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누굴 택할 거예요? (1)
"세상에. 주헌 님이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얻으셨다고요?"
공주들은 유재하가 보낸 소식에 몹시 좋아했다.
안 그래도 최근 주헌의 소식이 적어져서 시무룩해하던 그녀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재하 서기님은 왜 요즘 소식을 많이 안 보내주시는 거죠?"
어느 사이에 유재하가 서기가 된 건지 모르겠지만, 공주들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마 판도라 때문 아닐까요."
"하긴, 주헌 님하고 연관되면 공범으로 잡아간다고 했으니."
그 말에 공주들은 불만을 품었다.
"주헌 님한테 인신공양설로 음해를 하고."
"오히려 수상쩍은 건 판도라 아닌가요?"
판도라는 시민을 지킨다고 하지만, 그들은 수상할 정도로 중요한 순간에 도움이 안됐다.
마치 인간들을 일부러 제물로 바치는 것처럼.
[도심에서 고분화, 170여명 사망.]
[1,000여명 사망.]
[판도라의 방관으로 또 280명 사망.]
[판도라 관측망. 왜 또 그때만 작동 안 했나.]
재미있는 건 같은 상황이더라도 일반 시민들은 죽어나가고, 판도라에게 도움이 될 사람들은 잘만 살아남는 다는 것이었다.
"우연이라기엔 상황적 증거도 많고요."
아주 구린 냄새가 났다.
물론 유물 놈이 판도라 총수를 맡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거기까지 알 리는 없는 법.
"어쨌거나 주헌 님을 잡아가려면 판도라도 다 털어봐야 한다는 거죠."
"아무래도 주헌 님이 거슬리는 모양이에요."
그건 당연했다.
주헌은 자신의 회사를 통해 일반인도 비교적 쉽게 유물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왜?
주헌은 과거처럼 독식자들이 유물과 정보를 독점하는 걸 혐오했으니까.
그렇게 독식을 막았고, 주헌의 회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다.
물론 그걸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중에 하나가 판도라고요."
"판도라와 긴밀한 왕급들도 싫어하고 있죠."
"그래도 그렇지, 주헌 님이 재앙의 유물로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이니, 식민지가 목적이니 뭐니!"
"주헌 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맞아요! 그럴 시간에 유물을 노예로 만드실 분이지!"
어째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보셨나요? 재하 서기님이 보내주신 사진이요."
"꺄아! 공주님도 보셨어요?"
그들은 유재하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꺄아꺄아 좋아했다.
유재하가 보내준 사진은 다름 아닌 주헌의 츄리닝 사진.
바로 자신들이 보내줬던 그 백수 츄리닝이었다.
어떻게 그걸 입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진 속 주헌은 파란색 츄리닝을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마 팬심을 노린 유재하의 연출컷(?)인지 안경도 쓰고 있었다.
덕분에 반응은 폭발적!
"꺄아, 안경쓴 주헌님이라니! 어쩜 이렇게 지적으로 보이실까!"
"꼬고 있는 다리 좀 봐요! 기럭지! 기럭지!"
"우수에 차있는 눈빛 좀 보세요! 무슨 고뇌를 하고 계신 걸까!"
고뇌는 무슨.
'똥이 마렵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뿐이거늘.
사진은 츄리닝 사진만 있는 게 아니었다.
"꺄아아, 주헌님 수영복 사진이다!"
"주헌 님, 선글라스도 잘 어울려!"
"배 긁고 있는 거 너무 귀여워!"
"아저씨 같은 수영복인데도 귀여워!"
물론 주헌의 사진이라고 해도 엄연히 유재하의 셀카였다.
무려 유재하의 면적이 90%나 되는, 하지만 그래봐야 유재하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보이는 건 유재하의 팔 밑에 코딱지 만하게 찍힌 주헌 뿐.
그리고 좀 더 나아가면 주헌의 옆에 있는 비키니 차림의 여단원들 정도?
"함께 있는 분들이 너무 부러워요!"
"저희도 단원이 되고 싶어요!"
설아는 머리끈을 입에 앙 물은 채 긴 머리를 묶고 있었고, 아이린은 물기가 묻은 몸을 닦고 있었다.
뭔가를 줍고 있는 클로에는 엉덩이에 낀 수영복을 가다듬고 있었다.
아마 남자들이라면 당장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를 클릭할 정도로 끝내주는 몸매들.
모니터를 핥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히 주헌의 옆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공주들이 다짐했다.
"그럼 이번 아킬레우스 갑옷의 디자인은 저희가 맡죠!"
"그래요! 단원분들의 방어 유물도 완성됐다고 했으니 함께 드려요!"
공주들은 신이 나 있었다.
***
한편 뉴욕.
LA에서 출발했던 주헌 일행은 무사히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뭐 판도라가 지명수배를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야 상관없었다.
왜?
해당 나라에서 판도라에 협조를 안 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미 판도라를 배신한 나라.
그들의 수사요청에 따를 리도 없었다.
애초에 판도라가 내세운 주헌 일행의 죄목이 애매했다.
만약 판도라가 내세운 이유로 그들을 잡아야 한다면, 당장 판도라와 전 세계의 유물사용자들 모두가 잡혀가야 한다고 해야 하나.
'애초에 중2병이랑 귀신들린 죄는 뭐야.'
그러니 미국이 따를 리가.
그리고 차를 탄 그들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역시 아이린 안 받아요, 조지도 아이린이 어디로 간지 모르겠다던데."
"그래?"
"네. 자기를 찾지 말라고 하면서 사라졌다나."
유재하의 말에 단원들은 미간을 좁혔다.
그건 당연했다.
"분명 파산왕이 전생의 기억을 찾은 거 같다고 했지."
"뭐 복제품이긴 하지만."
그 말에 율리안은 심각해졌다.
복제품의 등급은 분명 S급.
자신들이 사용한 SS급 보다는 능력의 범위가 낮겠지만, 그래도 전생의 기억이었다.
"분명히 파산왕의 말로는 독식자들이 우리를 죽인 거라고 했지."
자세히 들어봐야 했지만 확실했다.
왜 아이린이 자신들을 피하겠는가.
자신들의 죽음에는 다른 독식자들도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파산왕 역시 독식자였고요."
단원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그들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럼 아이린도 우릴 죽였다는 거네? 그래서 전생의 기억을 찾고, 우리하고 연락을 안 하려는 거고."
"기억을 찾은 이상, 다른 꿍꿍이를 세우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래 보여도 독식자였으니."
일리야의 말에 단원들의 시선은 주헌에게 향했다.
아이린 역시 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주헌은 다른 생각인 것 같았다.
'적은 무슨.'
벌컥!
"다, 단장님?!"
주헌이 차 문을 열고 갑자기 사라졌다.
주헌이 갑자기 인파 사이로 사라지자 단원들은 깜짝 놀랐다.
"단장님!"
주헌은 거침없이 걸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건 바로 아이린.
[...여, 여보세요? 주헌 씨?]
"오, 내 전화는 받네."
[네? 아, 아니 저기 그게 재하 씨 전화는 저기 그러니까 안 받으려 한 게 아니라...!]
"지금 어디에요?"
그러자 아이린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죄, 죄송해요! 제가 주헌 씨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요. 그래도 저는 계속 주헌 씨를 도울 테니까...!]
뭐라는 건지.
주헌은 웃으며 훌쩍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편 전화를 받은 아이린은 안절부절 못했다.
아니, 유재하의 전화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만 하다가 결국 전화가 끊어졌고.
그러다가 주헌의 전화를 재빨리 받은 건 좋은데, 그와 만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기 주헌 씨, 주헌 씨가 절 내치시더라도 홀튼가가 돌아서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래서 숨은 곳이 고작 여기고?"
"꺄아아악!"
아이린은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은 놀라서 아이린을 보았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놀란 아이린은 놀란 토끼 눈으로 뒤를 보았다.
뒤에는 핸드폰을 든 채 웃고 있는 주헌이 있었다.
거참, 기껏 도망간 곳이 자신의 집이 빤히 보이는 카페라니.
"정말 나랑 다시 못 만나도 좋고?"
"주, 주헌 씨?!"
"뭐 그걸 정 원한다면..."
그 말에 울 것 같던 아이린이 황급히 주헌의 옷자락을 잡았다.
주헌은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아이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주, 주헌 씨!"
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이 떡 벌어졌다.
***
"잠깐만요, 주헌 씨! 잠깐만!"
아이린은 결국 주헌에게 쌀자루처럼 들려 호텔로 와야만 했다.
그녀는 당황하며 발버둥을 쳤지만, 주헌은 찰싹 엉덩이를 칠 뿐 놔주지 않았다.
뭐, 아이린이 어깨에서 발버둥을 칠 때마다 느껴지는 가슴의 감촉이 꽤 좋아서긴 했지만.
그리고 호텔에 먼저 돌아와 있던 단원들은 그 납치 광경에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잠깐, 어디서 아이린을..."
하지만 그는 대답은커녕 아이린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야릇한 소리에 단원들은 입을 떡 벌렸다.
"다, 단장님?!"
신음을 흘린 건 아이린이 아닌, 뜻밖에도 주헌이었다.
단 둘이 되자마자 아이린이 주헌에게 달려 든 것이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아이린은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주헌 씨, 주헌 씨. 죽으면 안 돼요. 또 죽으면..."
그녀는 애절하게 주헌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혀를 섞으면서 마치 주헌이 살아있는 걸 확인하는 듯 했다.
아무래도 전생에서 주헌이 죽는 일이 떠올라서 우는 것이리라.
비록 그때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직접 죽는 걸 보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의 뉴스기사를 봤을 뿐인데도 그녀는 슬퍼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그때 방관하면 안 됐는데... 놈들을 막았어야 했는데. 주헌 씨와 다른 분들을 죽..."
주헌은 말을 잇지 못하며 우는 아이린을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은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까 맘대로 죽이지는 말고."
끄덕이는 그녀를 향해 주헌이 물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답해줄 수 있죠?"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그 그 무렵.
"도대체 안에서 둘이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아아아아!"
"아아악! 설아야! 진정해, 진정!"
다짜고짜 아이린을 납치해서 방으로 데려간 주헌이었다.
그리고 둘은 한 시간이나 방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지난번 클로에 때와 같은 일.
게다가 그 때는 상대가 클로에였지, 이번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이린이었다.
덕분에 호텔방은 공동묘지화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설아가 파르르 몸을 떨고 있을 뿐인데도 그 지경이었다.
[어이쿠, 이놈들 죄다 저승으로 끌고 가면 되나?]
[얼울해에에, 억울해에에,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유재하는 스멀스멀 몰려오는 저승사자며 귀신들을 보고 캬아악 비명을 질렀다.
결국 유재하는 마늘이며 부적이며 십자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마 조금만 더 있다간 이곳 자체가 흉가가 될지도 몰랐다.
"이, 이번엔 장난으로라도 신음 소리가 들린다고 말 못하겠다."
그 말에 설아의 눈에 불꽃이 튀길 때였다.
벌컥.
"!"
방안에서 주헌이 나왔다.
"단장님!"
"아이린은요?"
아이린은 울다가 잠이 든 것 같았다.
유재하는 슬쩍 안을 훔쳐보려고 했지만, 주헌에게 얻어맞았다.
그리고 설아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구석에서 시무룩해진 채 훌쩍거리고 있었다.
율리안이 바로 경계하며 본론부터 물었다.
"우리가 죽은 이야기는 들어봤어?"
주헌은 예상대로라는 듯 웃었다.
뭐, 굉장히 뜻밖의 재미있는 이야기도 듣기는 했지만.
그는 판도라와 독식자들이 왜 그렇게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지 알 것 같았다.
"서, 설마 진짜로 아이린도 우리를 죽인 거래요?"
"결론부터 말하면 아이린은 아니야. 그리고..."
단원들을 힐끗 보던 주헌은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7대 무덤까지 발굴하면 그때 알려줄게."
"?"
고개를 갸웃거리던 율리안이 말했다.
"음? 마지막 7대 무덤이면 탐식의 무덤이잖아."
탐식의 유물 역시 마몬처럼 화석 유물이 된 상태였다.
단지 탐식 유물은 총수가 직접 관리하는 유물.
"잘못하면 총수가 직접 나설 수도 있어."
아무리 진채원이 주헌에게 호의를 가졌다고 해도, 총수가 계약자를 죽이고 주헌을 죽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자 유재하가 황급히 말했다.
"아니 그 전에 탐식의 무덤에 가려면 진채원 그 여자부터 만나야 하잖아요! 그 여자가 화석 유물 가지고 있다며!"
"그런데?"
그 말에 설아의 귀가 쫑긋했다.
"아니 단장님, 진채원 그 여자랑 데이트하기로 하지 않았어요? 며칠 뒤 크리스마스이브에..."
그 말에 주헌이 스읍, 유재하를 나무라듯 보았다.
아무래도 데이트 쪽은 비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쩌나.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설아가 눈을 번득였다.
그리고 다음날.
주헌을 당황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