있는 유물도 전부 사라진다는 의미야!]
"글쎄? 니들 말은 즉. 말 안 듣는 놈은 죄다 까마귀로 없애버리고. 말 잘 듣는 놈들만 남겨 둘 수 있단 의미도 아닌가?"
[이놈이...!]
"공포정치를 펼치기엔 나한테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러자 오딘은 주헌이 마음에 안 드는 듯, 눈을 번득였다. 그때도 오딘은 마제스티를 탐탁지않게 여겼고, 죽이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역시. 네게서도 그 불결한 마제스티의 냄새가 나는 구나.]
그렇게 오딘이 중얼거리자 다른 유물들이 말했다.
[까마귀와 계약한 인간 놈이잖습니까.]
[비슷한 냄새가 날 수밖에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마제스티의 옥좌가 발동되지 않았던 게 대충 30년 전인가, 25년 전인가...'
그건 분명 시체에서 전대의 영혼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오딘은 생각했다. 그리고 얼추 주헌의 나이도 그 정도.
하지만 동일 인물이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냄새와 오라가 달라.'
무엇보다 전대는 친화력이 엄청 났었다.
마제스티인 이상 어쨌거나 능력은 뛰어났지만, 호구.
그리고 주헌의 경우 현생에서는 일부러 친화력을 죽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전생이라고 해서 그와 똑같았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물을 사용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고.'
전대의 재능을 이어받았다기 보다는 스스로 길을 개척한 느낌. 아무튼 느낌이 왔다.
'전대 놈은 우군이라 문제였지만, 이놈은 아예 폭군이 될 놈이다.'
그래서 더 골치 아프고 위험할 놈!
하물며 전대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인류애는 있는 것 같으니, 여러 의미로 더 욕 나오는 상황이었다.
결국 오딘의 선택은 간단했다.
[역시 네놈은 이 자리에서 없애야겠다. 그리고 내 유물 내놔!]
"꺼져! 니 유물이나 내놔. 목대가리 내놓으라고!"
곧 주헌의 시선이 어딘가에 정확하게 꽂혔다.
***
한편 그 무렵이었다.
"하하, 드디어 찾았다."
주헌이 오딘과 맞붙고 있을 그 무렵, 포교왕은 저승에서 기어이 권 회장을 찾아냈다.
서주헌이 다른 곳으로 옮겼을 땐 못 찾아내나 싶었지만, 괜히 전직 사황이 아니었다.
"커헉..."
포교왕은 자신을 알아보는 듯한 권 회장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곧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는 주헌의 독보적인 함정을 경계했지만, 의외로 함정은 발동하지 않았다. 아니, 발동하기는커녕 오히려 함정이 저절로 사라졌다.
'서주헌이 일부러 풀어준 건가?'
하지만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건 기회다.'
포교왕은 재빨리 유물을 사용했다.
그러자 섬광과 함께 떨어졌던 권 회장의 목이 붙었다.
"커, 커헉!"
권 회장은 목이 붙자마자 숨을 돌렸다. 물론 고통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목숨만 부지했다 정도지, 목이 잘린 고통은 여전했다.
포교왕은 권 회장을 꼼짝 못하게 하고 있던 수술대 유물도 파괴해버렸다.
콰직!
그러자 권 회장은 자유가 되었다.
"괜찮으십니까?"
"자네...!"
권 회장은 바로 포교왕을 경계했다.
그건 당연했다. 그는 과거 마제스티를 노리고 싸우던 사황. 진채원이 키이라를 보고 원수 취급했듯이, 권 회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의 권 회장은 과거의 기억이 있는 상태.
"네 이놈. 감히 내 딸을...!"
하지만 포교왕은 이럴 때가 아니라고 했다.
"예예, 저한테 원한이 있는 건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주헌이 먼저입니다."
"!"
서주헌.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권 회장은 움찔했다. 기억이 돌아온 지금, 주헌은 공포의 상대였으며 증오의 대상이었다.
"놈은 조금 있으면 마제스티가 될 지도 몰라요. 함께 가죠. 대감옥에 들어갈 방법은 있으니."
그러자 권 회장은 분노에 파르르 떨면서도 눈을 부릅떴다. 서주헌에 대한 분노, 그리고 까마귀에 대한 탐욕이 들끓었다. 그 모습을 보며 포교왕은 웃었다.
"하하. 뭐 그 전에 이 지독한 저승의 함정부터 탈출해야 겠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번쩍!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권 회장과 포교왕이 사라지는 그 순간이었다.
"!"
오딘과 싸우고 있던 주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노친네가 풀려났다.'
이상했다.
왜 발동되어야 할 함정이 전혀 발동하지 않았지?
하지만 이상할 것도 없어 보였다.
오딘이 한쪽 눈을 번득이며 소름끼치게 웃었던 것이다.
[자네는 절대로 까마귀를 얻을 수 없어.]
그랬다.
'이놈의 짓이구만.'
오딘은 이 감옥에서도 특기인 주술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있는 놈.
자신이 저승의 일을 컨트롤 하고 있다는 걸 바로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눈치챈 오딘이 권 회장의 함정을 풀어준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그러고 보면 전대도 증오하던 대상이 있었지?]
전대 마제스티가 저주하던 상대는 제국의 왕. 그리고 까마귀를 놓고 싸우다가 결국 실패, 유물을 잡아먹으며 거미 총수가 되어버렸던 놈.
[전대는 그놈한테 죽을 뻔했네. 그리고 자네도 똑같은 길을 걷게 될 거야.]
하지만 주헌은 비웃었다.
"뭐래, 등신이."
주헌은 갑자기 오딘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가 집어 든 것은 다름 아닌 거인의 잘린 머리!
미미르의 목이었다.
그 숨겨져 있던 목을 보자마자 오딘은 경기를 일으켰다.
[잠깐, 그건!]
그건 세상의 온갖 지혜를 말해주는 지식의 보고 유물. 까마귀가 있는 장소도 알아내고, 간수들을 상대할 방법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하하하, 고맙다. 자식아! 이걸로 난 까마귀한테 간다!"
오딘은 다급해졌다.
[모두 저 인간을 막아라! 절대로 이곳에서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딘은 감옥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북유럽 유물들이 우르르 나오면서 주헌을 노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간수! 여기에 서주헌이 있다!]
그들은 상급 간수들까지 불러댔다. 곧이어 소리를 들은 간수들이 순식간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서주헌을 잡아라!]
주헌은 황급히 미미르의 목을 발동했다.
번쩍!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주헌이 까마귀의 진짜 이름을 외쳤다.
"자! 삼족오(三足烏)가 있는 곳을 내게 말해라!"
거인의 목은 흔쾌히 응했다.
[그 정도야 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