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기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4)
"아니면 만드는데 특별히 내 유물도 빌려주련?"
그 말에 조이는 까무러쳤다.
놀라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주헌이가 유물을 빌려준다고?'
이게 웬 떡...이 아니라 사실 무서웠다.
아니, 적에게 유물을 만들어 보내준다는 소리 따위를 하다니!
이건 무슨 적군에게 총을 친히 납품해주겠다는 말도 아니고!
그래서 순간적으로 불길해진 조이가 주헌을 붙잡았다.
"...저기 오빠야? 진짜로 열쇠를 만들어줘도 돼?"
그러자 주헌이 비웃었다.
"왜 안 되는데?"
사실 판도라가 마제스티 키 짝퉁을 만들게 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지금 대감옥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놈들이 그 사실을 납득할 리가 없지.'
그러니 당연히 비슷한 걸 찍어내자는 발상을 하리란 건 예상범위 수준.
"그러니까 이쪽이 먼저 좋은 걸 만들어서 보내줘도 상관없잖아?"
"좋아. 그럼 진짜 만들어준다?"
"그래. 그럼 내 키 빌려줄 테니까 어디 하루 종일 만져보고 참고..."
하지만 주헌은 반지를 빼려다가 멈췄다.
제 반지를 보며 침을 줄줄 흘리는 동생의 모습 때문일까.
주헌은 더럽다는 듯 슬그머니 손을 뒤로 숨겼다.
"그냥 상상으로 만들어."
"뭐?! 왜!"
왜긴 왜야.
'얘가 나랑 쌍둥이라는 걸 잊었어.'
주면 절대로 돌려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럴 때였다.
부르르.
조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조이는 신경 쓰이는 듯했지만 굳이 전화를 받을 생각은 안 했다.
그러자 끊겼던 전화가 또다시 성질을 내며 울렸다.
부르르르르! 부르르르르!
아주 진동만으로 조이를 집어 삼킬 기세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무시하자 주헌이 말했다.
"안 받아? 중요한 전화 같은데."
"벼, 별로 안 중요한데? 스팸이야."
그러나 계속 울리는 전화.
결국 조이가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집어 던지려는 때였다.
"?!"
언제 가져간 건지, 주헌이 조이의 전화를 받아버렸다.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는 낯선 여자였다.
[야, 너 왜 전화를 안 받아? 내 전화는 재깍재깍 받으라고 했잖아.]
"..."
[아무튼 너 내 메시지는 왜 씹어? 당장 열쇠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잖아. 알았으면 급하니까 당장 이쪽으로 튀어...]
"튀어오긴 뭘 튀어와."
[...?!]
전화 상대방은 깜짝 놀란 듯했다.
조이대신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니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만.
[너, 넌 또 누구야?!]
"나? 이 핸드폰 주인 오너."
주헌의 행동에 조이는 입을 떡 벌렸다.
그러면 안 된다는 눈빛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이는 꽤 당황한 듯 주헌을 붙잡았다.
"자, 잠... 주...읍!"
주헌은 조이의 입을 막고 말했다.
"내 부하 직원한테 껄떡이지 말고. 정 열쇠를 받고 싶으면 개념과 예의를 탑재해서 다시 걸도록."
그리고는 사정없이 전화를 끊자 조이는 비명을 질렀다.
"무, 무슨 짓이야!"
그러나 주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이 개념 말아먹은 년은 누구야."
"뭐?"
"이년이 열쇠를 만들어 오라고 한 거잖아? 정확히 어떤 사이야?"
"아니 저기..."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조이가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의붓동생."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헌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의붓동생이라고?"
순간적으로 새어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아주 그 부모에 그 자식이구만."
"주, 주헌아?"
주헌은 가증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의 선명한 기억엔 과거의 일이 스쳐지나갔다.
아마 고등학생 시절인가.
입양 갔던 조이가 자신을 찾아오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주헌은 이제 남남이라며 동생을 개무시한 적이 있었다.
물론 냉혈한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 시절의 주헌은 무려 협박이라는 걸 당했던 것이다.
바로 조이의 양부모들한테.
'잘 지내고 있는 우리 애랑 만날 생각 마.'
물론 그 인간들이 그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입양 당시, 자신과 그들 사이엔 큰 트러블이 있었으니까.
'분명 내가 그 인간들 지갑을 훔치고, 차까지 불태웠던 거 같은데.'
8살치고는 아주 독하긴 독했지.
그러니 10년이 지났어도 그런 공격적인 반응이 나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도 동생만은 아껴주고 있구나.
그리 생각하고 맡겨두고 있던 것인데.
'그런데 이딴 복병이 있었어?'
의붓동생이라는 여자의 태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이건 뭐 싸가지를 넘어서 개념을 말아먹은.
조사할 땐 별게 나오지 않더니 생활비, 키워준 양육비, 집세라니.
메시지 기록을 훑어봐도 정상적인 채무관계는 아니었다.
거의 빚쟁이를 대하는 태도.
'어쩐지 얘가 늘 꼬질꼬질하게 다닌다더니.'
주헌은 조이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꾸미지 않아 문제지, 주헌을 똑 닮은 그녀는 수준급 외모였다.
뚜렷한 이목구비도 오밀조밀 예뻤고 피부도 하얗고 고왔다. 어깨까지 오는 단발에 지적이고 영리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럼 뭘 하나.
빨간색 체크무늬 남방은 다 해졌고, 작은 얼굴에 톡 걸쳐진 크고 동그란 안경도 좀 깨져 있었다.
유일하게 새것이 있다면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 정도.
그래서 이상한 것이다.
'이상하다. 분명 옷하고 액세서리하고 이것저것 사줬는데.'
크리스마스 때도 브랜드 가방과 지갑을 사주니까 비싼 거라며 아주 덜덜 떨긴 했지만 그래도 예쁘다며 좋아했는데.
다 어디 갔지.
아니, 아무래야 좋았다.
"너 이 인간들한테 빚졌어?"
"아니! 그럴 리 없잖아!"
"근데 뭐야 이 취급은."
조이는 말하기 싫어하다가 주헌의 재촉에 말했다.
"그냥 입양아의 숙명이지 뭐. 별건 아냐."
"그래?"
"응. 그러니까 마제스티의 키 그거 좀 보여줘 봐. 여기서 조금만 만져볼게!"
조이는 주헌의 손에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좋아했다.
"아무튼 방금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냥 얘가 좀 또라... 신경이 좀 날카로워서 그래. 진짜야. 사이는 좋아."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주헌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한편 그 무렵이었다.
"뭐야, 이놈은!"
조이의 의붓동생 미쉘은 황당한 얼굴로 끊어진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기생충의 오너라고? 그럼 그년 회사 사장이라는 거네?"
동시에 그녀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자가 관심을 보였다.
"왜 그래, 어디 회사 사장인데?"
그의 이름은 헨리.
이번에 마제스티 키 제작을 맡은 원탁의 기사였다.
무엇보다 마제스티의 재보를 만들어내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수많은 인력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최소 S급 이상의 실력있는 공학사가 필요하지.'
물론 판도라엔 언노운을 비롯해 다양한 재보 대체품을 만들어주던 공학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공학사들은 현재 원인 불명의 사고나 병으로 다 앓아누운 상태.
덕분에 다들 공학사를 어디서 데려오나 고민하던 차에 미쉘이 나선 것이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조이란 공학사가 S급은 맞는 것 같고.'
헨리는 이야기만 들어도 바로 감이 잡혔다.
뭐, 실제론 SS급 공학사긴 하지만 그들이 그 사실을 알 리는 없다.
"그런데 S급 공학사면 최소 중견기업에 있을 텐데. 방금 어디 회사 오너였어? 판도라와 손을 잡을만한 곳인가?"
헨리의 말에 미쉘이 꺄르륵 비웃었다.
"걔 그런 회사 안다녀요. 상장도 못한 쪼그만한 만물상점에 다니고 있다나. 직원도 6명 정도래요."
"뭐? S급 공학사인데? 잘하면 대기업 수석 엔지니어도 될 수 있는 급인데?"
"부모님한테 회사면접 다 떨어트려달라고 했거든요. 그년이 잘되는 꼴은 보기 싫어서."
헨리는 혀를 찼다.
"이야, 누군지 몰라도 심하네. 그래도 뭐, 잘됐지. 그래서 이렇게 필요할 때 우리랑 만난 거잖아?"
"그런 거죠. 아무튼 이번 일 잘 되면 저도 정식 기사로 활동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거죠?"
"당연하지. 마침 한슨의 자리가 비게 되기도 했고. 로키 유물은 네게 주는 걸로 상의해보지."
미쉘은 성공적이라며 좋아했다.
기생충 하나를 팔아넘겼을 뿐인데 그런 자리가 들어오다니.
"아무튼 방금 그 오너는 잘 설득해봐. 당분간 그 공학사는 우리가 데리고 있겠다고. 그 대가로 판도라가 지원도 두둑하게 해주겠다고."
"그러죠 뭐."
그 말을 하며 미쉘은 비웃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젊은 남자 같던데.'
어쩌면 조이의 남자친구일지도 몰랐다.
'최근에 주제에 맞지도 않은 물건을 들고 오기도 했잖아.'
처음엔 뭔가 월급도 갑자기 많아지고, 좋은 물건도 들고 오길래 밤일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보나마나 그 사람이 선물해준 것이리라.
물론 조이가 선물 받은 가방이며 옷하고 액세러리는 전부 자신이 빼앗아갔지만.
'걔가 뭐라고 그렇게 좋은 걸 하고 다녀.'
그리고 미쉘은 제 옆에 있는 파란색 가방을 보았다.
'이 가방도 그래.'
그래도 이 구하기 힘든 프라다 한정판을 구해준 걸 보면, 센스도 있고 상당히 괜찮은 남자인 것이리라.
구멍가게 회사 대표라도 그 정도의 여력은 되 거겠지.
'봐서 괜찮으면 그 남자도 빼앗아버려야지.'
애초에 조이를 몹시 싫어하는 그녀였다.
동양인 주제에 자신도 못 들어간 하버드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가질 않나.
'입양은 무슨, 좋은 가문에 빌붙은 기생충이지.'
부모들도 백인 외엔 싫어하는 사람들인데 왜 굳이 아버지가 조이를 입양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조이가 벌어오는 돈이며 사는 물건들도 전부 빼앗았다.
그거라도 도움이 되라며.
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네가 큰 쓸모가 있구나.'
미쉘은 깔깔 웃었다.
***
한편 그 무렵이었다.
"와 미쳤네, 미쳤어...!"
판도라 공학팀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설계가 가능하지?"
공학사들은 유물을 연구, 분해, 재구성하면서 인간들에게 맞는 공업품을 만들었다.
마제스티의 재보 역시 그런 식의 과정을 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제스티의 키는 프로메테우스의 힘을 기본 베이스로 해서 열쇠로 만들어내려고 했다.
조이는 미쉘의 부름으로 와서 설계와 제작을 맡게 된 것이고.
그런데.
"허, 세상에. 이런 설계법이 존재하다니...!"
그녀는 찬사를 받다 못해, 거의 신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유물공학사들은 단순히 이론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복원사들처럼 특별한 유물들을 다룰 수 있어야 하는데, 조이는 척 봐도 S급을 뛰어넘는 유물들을 다뤘다.
그러니 놀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쪼끄만 만물상에 다닌다고?'
'전파상 아니었어?'
'허, 당장 판도라에 스카웃될 정도인데.'
뭐, 아무래야 좋았다.
"다 됐어요."
조이가 쿨하게 일어서자 다들 기겁했다.
"뭐? 벌써?!"
"잠깐, 당신 여기 온 지 하루도 안 지났잖아?!"
그렇게 말해도 진짜 다했는데 말이다.
"허, 설계도 아까 1시간 만에 뚝딱하더니!"
"대충 아무렇게나 만든 건 아니겠지!"
하지만 조이는 헛웃음을 흘리며 가방을 맸다.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보던가요. 돈은 오늘 내로 입급해주시고."
조이가 나가자 공학사들이 달려들었다.
"허투루 만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거면 정말 어떤 무덤의 문도 열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밀분석기까지 돌린 그들은 침을 튀겼다.
"헨리 님! 그 아가씨, 반드시 판도라에 붙잡아둬야 할 인재입니다!"
"지금 바로 쫓아가야...!"
그 말에 헨리가 웃었다.
"걱정 마. 어차피 내 허가 없이는 이 시설에서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어. 그런 의미로 미쉘, 같이 식사나 하게 극진히 데리고 와."
그러자 미쉘은 못마땅해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봐야 입구 근처에 있겠지.'
그런데 이때였다.
"어?"
입구에 조이가 없었다.
'분명 문 앞에서 서성일 줄 알았는데!'
화장실에 갔나 싶었지만, 조이는 이 건물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당황한 그녀가 CCTV를 확인했다.
다행히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조이가 사라진 곳은 다름 아닌 구석진 복도.
미쉘은 급하게 그곳으로 갔지만 거긴 막혀 있었다.
"젠장, 그년이 도대체 어디로...!"
그런데 그때였다.
"오, 네가 그 싸가지야?"
"!"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미쉘은 기겁하고 말았다.
'서, 서, 서주헌?!'
그랬다.
정작 있어야 할 조이는 사라지고 그곳에 주헌이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여긴 보안이 엄중한 판도라 내부였다.
신급 유물로도 들락날락 할 수 없었고, 애초에 문이 아닌 곳으로 들어왔다면 당연히 침입경보가 울렸을 터!
하지만 미쉘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주헌이 그녀에게 다가오며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그는 미쉘의 목걸이와 가방을 가리켰다.
"그거 분명히 내가 동생 생일선물로 사준 건데."
"!"
"왜 네가 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되나?"
그 미소가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