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해체되는 아성들 (3)
일리야는 순간 제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분명히 지금 방금 다른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리고 그 목소리가 자신이 아주 잘 아는 목소리라는 걸 파악했을 때.
일리야는 끔찍한 공포를 느꼈다.
왜, 흔히 공포영화에서 나오지 않나.
뒤에서 괜히 오한이 느껴질 때.
그래서 뒬르 돌아보면 죽을 것 같은,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괜히 돌아보다가 죽는...
"그래서 저거 먹겠다고? 그럼 적인 거네?"
에라이 젠장!
차라리 뒤를 보지 말 걸!
결국 일리야는 거품을 물고 도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쾅!
"아아아악!"
책장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도주로가 막히고 말았던 것이다. 주헌은 웃었다.
"그래도 마제스티의 재보를 노리다니, 역시 내 부하. 배짱이 두둑하구나."
일리야는 기겁했다.
'뭐라고? 저게 마제스티의 재보라고?'
아이고 미쳤지!
결국 다급해진 일리야가 황급히 외쳤다.
"다, 단장! 아니, 그게요! 그게 아니라요."
이 인간이 왜 여기에 있나 싶긴 하지만, 손에 들린 궁니르를 보니 묻지 않아도 뻔한 일.
필시 타겟을 자신으로 하고 날아온 것이리라.
왜?
지금의 주헌이 아카식레코드를 타겟으로 삼고 날아오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으니까.
괜히 주신급 유물이 아니었다.
만능이긴 하나, 노리는 대상이 어려운 것일수록 리스크는 더욱 올라간다.
인간이 유물을 쓰는 이상, 리스크는 어쩔 수 없는 일.
'뭐, 마제스티라면 리스크 부담 없이 유물을 쓸 수 있다고 한 것 같지만.'
아무튼 그래서 요한에게 위치를 물었던 것이다.
설령 리스크를 감안하고 궁니르를 던진다고 해도 위험했다.
그건 당연했다. 만약 유물이 있는 장소에 개 같은 유물이 설치되어 있다면? 상당히 곤란한 장소라면?
'속도가 워낙 빠르니 상황을 눈치채기 전에 세우기도 힘들고.'
설령 궁니르만 먼저 날려보낸다고 해도 적들이 눈치챌 계기를 제공하는 것뿐.
그런 걸 감안하지 않고 무작정 궁니르를 날려보낸 다는 건 여러 가지로 손해였다.
아무튼 그렇게 재보를 찾아온 건 좋은데.
"그래, 미안하다. 평소에 내가 너무 독식하는 경향이 있었지."
이놈의 단장이 단원을 죽이려고 들었다!
곧 주헌이 말했다.
"너희도 유물을 가지고 싶을 텐데 그걸 왜 몰랐을까. 좋아. 유물은 줄게."
"...저, 정말?"
"그래! 정식적인 무덤의 룰 대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리야는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앞머리가 날아갔다. 그리고 사방에 흩어지는 은빛 머리카락! 정신이 아득해진 일리야가 울부짖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지!"
심지어 이건 단원을 상대하는 칼날이 절대 아니었다! 진심일 때 나오는 몸놀림!
'애초에 정식적인 무덤의 룰이라니!'
그건 최후의 생존자가 가져간다는 데스매치!
그래서일까.
"단장, 농담. 농담이에요! 알잖아! 나 유물 필요없으니까!"
"아냐. 그동안 단원이라고 내가 너무 무시했어. 다들 어엿한 발굴꾼들인데. 생각해보니 다른 무덤에서도 좀 여유를 피운 것 같군."
"저, 저기...!"
"사과의 뜻으로 정식적으로 데스매치를 요구한다."
아니 필요없는데! 그냥 무시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럴 때였다.
쾅!
"당장 거기서 나와라!"
비밀서고에 고위급 성직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거냐!"
"특히 일리야! 넌 전 바티칸 사제였던 자가 이런 짓을!"
"동료들을 배신하니까 좋더냐! 은혜를 받아 구마사제의 자격까지 얻었으면서...! 그 신임을 버리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서주헌 같은 놈한테 붙어서!"
그들은 서고를 수색하며 눈을 번득였다.
그런데 이때였다.
"닥쳐, 단장한테는 빚진 게 있다고! 못 가!"
소리가 들린 곳은 구석진 곳.
곧 일리야가 다급하게 튀어나오며 외쳤다.
"시팔, 근데 지금은 바티칸으로 다시 돌아갈래!"
"?!"
큰 폭발 소리와 함께 사제들이 경악했다.
일리야가 뛰쳐나온 공간에서 무시무시한 화염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커허헉!"
상상을 초월하는 화기.
그리고 그 불길을 등진 채 여유롭게 걸어나오는 주헌이 눈을 번득였다. 그의 시선이 향한 건 다름 아닌 추기경과 주교들.
"경쟁자가 또 늘었네? 역시 좋은 유물은 다르구나."
"히익...!"
곧 사제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리고 그 무렵.
[크아아아악!]
유재하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덜덜 떨고 있었다.
그건 아직 일리야와 연결이 끊어지지 않은 전화.
'이건 뭐 굳이 묻지 않아도 뭔 일이 있는지 다 알겠구만.'
그리고 정작 주헌의 재보를 노렸던(?) 일리야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아마도 끔찍한 비명 후에 목소리가 끊겼으니, 무사하진 못하겠지.
'이 불쌍하고 어리석은 놈.'
"그러니까 왜 노려도 아카식레코드를 노리냐. 마제스티의 재보라는데."
"그래도 일리야가 바티칸의 성직자였을 줄은 몰랐는걸."
"그건 그래."
누가 그놈을 보고 사제라고 생각하겠는가.
신앙심은 개뿔이. 심지어 악마를 다루는 놈인데.
"애초에 단원들이 전에 뭐하고 살았는지는 단장님만 알잖아."
그건 그랬다.
단원들의 과거사는 서로서로 묻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게 자체적인 규칙이었다.
"그래도 성직자가 악마를 다루다니, 이 무슨 거지 같은 적합력이냐."
하지만 설아는 생각이 좀 다른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적합력이 높은 거 아냐? 구마사제라 악마랑 가까웠을 테니."
"구마사제면 그 뭐야. 엑소시스트 같은 건가? 악령에 씌인 사람들한테 막 주문 읊고 성수 뿌리는?"
"아무튼 이제야 단장님이 그 새끼한테 왜 업보가 많다고 했는지 알겠어. 생각해보면 그 새끼 사제였다면서 여자친구가 있던 거잖아?"
유재하는 배덕하기 짝이 없다며 음흉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자식 완전 놀게 생겼으면서 실은 동정일지도 몰라. 신부님이잖아? 아니 여자친구라는 것도 사실 상상일지도."
유재하는 캭캭캭 웃으며 좋아했다.
분명 한 번이라도 사귀어본(?)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설아는 완전 거짓은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왜?
'얜 모르겠지만, 악마를 다루는 조건이 대충 그런 걸 테니까.'
자신이 귀신을 다루는 조건도 가족등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죽음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이때였다.
"어머, 우리가 제일 꼴찌인가 보네."
단원들이 있는 곳에 클로에와 단이 왔다.
그들의 손에는 처음 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그건 바로 판도라에서 빼돌린 새로운 증거물.
그랬다.
주헌이 바티칸에 가 있는 사이, 다른 단원들은 명령을 받고 각자 다른 판도라 시설을 털고 있었던 것이다.
'판도라의 완전한 해체를 위해.'
유물을 가지지 못한 자는 낙오자가 되던 그 시절.
그 원흉이 되던 독식자들의 구조 자체를 완전히 박살 내기 위해. 물론 지금까지는 판도라 시설을 습격한다는 건 상상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간 주헌이 펼친 견제, 왕급이 된 자신들, 조이가 만들어준 열쇠까지.
미래를 조금씩 바꾸면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
'과거에 있던 독식자 체제는 완전히 해체된다.'
단원들은 눈을 반짝였다.
***
그리고 그들의 생각대로였다.
[판도라, 유물의 존재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유물이 나타나기 전부터 연구 지속.]
[유물의 존재에 대한 보고서 발견 "15년 전 문건."]
[유물증후군의 존재도 수십 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어...]
[이를 알고 있던 이들은 누구누구인가.]
[당시 유물의 존재를 비밀로 한 이유? "사회에 혼란을 야기하고 싶지않았다."]
[하지만 당시 장관에게 보내진 편지, 내용은 달라 "공표해봐야 경쟁자만 늘어날 뿐." "사람들이 유물증후군에 대비하지 못하면 오히려 경쟁자도 줄어드는 것이 아니냐."]
"이게 다 뭡니까!"
"왜 자꾸 터져요 터지기는!"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아니 자신들도 잊고 있던 문서들이 자꾸 어디서 나오는 건지. 결국 그들이 외쳤다.
"젠장 그놈들은 어떻게 알고 털어가는 거야!"
"아무튼 위조문서 건이라고 주장해! 호구왕이 만든 사기문서라고 공표하라고!"
"그 말을 지금 상황에서 과연 믿어줄까요?"
판도라는 탄식했다.
아니, 이런 정보를 하루아침에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분명해. 누가 정보를 판 거야."
"도대체 누가...!"
그런데 그럴 때였다.
"누구긴 누구야. 나지."
"!"
바빠 죽을 것 같은 판도라 본부.
드루이드의 탑 원탁의 유물 앞에 낯익은 누군가가 나타났다.
"당신은!"
원탁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권혁수.
그는 원탁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등장에 판도라 이사회는 활짝 웃었다.
"잘 왔네! 빨리 이 상황을 막아주게. 한시가 급해!"
그러나 권혁수는 150명 정원의 원탁 유물을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미안한데, 이제 판도라는 메리트가 사라졌어."
"뭐라고?!"
"애초에 마음에 안 들었거든. 왕급도 아닌 평범한 놈들이 권력자란 이유로 불사의 호사를 누리고 말이야."
원탁의 유물은 13명의 원탁의 기사들 외에, 137명이 더 앉을 수 있는 자리.
거기에 자리를 배정받으면 마치 비보를 쓴 것 같은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불로불사의 불로초 유물이나, 다른 여타 신급 유물 정도보다는 기능이 딸리지만, 글쎄.
기본적으로 비보를 가져야만 누릴 수 있는 초인의 조건을 일부 얻을 수 있다. 체력이 좋아지고, 장수, 건강 등 심지어 정력까지도...!
원탁의 일원이 되려고 세계 각국의 기업인들과 정부 및 각계각층의 원로들이 난리도 아니었다.
"실제론 C급 유물도 못 쓰는 돼지놈들이 돈으로 매매한 자리에서 왕급들을 깔보는 게 맘에 안 들었어."
주제를 알아야지.
"누가 누굴 뽑아? 니들이 마제스티를?"
그리고 사황급 권혁수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이 무서워 원탁의 구성원. 즉 이사회는 당황했다.
"이봐, 자네 왜 그러나. 우리 같은 원탁 일원이 아닌가."
그 말에 권혁수는 하하 웃었다. 사실 그가 원탁을 도왔던 건 앉아서 유물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다. 뭐, 자신이 마제스티가 되어 이익을 얻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자살골.
왜?
'유물들은 애초에 인간왕을 싫어해.'
전대 마제스티도 유물들에게 살해당했다고 들었다.
그 강력했던 유물왕까지 살해당한 것이다.
그리고 권혁수는 괜히 그런 모험을 하긴 싫었다.
그래서 판도라를 도우며 떨어지는 떡고물을 챙기려 했던 것뿐. 이러니저러니 해도 판도라엔 프로메테우스라는 유물의 수장도 있었고.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프로메테우스는 나가리가 되었고, 게다가.
"주헌이는 다르거든."
유물들은 주헌을 무서워했다.
게다가 과거와 달리 그만한 능력도 생겼다.
충분히 올인을 해볼 만한 상황이 아닌가.
잘만 비위를 맞추면 마제스티가 된 주헌에게서 떡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판도라는 이제 쓸모없어."
결국 참다못한 이사진들이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당장! 당장 저놈을 원탁에서 제외시켜!"
"그러든가. 난 딱히 원탁에 미련이 없어서."
"허!"
그들은 눈을 부릅떴다.
"권혁수! 니놈들이 우리를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 생각 마라. 개돼지 같은 것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별짓을 다 해도, 우리는 원탁에 앉아 있는 이상 불사야. 어떻게 못 한다고!"
"금방 재기할 수 있어!"
"사람들도 불사의 존재 앞에선 무력함을 깨닫겠지!"
그러자 권혁수는 낄낄 웃으면서 원탁에 있던 자신의 물건을 찾아갔다. 그건 자신이 즐겨 먹던 사탕이었다.
"그 잘난 원탁의 유물도 곧 무용지물이 될지 모르는데."
아카식레코드.
인간, 유물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기록이 적혀 있는 대도서관. 무엇보다 아카식레코드를 활용하면 사람의 과거도, 성격도, 능력도 전부 고쳐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유물에게도 통용되는 이야기.
"부디 원탁이 제 기능을 하길 바라지."
그 유물은 최강이었다.
아마 그거면 유물의 능력을 바꾸는 건 물론, 리스크도 삭제할 수 있을 터.
그리고 그걸 다루는 주헌은 정말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되겠지.
***
그리고 비슷한 시각.
"아, 정리 다 했네."
비밀의 서고에서 난동을 부렸던 주헌은 손을 탈탈 털고 있었다. 자신들을 죽이려던 사제들은 이미 싹 처리했고, 일리야 역시 구석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커, 커허억..."
입에 고인 피 맛이라는 건 이런 거구나.
간만에 제대로 피 맛을 본 그였다.
그는 주헌이 단원들에게 진심이 되지 않는 걸 진심으로 신께 감사해야 했다.
그리고 서고를 훑어보던 주헌은 번쩍이는 유물을 향해 다가갔다. 그건 서고에 꽂혀 있던 번쩍이는 책 하나.
'이게 아카식레코드인가.'
비밀서고에 뿌리를 내리기엔 장소가 너무 비좁아 보이긴 하지만...
아무래야 좋았다.
'계약이다.'
주헌은 강력한 지배력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