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해체되는 아성들 (4)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책이 거부를 합니다.]
[한 하늘 아래, 두 주인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주헌은 책을 놓치고 말았다.
그 모습에 주헌은 황당해했다.
뭐? 두 주인?
'두 주인은 개뿔.'
"야. 전대 마제스티는 죽었잖아. 왜 못 따르는데?"
그러자 메시지가 또 떠올랐다.
[책이 당신이라면, 한 하늘 아래 두 지아비 지어미를 둘 수 있겠냐고 물어봅니다.]
책 주제에 뭐라는 건지.
물론 그뿐이 아니라는 듯, 책은 당당하게 주헌을 거부하고 있었다.
[친화력이 수준 미달입니다.]
[책이 당신을 무척이나 상스러워합니다.]
[계약은커녕, 애초에 도서관의 출입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헌은 기가 막혔다.
"어쭈, 이것 봐라? 이게 재보라고 나름 오냐오냐 다뤄주니까."
그리고 그럴 때였다.
일리야가 슬금슬금 뻗은 손을 주헌이 콱, 밟았다.
"뭐하는 거냐, 일리야."
일리야는 주헌을 보며 히죽거렸다.
"단장. 이거 딱 견적 보니 이거 친화력을 써야 하는 유물이잖아."
"그래서."
"단장은 친화력 고자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도와주려는... 커헉!"
일리야는 손이 찢길 것 같았다.
"야아아악! 내 손, 내 손!"
"꺼져. 이건 내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을 안 듣는 새끼는 매가 답이지."
동시에 주헌이 칼을 꺼내 책에 쑤셔 박았다.
책은 캬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물론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주헌이 자신의 유물 하나를 발동했다.
그건 다름 아닌 마제스티의 키!
번쩍!
'애초에 아카식레코드는 도서관, 이 책은 단순한 입구야.'
즉, 이 유물은 공간형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만큼 강제로 문을 따서 들어갈 수 있을 테고!
아니나 다를까, 곧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제스티의 키로 도서관의 문을 강제로 열어냅니다.]
눈알을 도려낼 것 같은 강한 섬광, 그렇게 눈을 시리게 하는 빛이 얼마나 계속 되었을까.
팟!
주헌의 몸이 어디론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섬광이 사라지고, 눈을 뜬 주헌은 깜짝 놀랐다.
'!'
눈앞에 펼쳐진 건 낯선 풍경이었다. 그곳은 바로 거대한 돔의 실내. 상당히 고요하고 웅장해보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굳이 비교하면 푸른빛이 솟아나고 있는 신전 건물.
신전 건물엔 책들로 가득했다. 천장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바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사방을 가득 메운 책들은 분명 이 세상의 모든 기록이리라. 곧 고개를 돌리던 주헌이 뭔가를 발견했다.
'저건...!'
돔의 중심부에서 빛의 에너지가 구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빛은 계속해서 뭔가를 써내려가고 있는 듯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역사를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틀림없어. 저게 아카식레코드 본체.'
그런데 이때였다.
"여기가 아카식레코드 내부야?!"
"!"
사제들이 옆에 있었다. 아무래도 주헌을 붙잡고 딸려온 것이리라. 그 숫자는 10명 정도. 그들은 몹시 기뻐하고 있었다.
"저희가 해냈습니다!"
"이 안에만 들어오면 역사도 바꿀 수 있어요!"
천하의 요한도 이곳에 들어오려 했지만 죄다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요한을 제치고 자신들이 안에 들어오다니!
"이걸로 세상의 모든 유물은 바티칸의... 아니 우리들의...!"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아아아악!"
"커허어억!"
사제들의 머리와 몸이 폭발하며 터져나갔다.
콰직! 콰직!
"!"
참혹한 광경이었다.
남은 건 그들이 입고 있던 옷과 가지고 있었던 천사형 유물들 정도. 어떻게 된 건가 싶을 때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입자는 자동으로 처결됩니다.]
[마제스티 외엔 그 누구도 이 공간에 침범할 수 없습니다.]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인 목소리.
그것은 틀림없는 아카식레코드이리라.
그걸 눈치챈 주헌이 비웃었다.
"난 살려주는 걸 보니, 마제스티로 인정하나 보지?"
***
주헌은 솔직하지 못하다며 웃었다.
그러나 도서관은 칼같이 답했다.
[아뇨. 당신은 나의 마제스티가 아닙니다.]
"!"
[지금도 그저 까마귀 때문에 반쯤 마제스티로 인정되고 있을 뿐이죠.]
"오?"
아무래도 아카식레코드는 주헌의 존재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한 게, 까마귀가 이 도서관을 이용해 주헌에게 과거 기억을 덧씌워졌으니까.
[까마귀는 마제스티 재보로 승격한 비보로, 재보 중 왕관(crown) 입니다. 마제스티의 자격을 부여하는 재보죠. 그러니 그런 유물과 가계약을 한 당신은 이미 반 정도는 마제스티. 그래서 다른 마제스티의 재보도 사용할 수 있는 것뿐입니다.]
마제스티가 아니니 착각하지 말라는 듯한 뉘앙스였다. 결국 주헌은 비웃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도 그렇고.'
틀림없이 아카식레코드는 전대를 좋아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딴 건 주헌이 알 바 아니었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네놈을 쓸 수 있다는 거거든?"
[!]
그 말과 함께 주헌은 주변의 책을 뽑아냈다.
마제스티 외에는 뽑아낼 수 없는 서고의 책을!
덕분에 아카식레코드는 당황했다.
[잠...!]
하지만 주헌은 같잖다는 듯 웃었다.
사실 유물이 어떤 생각을 하든 그것 역시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이곳의 책이면 놈들의 유물 기능도 바꿀 수 있어.'
그리고 그가 자신 있게 뽑아든 책은 다름 아닌 '원탁 유물' 관련 책!
동아줄이 기특하게도 이거라며 찾아내준 책이었다.
"자 그럼 이걸로..."
주헌은 책을 펼쳤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추천 원탁 유물 레시피 100선>
<이대로만 하면 마제스티님의 그녀도 좋아서 못 배길 걸!>
<마제스티님께 꼭 필요한 지식을 헌상합니다!>
<원탁에서 신나게 즐겨보자구요!>
"...?!"
주헌은 순간적으로 제 눈을 의심했다.
심지어 내용물은 19금. 당황한 주헌이 물끄러미 동아줄을 보았다. 동아줄은 칭찬해달라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거 맞지? 맞지?
결국 빡친 주헌이 책을 부욱 찢어던지자, 동아줄은 기겁했다.
이거 아냐? 아냐?
뭐, 주헌도 동아줄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책 같은 건 착각할 만하군.'
결국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의 책을 닥치는 대로 꺼내서 보았다. 하지만.
[코디 유물 사용법- 위엄 넘치는 마제스티를 위한 오늘의 코디]
[사회적 유물 사용법-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한 발성법]
왜 죄다 이 따위냐.
'여긴 아카식레코드잖아? 왜 이딴 쓸모 없는 것들이...!'
그리고 그 의문에 답하듯, 아카식레코드가 탄식했다.
[거긴 전대 마제스티가 애용하던 공간입니다. 인간이라면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허."
'아니 그 새끼는 도대체 생전에 뭘...'
총수의 기억을 봤을 땐 멀쩡하게 생겼었는데 말이다.
심지어 자신하고 약간 닮은 것 같아서 거참 아까운 놈(?)이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잘 죽었다. 개새끼.'
결국 주헌은 빡친 듯이 빛 덩어리에게 향했다.
"됐고. 좋은 말로 할 때 내가 찾는 유물의 기록을 대령해."
[마제스티가 아니면 허용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꺼내. 죄다 여기 박살 내기 전에."
그 흉흉한 미소에도 도서관은 소나무처럼 한결같았다.
[자격이 없는 자는 권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침입자를 처결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주헌에게 벌떼들처럼 날아드는 파수꾼들!
하지만 우습다는 듯 주헌은 바로 치우 가면을 뒤집어썼다. 곧 오라가 폭발하고, 파수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터져나갔다.
콰앙!
치우의 힘은 엄청났다.
결국 도서관 내부가 박살이 나자 아카식레코드는 몹시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주헌은 빛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거참, 전 주인에 대해 충성심이 높은 건 나도 좋아해. 높게 평가하지. 그래도 정도껏 해야지, 이리 꽉 막혀서야..."
[무력행사도 소용없습니다. 이곳은 오직 위대한 마제스티의 공간. 침입자에게는 벌이...]
그런데 그때였다.
쿵!
주헌이 빛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카식레코드의 권능을 사용합니다.]
[원탁의 유물 기록을 불러옵니다.]
주헌의 명령 탓인지, 레코드의 의지와 관련 없이 도서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빛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그 책은 바로 주헌이 바라던 기록.
그것이 마침내 주헌의 앞에 나타났다. 내용물은 확실한 원탁의 유물에 대한 기록!
그것이 툼글리프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주헌은 그걸 보며 씨익 웃었다.
"자식, 진작 이렇게 줄 것이지."
하지만 아카식레코드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저건 자신의 의지로 불러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저 인간이 날 다루었다.'
아무리 주헌이 까마귀 때문에 마제스티의 재보를 쓸 수 있다곤 해도...!
'설마 왕인가.'
아카식 레코드가 크게 떨었다.
'설마 왕이신 건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주헌은 책을 훑어내려갔다.
해석에 어려움은 없었다.
남들은 한 글자 읽기도 벅찬 툼글리프를 술술 읽어 넘기던 주헌이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딱 고치기 좋은 곳 발견."
***
한편 그 무렵.
"와아아아아! 판도라를 쓸어라!"
"당장 해체해라!"
주헌이 아카식레코드 내부에 있을 그 시각.
전 세계에는 폭동이 일어나 있었다.
주헌의 부하들이 터트린 새로운 증거들은 전 세계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
언노운만으로도 이미 신뢰를 잃은 마당에 추가로 터져 나오는 증거들.
특히 유물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기록들과, 사람들이 죽을 걸 알면서도 묵인한 그들의 기록은 세상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계의 판도라 지부를 무너트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지부들이 무너지고, 남은 곳은 맨해튼에 있는 판도라 본부.
그중에서도 드루이드의 탑뿐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판도라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너희들 같은 기관은 더 이상 필요없다!"
주헌이 아카식레코드에 들어가 있는 사이에 이 정도로 폭동이 진행된 건, 필시 시간의 흐름 차이이리라.
아카식 레코드보다 바깥의 시간 흐름이 훨씬 빨랐으니까.
그리고 드루이드의 탑. 이사회의 건물에서는 욕지거리가 나오고 있었다.
"젠장, 우리가 이게 무슨 꼴입니까!"
"바깥에 저 사람들은 어쩔 거고요! 빨리 치워버려요!"
"이래서는 집에도 못 가잖아요!"
그 말에 다른 이사들이 비웃었다.
"어차피 이 철벽의 탑은 신급 유물로 지랄해도 못 부숩니다."
"하긴, 그리고 오히려 이게 잘된 걸 수도 있겠어요. 이제부터는 괜히 눈치 보지 말고, 무력으로 시민들을..."
그리고 그럴 때였다.
쾅!
드루이드의 탑에 폭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시민들의 비명 소리 역시 처참하게 퍼졌다.
"꺄아아악!"
"아아악!"
그 비명에 이사회 구성원들은 킥킥 웃었다.
"벌써 시작했네요. 기사들이 사람들을 죄다 사살한다더니."
"그러니까 주제를 알아야지. 개돼지들이."
"아, 하려면 빨리 좀 해요. 오늘은 아들의 생일파티가 있단 말입니다."
바깥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원탁의 기사들과 판도라 병사들은 물론 무기를 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망치는 사람들끼리 모두 싸잡아 공격했다. 판도라를 거스르는 자들은 모두 주적이라고 했다.
"살려주세요, 엄마, 엄마!"
"아아아악!"
이 소식에 주헌의 부하들은 물론, 아이린, 조지 홀튼 등 아군이 왔지만 놈들은 치사했다.
"와, 저 새끼들. 진짜 약아 빠졌어!"
놈들은 자신들이 오자 철벽의 탑.
드루이드의 탑에 숨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쥐새끼처럼 숨어 공격만 날려댔다.
쾅! 쾅쾅!
"아아악! 살려주세요!"
그리고 그 탑은 궁니르도 뚫지 못하는 철벽.
조이의 열쇠 힘으로도 열기는 힘들었다.
결국 최대한 보호벽을 펼치던 단원들을 탄식하며 율리안을 보았다.
"부단장님, 저걸 뚫을 방법은 없나요?"
그러나 열심히 공격하며 공명의 유물을 쓴 그도 힘들어 보였다.
"젠장, 저건 방법이 없어...!"
결국 유재하가 즉석 건물을 만들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빨리 피해요! 빨리!"
클로에와 그레이브 컴퍼니는 그 안에서 치유 유물을 풀어 다친 사람들을 치료했다.
그리고 그 난리통에서 사람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봐!"
"힘내! 이 안에만 들어가면 판도라 수장들이 있어!"
"우리 부모님의 원수!"
쿵! 쿵!
사람들은 드루이드 탑의 문을 부수려고 했다. 물론 그 광경을 보며 이사회들은 비웃었다.
"그렇게 들어오려고 별 지랄을 해봤자 이 탑은 꼼짝도 안한다니까."
"냅둬요, 원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잖아요."
"그래요. 우리는 일이 끝날 때까지 원탁에서 한숨 잠이나..."
그런데 그때였다.
"어, 어? 잠깐. 저거 문이 열린 거 아닌가?"
"네? 그게 무슨 개소리..."
그러나 그들은 곧 제 눈을 의심했다.
"야! 뭐, 뭐야! 저거!"
진짜로 철벽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심지어 저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