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잔말 말고 따라와 (2)
싸우던 그녀들이 까마귀의 눈물을 밟는 그 순간.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에 진채원과 아이린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섬광은 둘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뭔가가 머리의 신경회로를 타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윽."
마치 기억의 바다에 내던져진다면 이런 느낌일까.
자신도 모르는 기억들이 하나하나 스며들어오자 둘은 괴로워했다.
머리가 깨지는 아픔보다는 멀미를 할 것 같은 괴로움.
그리고 그 괴로움 속에서 낯선 기억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둘은 동시에 주헌에 대한 기억을 먼저 떠올렸다.
물론 둘이 기억하는 주헌은 전혀 달랐다.
일단 진채원이 기억하는 주헌은...
'서주헌이 중국 소유의 무덤을 다 털어갔어!'
'너 진짜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된 남자한테 무슨 정보를 넘긴 거야!'
'바보야, 서주헌은 널 이용한 것뿐이라고!'
천하의 개새끼였다.
동료의 소개팅으로 만나 빠르게 가까워진 건 좋았지만, 당시는 냉전시대를 방불케 하던 스파이전이 오가던 때.
주헌은 당시 권 회장의 명령을 받고 움직였다.
그리고 당시 무덤 소유권을 가진 적들에게 접근하는 건 일상.
꼭꼭 숨은 무덤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뭐든 했다.
그리고 진채원 역시 그 타겟.
중국의 총수로서 홀라당 무덤의 정보를 넘긴 건 뼈아픈 실책이었다.
심지어.
'니가 그렇게 금사빠일 줄은 몰랐다. 심지어 손만 잡고 끝났어? 지금 어느 시대인데 손 잡았다고 반한 거냐!'
'...'
'도대체 왜 안 어울리는 짓을 했냐고!'
덕분에 진채원은 소위 멘붕에 빠지고 말았다.
심지어 그 뒤 주헌은 진채원에게 뭐라고 했더라.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 남아도, 너랑은 절대 안 자.'
그런 폭언까지 했다.
결국 중국은 주헌을 포획하는데 성공.
'자, 네 손으로 처결해라.'
주헌의 처리를 진채원에게 맡겼지만...
'마지막 기회야. 날 택해서 목숨을 부지할래, 아니면 여기서 도망쳐서 총수한테 살해당할래.'
진채원은 잡혀 있던 주헌에게 그런 제안을 했었다.
그리고 결과는 뻔했다.
'서주헌이 도망쳤다!'
그 뒤로는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건 당연했다.
자신의 자살로 삶이 끝났으니까.
그녀는 스스로 목을 긋는 장면을 떠올릴 때 몸을 덜덜 떨었다.
그리고 아이린이 기억하는 주헌이란...
'젠장 파산왕이다! 도망쳐!'
슬프게도 얼굴 한 번 제대로 안 보여주는 남자였다.
그리고 기억이 스며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둘은 굉장히 괴로워했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는 진채원에 비해서 아이린은 이만 악물뿐,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왜?
'...이, 이게 재하 씨가 말해줬던 왔어야 할 미래구나!'
그녀는 이미 내용에 대해서 구두로 들었으니까.
자세히는 몰라도 대충 어떻게 시대가 흘러갔는지는 들었다.
그래서 생전 처음 보는 것을 보는 진채원과 다르게 아이린은 심리적 방어막이 있었다.
다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빠가...!'
그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가족들이 전부 몰살당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하물며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 키이라의 밑에 있었다니.
그것도 피도 눈물도 없는 파산왕으로.
그래서 그녀는 몹시 괴로워했다.
게다가...
'주헌 씨.'
아이린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최강의 도굴단, 무덤에서 허무하게 매장되다.]
[생존자는 0.]
[권태준 회장 "자업자득. 그러게 왜 욕심을 부려서 그 무덤에 들어갔나."]
[TKBM 윗선 "우리는 분명 가지말라고 했다. 그 증거로 단원 중 한 명은 무덤에 가지 않아 생존.]
[서주헌 발굴단 "욕심을 부려 괜한 화를 자초."]
[사기왕, TKBM의 음모론 주장]
[TKBM "사기왕. 동료 잃고 정신 착란 증세. 정신과 입원 예정."]
아이린은 전혀 듣지 못했던 것이다.
주헌이 권 회장에게 배신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단원 전원이 토사구팽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또 있었다.
'겨우 그 눈엣가시들을 처리했네요.'
'왕급들의 협조 감사드립니다.'
옆방에서 비릿하게 웃던 권 회장과 공범들이 있었다.
그 기억에 아이린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주헌 씨.'
그리고 이때였다.
주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진채원과 아이린의 눈이 마주쳤다.
***
그리고 그 무렵.
[탐욕 무덤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주인의 권한으로 이곳의 모든 유물을 포식합니다.]
주헌은 눈앞에 뜨는 메시지에 하하하 웃었다.
무덤의 주인을 바꿔버리다니!
그리고 폭주하는 까마귀 오라는 무덤의 유물들을 죄다 포식하기 시작했다.
[방어형 문지기를 먹어치웠습니다.]
[공격형 문지기를 먹어치웠습니다.]
[커피를 제조하는 악마를를 먹어치웠습니다.]
[농사짓는 악마를 먹어치웠습니다.]
[뛰어난 지식의 악마를 먹어치웠습니다.]
[청소하는 악마를 먹어치웠습니다.]
[유물들이 도망쳐도 소용없습니다. 무덤의 주인으로서 길을 막아버립니다.]
옳지 옳지, 잘한다.
주헌은 상당히 좋아했다.
물론 율리안은 무덤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비명을 질렀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아아!"
상식적으로 무덤의 주인이 바뀌다니!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이야?"
확실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예외적으로 무덤에 간섭할 수 있는 존재가 딱 하나. 총수가 있었지만 원래는 불가능한 일.
그럼에도 지금 까마귀가 폭주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 있었다.
'여기가 탐욕의 무덤이니까.'
까마귀 역시 탐욕의 속성을 가진 유물.
사실 급으로 보나 속성으로 보나, 까마귀 역시 7대 무덤의 유물이 될 자격 그 이상이 있는 유물이었다.
그러니 이 마몬의 무덤에도 개입해 난동을 부릴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런 만큼 마몬은 미치고 환장할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저 상도덕도 없는 잡새가!]
무덤 최하층에 내팽개쳐진 마몬은 낑낑 발버둥을 쳤다.
까마귀가 어찌나 세게 내팽개쳤는지, 무덤 지면을 뚫고 깊숙이 박힐 정도였다.
그리고.
[저게 불쌍하게 감옥에 갇혀있다고 봐줬더니, 망할 새대가리가아아!]
본인도 본모습은 새대가리인 주제에 마몬은 '새라 뇌가 작니 뭐니' 씩씩거렸다.
어쨌거나 마몬은 지면을 딛고 튀어 올랐다.
붉은 빛에 휩싸인 그녀가 무섭게 지상으로 올랐다.
마몬 역시 7대 죄악에 속하는 악마 중 하나.
당연히 악마 중에선 유명했고, 유물은 유명하면 유명할수록 버프를 받는 법.
즉 그녀도 신급 유물이란 의미다.
그래서일까.
[진짜 가만 안 둬!]
물론 주헌과 계약을 할 생각은 사라진 상태였다.
서주헌 따위 아깝긴 해도 미련은 없었다.
왜?
[그런 포악한 까마귀 년이랑 한 집에서 살 수 있을 것 같냐!]
주인 후보자는 많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회, 회장님!"
"엄청난 유물의 기운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권 회장이었다.
동시에 엄청난 빛이 TKBM 발굴단 앞에서 터졌다.
쾅!
그리고 나타난 귀여운 아이의 모습에 발굴단은 모두 놀랐다.
"뭐, 뭐야 저 아이는!"
그러나 권 회장은 다른 의미로 입을 떡 벌렸다.
'보스잖아!'
그는 단번에 마몬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놀라는 것도 잠시, 그는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왜?
[흠, 첩으로 삼기엔 너무 쭈글쭈글 늙었고.]
마몬은 권 회장의 위아래를 훑으며 품평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권 회장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지배력은 충분한 것 같으니 자격요건은 그럭저럭 되는 것 같지만.
[나참, 서주헌보다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네.]
"?!"
[인간. 그리 늙어서 서긴 서는가? 거긴 안 쭈글쭈글해?]
"...?!"
졸지에 디스당하는 권 회장이었다.
아니 난데없이 나타나서 이게 뭔 소리람.
심지어 새파랗게 어린 꼬마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마몬은 활짝 웃었다.
[뭐 됐어. 결정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 내 노예 해라.]
***
뭐? 지금 뭐라고?
마몬의 말에 권 회장은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물론 보스가 제 앞에 나타난 건 아주 고맙다 이거였다.
안 그래도 권 회장은 무덤 안에서 치를 떨고 있었으니까.
왜?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기껏 유물을 통해 전생의 기억을 보면 뭐하나. 거기서 주헌의 공략법을 훔쳐봤으면 뭘 하나.
'공략법을 써먹을 수가 없는걸.'
물론 그가 본 공략법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주헌이 그랬던 것처럼, 문지기의 시선을 돌리고 증표만 몰래 빼돌리려고 했다.
관문은 넘쳐났고, 그 중 아무거나 7개만 통과하면 됐으니까.
단지.
[감히 그런 어설픈 수를 쓰려고 하다니.]
'끄아아아악!'
정작 문지기들의 시선을 돌리는 게 절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 황당할 수밖에.
'도대체 서주헌은 어떻게 증표만 빼돌린 거야.'
할 수 없이 부하들을 대량 희생시켜 증표를 빼돌리긴 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희생시킬 수 있는 부하의 숫자가 모자라다.'
그러나 관문은 4개나 남았고.
남은 인원도 한자리 수.
공략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보스는 아주 좋은 떡이었다.
성공 확률은 낮지만, 정복의 유물로 보스를 강제로 길들이는 방법이 있으니까.
그런데 보스가 스스로 계약을 하자고 나타나다니?
이게 웬 행운인가 싶었다.
[자, 내 노예가 되라니까?]
물론 그 입만 다물면.
하지만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마몬은 척 보기에도 강한 신급 유물.
손에 넣으면 무조건 이득이었다.
그래서 권 회장은 손을 내밀었다.
"좋다, 네 주인이 되어주지."
그러자 마몬이 큰 눈을 부릅떴다.
[야. 말 똑바로 안 해?]
"뭐?"
[내가 주인님! 그리고 네가 노예!]
"..."
이걸 콱.
권 회장은 이를 갈았다.
'참자, 참아.'
그런데 이때였다.
[단지 조건이 있다.]
"조건?"
[이 몸의 노예가 되고 싶으면 그만한 능력은 보여줘야지.]
"?"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권 회장 일행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말았다.
"으아아악!"
그리고 그들이 순간이동을 해서 날아온 곳은 다름 아닌...
"어, 뭐야? 노친네?"
"!"
바로 서주헌의 앞이었던 것이다.
TKBM 발굴단은 서주헌을 보고 이를 갈았다.
원수는 외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너 이 자식!"
그러나 마몬이 그들을 막았다.
[기다려라. 저 인간을 처리하면 내 노예로 삼아주지.]
"서주헌을 처리하라고?"
[그래. 내 첩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까마귀 놈이 침을 바른 인간에겐 관심 없어서.]
"허."
[물론 그 전에 내 힘을 빌려주마. 그걸로 저 인간들을 처리해라. 내 무덤에서 설치는 고얀 놈들이다.]
그 말에 단원들이 기겁을 했다.
"왜 단장님 유물이 권 회장한테!"
그러나 주헌은 태연했다.
"왜긴? 저놈을 다룰 만한 인간이나 말고 저 노친네 말고 더 있겠어?"
"네?!"
탐욕의 유물을 다루는 조건.
그 첫 번째는 사용자 본인이 엄청난 욕심쟁이여야 할 것.
마몬을 다룰 정도의 욕심쟁이는 애초에 이 무덤에서도 주헌 아니면 권 회장 정도밖에 없었다.
그 말에 납득한 단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꽤 곤란한 상황 아니에요?"
그건 당연했다.
주헌이 사용하던 최강 발굴 유물이 권 회장에게 넘어간다니!
그리고 상황이 그쯤 되자 율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까마귀가 마몬을 방해해서 넘어간 거 아니야? 쉽게 얻을 기회를!"
그 말에 까마귀가 움찔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주헌을 방해하게 된 것일까.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몇몇은 까마귀를 옹호했다.
"그래도 첩이 되라는 요구를 들어 줄 수도 없잖아요."
"아, 나도 반대. 단장님 하렘은 반대. 서러워서 살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럴 때였다.
쿵!
빡친 마몬이 권 회장에게 힘을 부여해줬다.
동시에 권 회장의 몸에서 근육이 불끈 불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끓어오르는 악마의 힘에 권 회장이 신이 난 듯 웃었다.
피부는 뱀파이어 마냥 하얗게 변했고, 눈 역시 악마처럼 붉게 변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히, 힘이!"
권 회장의 부하들도 악마로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단원들도 아니었지만.
"커헉!"
단원들은 적들을 바로 때려눕혔다.
"단장님, 저희에게 맡기세요!"
"커헉!"
이에 당황하던 마몬이 웃으면서 더욱 강한 힘을 뿜어댔다.
[이 무덤에서 너희는 최강이 되게 해주마!]
그리고 그 모습에 주헌이 대수롭지 않게 신급 유물을 꺼내들려고 했다.
마몬은 확실히 비보의 자격이 있을 정도로 강한 유물.
양쪽 다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되겠지만 강제로 끌고 나가는 수밖에.
그런데 그때였다.
[인간.]
한참을 고민하듯, 침묵하고 있던 까마귀가 주헌을 불렀다.
그리고.
[넌 네 유물이 기억을 되찾아도 좋겠느냐?]
무슨 생각인지 그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