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누굴 택할 거예요? (2)
"정말 아이린은 가담한 게 아니라는 거지?"
율리안은 다시 한 번 확인을 받아냈다.
매사 신중한 그는 주헌이 놓칠만한 일들을 재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
부단장이기에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율리안의 질문에 주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주축이 된 놈이 있었던 모양이야."
주헌은 핸드폰을 보였다.
"이게 그 명단이고."
"!"
명단을 본 율리안은 깜짝 놀랐다.
의외인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왜 우리를!"
"재미있지? 어쨌든 난 그 마제스티라는 거에 흥미가 생겨서."
"마제스티? 유물의 왕이란 의미야?"
"글쎄. 아무튼 놈들은 우리가 두려운 존재였던 거야. 그리고 지금도."
주헌은 흥미로운 듯 웃었다.
자신이 그 마제스티라는 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다니.
'그럼 더 두려워하게 해줘야지.'
주헌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그런 의미로 이놈은 어쩌냐?"
주헌은 뭔가를 가리켰다.
뜻밖에도 그건 여자의 가방이었다.
그렇다.
주헌과 율리안은 백화점에 와 있었다.
모처럼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낼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아이린과 설아의 선물... 그리고 동생 선물까지도.
그리고 주헌이 한 가방을 가리키자 매장 직원이 콧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어머나 고객님. 선물용이신가요? 어느 분께 드리실 건가요?"
"음, 피앙세?"
"어머나, 정말요? 세상에 정말 보는 눈이 높으시네요."
그러자 율리안이 한마디 했다.
"보는 눈이 병신이래."
"?!"
직원이 당황하자 주헌은 웃었다.
그렇다.
그는 이것을 위해서 율리안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해태의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는 능력은 현대에서 아주 유용했으니까.
그리고 직원이 당황해하는 사이, 주헌이 다른 걸 가리켰다.
"그럼 저건?"
그러자 다른 직원이 눈을 번득이며 달려왔다.
주헌은 척 봐도 보는 눈이 없는 VIP!
즉.
'호구다!'
무려 떨이품을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세상에! 그건 이번에 새로나온 신상품인데, 너무 인기가 좋아서 지금도 몇 세트 안 남..."
"재고품이야. 창고에 쌓였어."
"?!"
"그럼 저건?"
"그, 그건 저희 브랜드 최고 베스트셀러인데 지금도 없어서 못 파는..."
"어제 반품 들어온 거네."
"그럼 저건?"
"줘도 안 가진대."
"저건?"
"그냥 이 브랜드 자체가 젊은 사람들은 안 쓴대."
"그래? 여기는 영 안 되겠구만."
"?!"
주헌은 웃으면서 매장을 나갔다.
결국 주헌에게 재고품을 팔아보려고 했던 직원들은 좌절했다.
주헌은 율리안이 쓸모가 많다며 좋아했다.
"좋아, 공명아. 이번엔 저기 가보자."
"..."
율리안은 괴로워했다.
이러라고 얻은 유물이 아닌 것 같은데.
***
한편 율리안은 피곤한 듯 이마를 짚었다.
그는 주헌과 함께 귀가 중이었다.
귀가 장소는 유재하의 작업실.
단원들이 모여 회의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집 대신 유재하의 작업실로 가는 건 좋은데...
"좋아, 공명아. 다음엔 같이 차나 보러 갈까?"
어찌나 쇼핑이 만족스러웠는지, 또 율리안을 끌고 갈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국 율리안은 뒷목을 잡으며 소리쳤다.
"가긴 가더라도 차는 안 돼! 못 사!"
"뭐? 왜?"
"왜긴 왜야! 넌 새 차도 일주일이면 고물로 만들잖아! 그거 고치는 게 다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주헌의 드라이빙 실력은 실로 끝내줬지만, 정작 차는 개떡.
"사려면 장난감 자동차나 사! 아니면 레이싱 게임을 사든가!"
"..."
이자식이.
"아니면 유물 차를 사든가!"
"흠, 유물 차 중에서는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그건 당연했다.
가전제품, 옷 등 다양한 유물 공산품이 개발되고 있는 시대.
차라고 해서 유물 차가 없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봐야 C급.'
긁힘 방지 유물을 덧씌운 공산품이거나, 이름 모를 병사들이 타던 전차나 말 유물들이었다.
"아, 적토마 유물이라도 나오면 좋겠다."
주헌의 말에 율리안은 비웃었다.
"그런 귀한 게 나오겠냐?"
그렇게 그들이 유재하의 작업실로 들어설 때였다.
"잠깐! 들어올 때 조심해요!"
"!"
작업실 안에 들어선 순간 그들은 까무러치고 말았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실내에 비라니!"
작업실 안에서는 물이 줄줄 새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침수라도 된 듯, 바닥에 둥둥 물건들이 떠다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러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씨이, 이거 피해보상처리 할 거예요. 진짜."
실내에서 우산을 쓰고 있는 유재하였다.
식탁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는 머리에 캔버스를 이고 있었다.
다행히 그림이나 유물이 있는 안쪽방까지는 침수가 되지 않았지만...
"세상에,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야?!"
율리안의 질문에 주헌은 어딘가를 슬쩍 보았다.
"야. 이거 설마..."
유재하는 맞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알긴 아네. 다 댁 때문이라니까."
"..."
결국 주헌은 황급히 창고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안에 들어서자 주헌은 더 깜짝 놀랐다.
방 안은 아주 홍수였기 때문이었다.
"서, 설아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렇다.
이건 설아가 가진 비보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다.
나가는 비를 내리는 동양용의 시초.
용왕이라 불리는 만큼 자연스럽게 사용자의 기분에 따라 비를 몰기도 했다.
결국 주헌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던 그녀가 훌쩍였다.
"단장님. 오늘 약속 있었어요?"
아차.
주헌이 슬쩍 시선을 피하자 시무룩해진 설아가 훌쩍였다.
"단장님...! 항상 크리스마스는 저랑 보내셨으면서...!"
"아니 그게..."
뭐 주헌이 다른 여자들이랑 함께 있는 거야 익숙했다.
왜?
'단장님은 단원은 절대 여자로 안 보니까!'
그렇다.
주헌은 사내연애는 절대 안 된다고 하는 똥 같은 소리를 했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집중 흐트러져서 안 돼.'
생존과 공략에 집중해야 할 무덤에서 연애질을 하면 사리판별이 둔해진다는 것이었다.
집중해야 할 대상이 잘못 된다나 뭐라나.
뭐, 그 말엔 설아도 납득했다.
실제로 무덤에서 가장 먼저 죽는 건 연인관계였으니까.
유물이란 놈들은 굉장히 악랄한 놈들이었으니까.
게다가 주헌에겐 단원들은 평등하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기도 하고.
그러나 설아는 훌쩍거렸다.
"단장님이 절 여자로 안 보려는 거 알아요, 아는데!"
훌쩍거리던 설아가 돌연 주헌에게 다가왔다.
"아무리 그래도 진채원은 아니죠!"
동시에 주헌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설아의 손이 위험한 곳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아진 주헌은 좀 위험하다 싶었다.
왜?
'설아는 만만치 않은데.'
확실히 주헌은 동료를 여자로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설아를 여자로 대했던 적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설아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았고, 결정적으로 TKBM에서 징계를 먹었을 때.
주헌이 부하를 구하다가 권 회장의 명령을 어겼을 때였나.
권 회장의 분노로 주헌은 퇴직 명령, 도굴단도 해체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설아가 주헌을 꼬셨다.
'이, 이제는 동료 아니잖아요.'
그렇게 애절하게 옷자락을 붙잡는 여인을 무시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뭐, 뜻밖에도 3개월 뒤 도굴단이 다시 복구되면서 그것도 없던 일이 되어버렸지만.
'치, 이상한 곳에서 고지식해서는.'
설아는 툴툴거렸지만 그런 점을 또 좋아하며 계속 주헌의 동료로 있었다.
주헌이 여자로 봐주는 것보다도, 주헌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안 되겠어요!"
"!"
주헌은 순식간에 뒤로 넘어갔다.
"오늘은 절대 못 나가게 할 거예요!"
주헌의 위에 올라탄 설아가 입을 맞췄다.
"...읍!"
설아는 주헌의 얼굴을 붙잡고 진한 키스를 했다.
혀과 혀가 섞이고, 살과 살이 뜨겁게 맞닿았다.
덕분에 드물게 당황한 주헌이 설아를 달랬다.
좋기는 엄청 좋긴 했지만.
"잠깐만, 설아야? 착하지? 오늘은 안 돼. 다음에..."
뭐라는 건지.
설아는 다시 주헌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성을 잃은 설아는 아주 될 대로 되라는 듯한 굳센 얼굴이었다.
그녀의 손은 하필 주헌이 약할 만한 곳만 노렸다.
"단장님이 아이린을 단원으로 안 받아들이시는 이유도 대충은 알아요. 하지만 진채원은 안 돼요...!"
잠시 후, 방 안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헌의 목에 손을 두른 설아는 좀 아파했다.
주헌도 꽤 숨이 뜨거웠다.
"설아야."
주헌의 나른한 부름에 그녀가 결국 울먹였다.
"알았어요. 방해 안 할게요. 대신 그때까지 감시해도 돼요?"
"감시?"
"진채원 그 여자가 총수 유물을 가졌잖아요. 단장님한테 무슨 해코지를 할 줄 알고요."
잠시 생각하던 주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군이 주변에 있으면 좋긴 하니까.
"그래 그럼."
하지만 주헌은 그 순간 빛나는 설아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 무렵, 밖에 있던 유재하와 율리안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건 당연했다.
"야, 얘 몇 시인데 안 나와? 벌써 6시라고."
"이제 곧 약속 시간 아니야?"
그랬다.
주헌이 설아를 만나러 간지 벌써 3시간이 지나 있었다.
뭐, 오래걸린다 싶긴 했지만 그들은 그러려니 했다.
남녀사이란 그런 거니까.
그리고 어쩌면 진채원을 만나는 일에 대해서 회의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고.
'확실히 총수와 단 둘이 만나는 건 위험하니까.'
될 수 있으면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진채원과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워낙 변덕적인 여자니까.
결국 발을 동동 구르던 그들이 망설였다.
"야. 공명아. 들어가볼까?"
"뭐, 뭣? 들어가도 돼?!"
"그럼 어떡해!"
결국 고민하던 그들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을 본 그들은 깜짝 놀랐다.
"다, 단장님!"
"서주헌?!"
방 안에 설아는 없었다.
단지 있는 건 달콤하게 잠든 주헌과 방에 굴러다니는 유물 하나 뿐.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실타래 바늘(A급-보물급 / 소모성 유물)]
덕분에 그들은 기겁하고 말았다.
'설아야, 도대체 무슨 짓을!'
"으악 설아, 설마 진채원한테 간 건 아니겠지?!"
"아, 아무튼 단장부터 깨워보자."
그리고 한편 12월 24일, 오후 8시.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채원은 안절부절 못했다.
늘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그녀였지만, 오늘은 드물게 떠는 기색이었다.
아니, 그야 정말로 주헌과 데이트를 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기억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해.'
진채원은 자신이 죽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서 약속시간은 이미 1시간이 지났음에도 꿋꿋하게 기다렸던 것이다.
뭐 정작 총수 유물 쪽은 벌써부터 흉흉한 오라를 풍기고 있었지만.
이번 데이트에서 주헌을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였다.
"아. 미안, 오래 기다렸지?"
'!'
진채원은 낯익은 목소리에 웃으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나타난 건 진짜, 진짜 주헌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주헌은 남모르게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왜?
'젠장, 들키면 끝장이다아아아아!'
주헌인 척하고 나온 건 유재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