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동료인 척하지 말고 (1)
요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판도라에서 보내온 CCTV 영상물을 보았다. 우스운 건, 그 난리 통에서도 영상이 멀쩡했다는 것이다.
마치 일부러 영상 하나는 남겨둔 것 같은.
그리고 영상에는 놈이 분명히 찍혀 있었다.
'서주헌.'
그 악마 같은 놈의 면상이.
하지만 놈이 뱀을 처리하는 광경은 같은 유물 사용자로서 경외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단장님! 위에, 위!]
레비아탄은 사납게 몸부림을 치며 주헌을 잡아먹으려고 했지만...
[악!]
주헌은 곧바로 치우의 가면을 썼다.
그러자 주헌은 바로 검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쿵!
레비아탄은 미친 듯이 주헌을 찍어 내렸지만, 안개로 변해버린 주헌을 으스러트릴 순 없었다.
요한은 그걸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분명 마제스티의 재보, 귀신의 투구.'
무엇보다 저건 인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물이었다.
치우가 인간에서 신이 된 것처럼, 인간을 신의 존재로 만들어줬던 유물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런 유물이기에 도리어 프로메테우스나 호루스 등, 신급 유물들이 마제스티를 죽일 수 있던 유물이었다.
왜?
'유물한테는 규율이 있었다지.'
지금이야 폐기물이 되었다지만, 당시엔 누구나 지켜야 했던 유뮬의 규율.
내용은 길지만, 결국 근본적인 내용은 하나였다.
[인간을 공격해선 안 된다.]
그러니 당연히 마제스티도 공격할 수 없는 게 원칙이었지만 글쎄.
'투구를 썼을 땐 왕도 인간이 아니지.'
그래서 신급 유물들은 당시의 마제스티도 죽일 수 있었다고 했다. 유물이 인간을 죽이는 건 안 되지만, 신을 죽이는 건 규율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저 투구는 과거 공포의 상징이자, 동시에 마제스티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 유물이었지만...
'저게 보통의 유물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괜히 마제스티의 재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런 만큼 저건 최강의 방어구 라인에 속하는 유물.
게다가 과거엔 저걸 이용해 마제스티를 몰아낼 수 있었다지만, 지금도 과연 그 꼼수가 먹힐까?
'과거에 그딴 꼼수가 통했던 건, 당시의 마제스티가 유물들을 지나치게 믿었기 때문이라지.'
유물들이 마제스티를 노린 건, 마제스티가 투구를 벗어내는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서주헌?
유물을 신뢰할 바에야 자신이 싼 똥을 더 믿겠다고 하는 놈.
심지어 마제스티는 유물들을 믿은 나머지, 외피형에 해당하는 치우 유물만 입은 상태였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처럼, 평소에도 몸을 보호해줄 강력한 내피형 방어 유물이 필요했을 텐데도.
하지만 과거의 마제스티가 알았을까.
설마 자신이 뒤통수를 맞게 되리라고.
'제 비보인 까마귀보다 주변의 간신 유물들을 더 신뢰했다지.'
어쨌거나 유물을 믿지 않는 주헌에게는 해당 없는 이야기.
주헌은 치우의 유물을 굉장히 잘 활용했다.
그 증거로 영상 속 주헌은 천하의 레비아탄을 상대로도 무사했다.
[와씨, 단장 살아 있음?]
어디 그뿐이랴.
주헌은 엄청난 지배력으로 파괴의 신 세트 유물을 불러내 레비아탄을 갈기갈기 찢어댔다.
콰과과광!
뱀은 흉악한 모래폭풍에 순식간에 누더기가 되었다. 결국 레비아탄의 힘이 빠지자 그는 바로 올가미로 만든 동아줄을 던졌다.
쉬익!
[#$#$&*!]
올가미는 레비아탄의 목을 졸랐다.
레비아탄은 거칠게 동아줄을 끊으려고 했지만, 비보급으로 성장한 동아줄은 절대로 끊어지지도 않았고, 하물며 그 힘도 강해졌다.
물론 본인 스스로도 노력하는 듯 고래가 헤엄치듯이 열심히 씰룩거렸지만.
곧 팽팽하게 당겨지는 밧줄!
잠시 후 주헌은 헤라클레스의 힘까지 더해 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마침내.
쿵!
꼿꼿했던 모가지가 떨어졌다.
콰과광!
[&$*#&*!]
결국 바닥에 처박힌 레비아탄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 경기를 일으켰다.
분노한 레비아탄이 목을 늘려 다두룡이 되었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쉭! 쉭!
주헌의 지배력이 실리자 밧줄은 빛을 뿜으며 사방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밧줄은 여지없이 뱀의 머리를 휘어잡고, 놈의 거대한 몸뚱이를 묶었다.
콱! 콱!
그 힘이 어찌나 센지 뱀의 몸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보는 사람을 기겁하는 장면이 벌어졌다.
[하하하하! 오늘 저녁은 회다! 구이다! 아니 찜 요리도 좋지!]
어디서 구한 건지, 사시미 유물 칼을 뽑아든 주헌은 미친 듯이 난도질을 시작했다. 날아온 횟감에 카메라 화면이 퍽 돌아갈 정도였다.
결국 영상에 잡히기 시작한 건 횟감이 된 레비아탄의 살점들뿐.
그런데 이때였다.
카메라가 다시 확 돌려졌다.
'!'
화면에 잡힌 건 다름 아닌 서주헌의 얼굴!
그러더니 그는 웃으면서 CCTV를 꺼버렸다.
그게 영상의 전부.
그러니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요한의 핸드폰이 분주하게 울려댔다.
띠링, 띠링, 띠링.
그룹채팅방이 틀림없었다.
[레비아탄이 넘어갔어요. 요한 씨 괜찮은 건가요?]
[신화 속에선 결국 고기가 되지만, 대적유물을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그보다 서주헌 CCTV에 찍힌 거 봤어? 유물 사용하는 스킬 지리던데. 가이아 유물도 곧 넘어갈지도 lolololololololololololo]
[그뿐이 아니죠. 언노운 증거들 다 찍어간 것 같은데. 내일이라도 당장 특보가 뜰지도 몰라요.]
[다 망했네? lololololololololololol]
[웃을 일이 아니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wwwwwwwwww]
[jajajajajajajajajajajaja]
[lololololololololololololollolololololololololololol]
대부분은 심각해했지만, 그 중 어리고 젊은 놈들은 미쳐 발광했다.
진짜 미쳤다기 보단 그냥 해탈해서 짓는 웃음 같기도 하지만.
뭐, 그럴 만도 했다.
'이 모든 일이 1시간도 안 걸려서 일어난 일이니.'
대부분의 원탁의 기사들은 때마침 맨해튼을 떠나 있었다.
그나마 가까웠던 기사가 2시간 거리에 있던 상황.
물론 멀린은 차로 15분이면 닿을 거리에 있긴 했지만...
'멀린이 드루이드의 탑을 떠나도 곤란하지.'
거긴 이른바 판도라의 심장이었다.
그녀가 떠나면 탑은 방어기능을 상실할 것이고, 서주헌이 노리고 있는 판도라 시스템 유물.
즉 <마제스티의 옥좌>가 무방비 상태로 놓이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만으로 사건을 해결해야 했지만,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그 도굴단 뛰어난 레이더가 있으니까 침입하기도 용이했겠지.]
요한은 설아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복수를 하려는 모양인데, 뜻대로는 안 돼.'
곧 요한이 말했다.
[아직 기사는 안 터졌어. 지금 당장 모든 언론을 틀어막고, 놈들이 가진 증거기록들 전부 빼앗아 와.]
그들은 급하게 움직였다.
특종이라는 개소리가 돌기 전에 서둘러야했다.
***
"하씨, 나더러 이걸 어쩌라고."
유재하는 지금 기절할 것 같았다.
눈앞에 놓인 것은 사정없이 횟감으로 변해버린 레비아탄이었다.
이쯤 되면 그냥 뼈 모형을 만들어 박물관에 기증하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을까 싶은 수준.
물론 머리가 건물 하나 크기일 정도로 커서 애초에 복원 작업량도 많아질 수밖에 없지만... 이건 뭐 갈기갈기 회를 떠놓았으니!
'철야다. 아니 철야로 안 끝난다 이거.'
그는 원망의 눈을 담아 주헌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정작 원망의 대상은 태연했다.
"왜? 핵은 파괴 안 해놨잖아? 핵을 파괴하면 복원가능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유재하는 초사이언이 되듯 분노하며 괴성을 질렀다.
"#$*$#&*#*!"
"사람의 말로 해 사람의 말로. 냠냠."
"야이 그만 처먹으라고!"
동시에 유재하는 주헌이 물고 있는 고기를 빼앗았다.
그건 다름 아닌 레비아탄의 말린 고기!
"이건 니 먹이가 아니라고! 이 망할 단장 새끼야!"
그러자 육포를 빼앗긴 주헌이 툴툴거렸다.
"맛있는데. 이건 먹어도 되는 건데."
도대체 복원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하지만 주헌의 말은 맞았다.
성격 속의 레비아탄은 결국 해체당해서 신도들의 고기가 되었다니까.
"레비아탄은 훌륭한 진미(?) 유물이란 말이야."
유재하는 어이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그냥 레비아탄 고기가 먹고 싶었던 거지? 사무엘 대적용으로 구했다는 건 개뻥이지? 아니 애초에 얘 마몬하고 친구 아냐? 그냥 마몬 시켜서 꼬시면 끝날 일 아니었어? 왜 굳이!"
"아 왜. 겸사겸사인 거지."
주헌은 또다시 도시락 통을 열었다.
안에는 일리야의 지옥불에 구운 레비아탄의 숯불 뱀구이가 한 가득.
까마귀 유물 때문인지, 주헌이 뱀고기를 먹으려하자 유재하는 난리가 났다.
"악! 그만 먹으라고! 이 인간아! 복원을 할 수가 없잖아! 그리고 그렇게 처먹다가 또 소화제 처먹으려고 그러냐!"
결국 뱀고기를 다 빼앗기자 주헌은 아무 말 않고 입만 삐죽였다. 그 모습에 옆에 앉아 있던 아이린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떡해, 주헌 씨 귀여워!'
주헌이야 멋있을 때가 대다수지만, 가끔 이런 모습을 보이면 미치도록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 봐야 아이린의 눈에만 그리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곧 아이린이 다른 먹거리를 챙겨주면서 말했다.
"아무튼 특보 쪽은 맡겨주세요. 판도라 쪽 손이 닿지 않는 언론사와 연결하면 되니까."
"좋아, 찍어온 사진들, 언론에 팍팍 넘겨."
그렇게 말하고 일리야를 보았다.
"그리고 니놈은 이상한 사진 찍어온 대가로 벌이야."
구석에 처박혀 있는 일리야는 끄윽끄윽 아파하고 있었다. 바로 그가 율리안 대신 찍었던 사진 때문이었다.
"찍어도 이딴 걸 찍고 말이야."
일리야는 찍어도 하필 괴기스러운 심령사진을 찍어놓았었다.
"콱 그냥. 넌 나중에 뒤졌어."
"으윽... 아니 그쪽이 더 임팩트 있는..."
물론 율리안이 사진을 충분히 찍어 놓았기 때문에 문제는 없긴 하지만.
"아무튼 그놈들이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할 테니까 관리 잘하고. 언론인들은 확실하게 보호해주고."
"네. 단장은요?"
주헌은 대답 대신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
한편 그 무렵 미국 공항.
공항에 도착한 이탈리아인이 있었다.
그는 바로 요한.
'서주헌 일행을 모조리 속인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서주헌 도굴단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일단 첫 단계는 놈들을 속이는 것.
어떻게?
'놈들은 아직 내가 전생의 기억이 있다는 걸 모르지.'
그런 만큼 당연히 방심할 것이었다.
자신들이 더 우위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리고 오히려 그 점을 노려 놈들을 단번에 파괴한다.
하지만 곧 그는 힐끗 어딘가를 보았다. 그러더니 비웃음을 흘렸다.
'날 감시하는 건가.'
그랬다.
그가 바라본 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주헌 일행이 있었다.
"저기 있다, 사무엘."
공항에 온 것은 유재하, 일리야, 설아, 율리안.
그들은 요한이 입국한다는 정보를 얻고 진을 치고 있었다. 물론 주헌한테는 비밀로 하고 몰래 움직이는 것이었다.
"단장님 말에 의하면 분명 저놈이 우리가 아는 사무엘이라는 거지."
"그래."
"제대로 확인해봐야겠어. 정말 같은 인물이 맞는지."
설아가 눈알을 굴렸다.
"단장님은? 말 안했다고 혼나는 거 아니야? 들키기라도 하면..."
"괜찮아. 그 인간은 지금 대감옥에 들어갈 준비한다고 본사에 갔어. 여기엔 안 와."
그런데 그럴 때였다.
"어? 사무엘이 사라졌어!"
"뭐?"
그들은 깜짝 놀랐다.
설아가 누군가의 기척을 놓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슬쩍 그들의 레이더망을 피해간 요한은 입꼬리를 올렸다.
'한때 동료였으니 레이더의 사각지대가 어딘지 훤하지.'
생각해보면 동료의 얼굴을 하고 다시 놈들과 섞일 수도 있었다. 놈들이라면 순진하게 까마귀의 눈물인가 뭔가, 그걸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다시 동료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일이 잘 풀려서 놈들의 등을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일단 판도라 본부로 향한다.'
저놈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요한이 여유롭게 전 동료들을 피해갈 때였다.
"큭!"
뭔가가 요한을 가로 막았다.
정체를 모를 길쭉한 짐이었다.
그리고 뭐냐는 듯 요한이 짜증을 내며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그 순간.
"!"
요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당연했다.
"안녕? 요한?"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주헌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