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유물의 총수 (4)
"그러고 보니 네가 죽었을 때 어떤 마음이냐고 물었었지."
"...!'
곧 칼날이 번쩍이며 주헌이 말했다.
"굉장히 슬펐어. 그래도 한때 인연이었으니까."
그 말에 진채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율리안은 기겁했다.
아니, 지금 뭐라고?
'슬펐다고?'
심지어 굉장히 슬펐다고?
'이 자식! 돌은 게 틀림없어.'
율리안은 진지했다.
아니 그건 당연했다.
서주헌의 입에서 저딴 로맨틱한 말이 튀어나올 리가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상당히 무미건조하게 대하는 타입이었으니까!
그런 놈이 새삼 진채원에게 달콤한 말을 해줄 리도 없었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
'이 자식이 또 사기를 치려고!'
"서주헌 너...!"
하지만 욕을 하려던 율리안은 잠시 움찔했다.
'아냐. 그래 보여도 주헌이 정이 많긴 해.'
정말 사이코패스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었으면 자신이 저딴 놈과 10년 동안 함께 했을 일도 없었다.
실제로 주헌의 눈빛도 좀 슬퍼보였다.
결국 율리안은 측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랬구나, 너 그래도 진채원한테 마음이..."
하지만 마음이 있기는 개뿔.
"그러니까 죽기 전에 중국 유물에 대해 살짝만 흘려봐."
"야 이 쓰레기자식아!"
율리안은 뒷목을 잡았고, 거미 유물은 분노했다.
[자, 저딴 쓰레기 말을 지껄이는 놈이다! 어서 죽여!]
주헌은 적이었다.
감히 시건방지게 세상의 모든 유물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놈.
'저딴 놈이 유물을 다 차지하게 둘 순 없다!'
세상의 모든 유물은 자신의 것이 되어야 했으니까!
[자! 이대로면 모든 유물이 놈에게 다 넘어간다! 어서 죽여!]
하지만 그때였다.
"싫어."
[?!]
진채원은 단칼에 거절했다.
하물며 그녀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덕분에 거미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년, 너 설마 저놈이 한 말을 믿는 거냐! 그 말에 만족한 거냐고!]
그 말에 진채원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히 만족하지.
왜?
주헌은 원래 빈말조차도 안 해주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거짓이어도 좋았고, 하물며...
'완전 거짓도 아닌 것 같고.'
눈빛을 보면 알았다.
주헌이 일부러 티를 내주는 건지도 몰랐지만.
"어쨌거나 내가 졌어. 어차피 이대로 중국에 가도 사형이거든. 그러니 어서 날 죽여서 총수 유물을 가져가."
주헌은 가볍게 웃었다.
예상대로였다.
진채원은 원하는 걸 얻으면 말 그대로 현자타임이 오는 타입.
원하는 걸 얻으면 유물의 소유권조차 포기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하물며.
"날 죽이려면 여길 정확하게, 깊숙하게 찔러. 유물핵은 여기에 있거든."
주헌은 사실 그녀의 몸 어디에 총수가 박혀 있는지 알지 못했다.
괜히 사황이 아니라고 워낙 치밀하게 숨겨놨으니까.
그리고 기생형 유물을 빼내려면 기생부위를 알아야 하는데, 위치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알겠군.'
그녀가 가리킨 장소는 바로 목 깊숙한 곳.
과거 그녀가 목을 그은 장소이기도 했다.
단지 핵을 정확하게 파괴하지 않으면 또 다시 탈피할 것이라고 그녀가 말했다.
"아마 유물핵을 파괴해. 그럼 총수도 같이 죽겠지만, 너한테는 뛰어난 복원사가 있잖아?"
그 말에 주헌은 칼을 들었다.
'이걸로 내가 이겼다.'
그녀의 시선은 아이린을 향해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주헌의 손에 죽을 생각이었다.
왜?
아무래도 주헌이 직접 죽이면 분명 기억에 남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할 말은?"
"다음 생에는 네가 날 좋아하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헌이 웃었다.
그리고 그의 칼이 진채원을 내려찍으려는 순간이었다.
[이 빌어먹을 년! 네년은 이제 필요없다!]
참다 못한 거미가 진채원의 몸에서 튀어나왔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여자가 자살하려고 하다니, 미쳤나!
거미는 이 미친 여자를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서주헌, 감사해라! 네놈을 숙주로 삼아주마!]
흉흉한 오라가 주헌을 노렸다.
그 모습에 진채원도 율리안도 깜짝 놀랐다.
왜?
총수가 숙주로 삼겠다는 말이 좋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총수는 고독의 유물이다.'
고독은 저주를 부르는 유물.
놈은 숙주에게 막대한 재화를 불러다주지만, 먹이를 주지 않으면 주인을 죽여버린다.
즉 총수는 주헌에게 눌러붙어 먹이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심지어 평범한 먹이가 아니었다.
[네놈의 동료부터 먹이로 요구해주마!]
그걸로 서주헌의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해주리라!
서주헌에게 붙는 건 수치스러웠지만, 결과만 보면 거미에겐 굉장한 이득이었으니까.
놈이 먹이를 바쳐서 괴로워하든, 먹이를 바치지 못해서 자신에게 죽든!
어느 쪽이든 자신의 즐거움!
이내 거미는 주헌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자 진채원은 다급해졌다.
'숙주 계약은 안 된다.'
주헌이 피눈물을 쏟는 건 싫었다.
물론 자신 때문에 피눈물을 쏟는 건 좀 즐거울지 몰라도...!
진채원은 재빨리 칼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된 이상, 거미가 주헌을 덮치기 전에 거미의 숨통을 끊는 수밖에.
'서주헌. 넌 유물의 왕이 되어라.'
그렇게 칼로 제 목을 도려내려는 순간!
콱!
"!"
놀랍게도 칼이 멈춰섰다.
주헌이 진채원의 칼을 붙잡은 것이었다.
그것도 터프하게 맨손으로!
"...!"
피가 뚝뚝 흘렀지만, 주헌은 같잖다는 듯 웃었다.
진채원은 당황했다.
도대체 왜?
'이대로면 죽을 텐데!'
이때 주헌의 등에 거미가 들러붙었다.
동시에 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하긴, 네놈은 이제 끝이다!]
그렇게 거미가 주헌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때였다.
[크윽?!]
거미는 피를 토하며 주헌의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거미는 설사를 하고 구토를 하는 등, 굉장히 괴로워했다.
[이 자식, 온 몸에 뭘 바른...!]
동시에 주헌이 상의를 슬쩍 들어보이며 표표히 웃었다.
뭘 바르긴.
***
[천 년 묵은 지독한 냄새가 나는 마늘 엑기스(SS급-신급/ 소모성)]
[귀신왕도 무서워하는 성스러운 피 (SS급-신급/소모성)]
...
[악마왕 비보가 배설한 파리왕의 똥(식중독 균) (SS급-신급/소모성)]
그랬다.
주헌은 온갖 유물들을 갈갈 갈아 몸에 발랐었다.
아무리 그래도 진채원을 만나러 오면서 알몸으로 올 자신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방어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떠올린 방법.
놈의 정체를 몰라서 온갖 것들을 바르고 오긴 했지만, 어쨌든 놈은 탐식의 유물이 아닌가.
그리고 자신도 포식의 유물을 써봐서 잘 알았다.
'못 먹을 음식에 입을 대면 탈이 나지.'
뭐 과거에 나왔던 동의보감 유물이 있었다면 정확하게 고독 해독제를 만들어냈겠지만...
'충분한 것 같군.'
냄새난다고 동아줄을 나무랄 처지가 못 되리라.
"자. 알았으면 저리 꺼져 새끼야!"
주헌은 마늘냄새가 물씬 나는 동아줄까지 휘휘 휘둘렀다.
예로부터 마늘은 동서양 막론하고 마귀를 쫓는 효능이 있는 법!
동아줄도 크앙 거리며 총수를 위협했다.
안 그래도 몸을 이루던 유물들을 잃어 약해진 총수는 주헌을 쏘아보았다.
[이 자식이, 고작 이딴 걸로!]
"이딴 거? 그런 것치곤 효과가 좋은 것 같은데."
주헌은 웃으면서 동아줄로 총수를 꽁꽁 묶었다. 마늘 동아줄의 위력은 상당했다.
거의 이 정도면 금줄의 효력까지 있지 않을까.
동시에 그는 표표히 웃으며 거미를 짓밟았다.
"뭐, 그래도 한때는 제국의 왕이었던 것 같으니 인간으로서 예는 갖춰주마."
[뭐야?]
주헌이 항아리를 꺼냈다.
"원체 탐욕스러운 놈이나 고독에 먹힌 건 자의가 아니었던 것 같고. 정식적으로 무덤을 클리어해주지."
지배력을 실자 건물 크기로 커졌다.
거미는 황당해했다.
[무슨 꿍꿍이냐.]
별 꿍꿍이는 없었다.
"특별히 인간으로서 명예는 지키게 해주려는 거다."
[...!]
이곳은 고독의 무덤.
정식적인 무덤 클리어 방법은 고독의 방법처럼 항아리에서 배틀로얄을 하는 것일 것이다.
"안 그래도 궁금했거든. 내 까마귀의 포식하고 네놈의 포식하고, 어느 쪽이 더 우위인가 확실히 해보자고."
그 말에 율리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너 설마 거미랑 겨룰 생각이야?! 너무 위험해!"
하지만 주헌은 거미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한때 까마귀의 주인이었던 것 같으니 특별히 상대해주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미가 흉흉한 오라를 뿜어댔다.
[좋다. 너를 먹어치우면 그 까마귀도 내 것이 될 테지!]
거미와 주헌이 항아리로 향하자 율리안은 다급해졌다.
"야! 단장! 그만둬!"
"주헌 씨!"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거미와 주헌이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항아리 안에 들어간 거미가 흥분했다.
[자! 어서 와라! 결국 누가 살아남나 해보자!]
그런데 이때였다.
"응, 그래. 혼자 열심히 하도록."
[?!]
거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글쎄.
쾅!
주헌은 재빨리 항아리의 입구를 닫았다.
거미는 황당해서 입구 쪽으로 달려왔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주헌은 항아리에 지배력을 실었다.
그러자 항아리가 점점 작게 변하면서 종이컵 만하게 변했다.
율리안은 그 광경에 경악했다.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주헌은 작아진 항아리를 보면서 하하하 웃어댔다.
"뭐하는 거긴? 미쳤다고 거미 새끼랑 항아리에 갇혀 있냐?"
율리안은 황당해했다.
"제국의 왕이라서 예를 갖춰주려고 한 거 아니었어?"
"왕? 그래봐야 지 탐욕에 못 이겨 유물이 된 뚱돼지인데?"
"하지만 인간으로서 예의를 갖춰주겠다고...!"
"인간은 무슨, 지금은 그래 봐야 유물 새끼지."
율리안은 뒷목을 잡았다.
"총수가 까마귀의 전 주인이라서 제대로 하려는 거 아니었어?"
"전 주인은 개뿔."
얼핏 본 총수의 기억으로 이놈은 까마귀의 주인이 아니었다.
진짜 까마귀의 전 주인은 다른 놈.
오히려 과거 총수의 노예로 보였다.
그리고 거미는 까마귀를 얻으려다가 제 노예에게 빼앗긴 고대제국의 왕이었을 뿐.
아무래도 까마귀는 비보 중에서도 가장 강한 유물.
마제스티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이리라.
'기억 속에서 꽤 재미있는 걸 봤어.'
그리고 드디어 이걸로 대감옥을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주헌이 웃을 때 항아리 안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
서주허어어언! 당장 들어와! 들어오라고!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주헌은 비웃었다.
"시끄러워. 넌 우리 멍멍이들 요강행이다."
***
한편 그 무렵이었다.
[헉, 헉! 주인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총수의 무덤에서 유물을 캔 마몬은 발을 동동 굴렀다.
마몬이 캔 유물은 모두 총수가 먹어치운 유물들.
그걸 탈출시키면 총수의 힘은 줄어들었고, 총수도 공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실제로 총수의 뱃속에 있던 유물들이 무덤을 뚫고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왜 안 나오는 거야! 무덤은 이미 뚫렸는데! 서, 설마 주인이 총수에게 먹힌 건 아니겠지!]
"커, 커헉. 무슨 말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좀...!"
결국 안절부절 못하는 마몬에게 멱살이 잡힌 유재하가 신음을 흘릴 때였다.
"야야, 잠깐만. 저거 다 도망가게 해도 돼?"
유재하와 설아에게 합류한 일리야가 하늘을 가리켰다.
"단장이 화낼 것 같은데."
그랬다.
하늘에는 도망가는 총수의 유물들이 천지였다.
그 모습이 흡사 개천에서 승천하는 듯한 용들의 무리.
그리고 설아가 전 세계로 도망치는 유물들을 보며 손톱을 깨물었다.
"저거, 다 잡아야 하는데!"
신급 유물 1,000개를 모아야 단장님에게 혼수품을 바칠 수 있었다.
결국 설아가 유물들을 쫓아가려고 하자 유재하가 막았다.
"야야, 아서! 저거 척 봐도 악신 계열 유물만 가득해! 오만의 탑 유물들도 못 잡고 있잖아!"
그랬다.
총수가 먹은 유물들은 대부분이 악신 계열의 유물이었다.
너무 위험하고, 흉악하고, 흉물스러운 놈들이 대다수.
그래서일까.
[아이고 월세 차감은 포기.]
[저놈들은 너무 악랄하고 강해!]
"저건 어차피 우리가 못 잡는다고! 독기에 당한다고! 그냥 보내버려!"
"하지만 단장님이 아쉬워할 텐데...!"
마몬은 물론, 모든 유물들이 포기하고 있을 때였다.
슝!
무덤 안에서 뭔가가 황급히 튀어올랐다.
"!'
그건 바로 동아줄이었다.
그런데 동아줄의 모습이 좀 달랐다.
"어? 어?! 색이 바뀌었잖아!"
"야! 아니야, 방금 모습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동아줄의 모습이 묘했다.
분명 평소와 같은 동아줄의 모습인데...
"방금 사람 모습 아니었어? 내 눈이 이상해졌나?"
그럴 때였다.
"뭐야, 무슨 일인데?"
"아, 단장님! 저기 동아줄이!"
"음?"
하늘로 날아오른 동아줄은 눈을 반짝이며 흩어지는 악신 유물들을 붙잡으려고 했다.
어딜 가! 어딜 가!
악신들은 거품을 물었다.
뭐야, 이 밧줄 놈은!
이 같잖은 놈이!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동아줄이 퍽 맞고 날아가자 동아줄이 이를 갈았다.
번쩍이는 동아줄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지금까지는 여러 갈래는커녕, 한 줄로 낑낑거리던 밧줄이!
동아줄은 눈을 반짝이며 악한 유물들을 콱콱 붙잡았다.
그렇게 하나, 둘, 셋, 백... 천!?
"저, 저걸 다 잡았어?!"
그걸 보며 마몬은 입을 떡 벌렸다.
[저, 저, 저 녀석이! 지금 뭘!]
동시에 주헌은 놀라운 메시지를 보았다.
[동아줄이 승격합니다.]
[비보로 승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