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잭 더 리퍼 (4)
유재하는 그 낯익은 목소리에 기겁을 했다.
그는 틀림없는 도굴단의 공작원 일리야였다.
아무래도 그는 주헌의 소개팅 소식을 듣고 나간 세 사람이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아주 칼바람을 불면서 나갔으니까.
뭐 세상에 3대 구경이 불구경, 현피 구경(?), 여자 구경(?!)이라고, 처음엔 그저 치정싸움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나온 것뿐이지만.
그런데 뭐?
"설마하니 네놈의 비보가 피닉스인 줄은 몰랐는데."
"아, 아니 그게."
일리야의 살얼음 같은 웃음에 유재하는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창백할 정도로 시허연 얼굴에 입술만 뻘개서 흡혈귀 같이 무서웠다.
하지만.
"이게 좀비 주제에 날 그렇게 쉴드로 삼았단 말이지?!"
심지어 비보를 얻고 나서도 계속!
결국 그의 비보가 폭발하려고 했다.
동시에 유재하가 까무러쳤다.
"아아악! 삐약아! 내가 좀비인 건 맞는데, 그래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거든? 그래서...!"
"안 닥쳐?!"
"아아아악!"
유재하는 이제 졸지에 일리야의 쉴드마저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하하하! 좋은 방패다!"
악마의 힘으로 유재하를 냅다 잭 더 리퍼 쪽으로 던지고 말았다.
유재하는 또다시 꾸엑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 악독한 단원들은 유재하가 기절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일어나, 자식아! 네 역할이 크다!"
유재하는 엉엉 울었다.
"아니,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지. 이럴 거면 단한테도 시키라고! 억울해, 치사해, 단도 같이해!"
"그럼 니가 불러."
"어? 진짜 부르라고 했어! 누가 못 부를 줄 알아요?!"
유재하가 눈에 불을 켜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뭐, 단은 흔쾌히 맡아주겠지만 죽겠지."
"..."
"그래봐야 단이 죽으면 수아가 울 뿐이야."
"..."
"아마도 엄청 울겠지."
결국 유재하는 눈물을 머금고 핸드폰을 던졌다.
"젠장! 오늘부터 쉴더로 전직한 유재하입니다! 출발!"
"오냐. 좋은 태도다."
"캬아악!"
결국 유재하는 주헌에게 또 다시 걷어차였다.
그리고 잭 더 리퍼는 또 유재하라는 방패에 막혀버리고.
"크윽!"
도리어 주헌 일행에게 잡혀버렸다.
원 샷 원 킬이라는 악명에 흠이 갈 지경이었다.
그리고 잭 더 리퍼를 제압한 뒤, 그를 깔고 앉은 주헌이 험악하게 웃었다.
"자, 이제 얼굴 좀 봐볼까? 도대체 얼마나 미녀길래 이렇게 꽁꽁 싸매고 다녀."
주헌은 잭 더 리퍼가 쓴 후드를 붙잡았다.
그러자 주헌에게 깔려 있는 잭이 몸부림을 쳤다.
아마 얼굴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마침내, 후드가 벗겨졌다.
***
그리고 같은 시각.
"꺄악! 이거 풀어!"
다른 어두운 골목길.
거기에서는 살 떨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디 부릴 수작이 없어서 그딴 수작을 부려?"
유혹왕을 끌고 나온 설아와 아이린이 무시무시한 오라를 뿜어대고 있었다.
아까는 주헌이 있어서, 그리고 주헌이 위험할지도 몰라서 화를 눌러 참고 있었지만.
'감히 누굴. 그리고 나도 겨우 겨우 빼앗는 입술을 노려?'
'주헌 씨의 키스가 얼마나 귀한데.'
난 받아본 적도 없어! 없어!
이번엔 동아줄까지 드물게 합세했다.
그리고 분노의 싸대기를 날리고 온몸을 꽁꽁 묶었다.
남들이 보기 좀 민망스러운 형태일 지 몰랐지만, 아무래야 좋았다.
"저거 다 털어가면 단장님이 좋아하겠네."
"뭐, 뭐라고? 꺄악!"
유혹왕은 사정없이 벗겨졌다.
그럴 때 아이린이 난처해했다.
"아, 이 옷 잘 안 벗겨지네. 어떻게 벗기는 거지..."
"그냥 찢어요. 어차피 유물도 아니야."
"아, 좋아요!"
북북!
그들은 사정없이 엘레나의 얇은 옷을 칼로 찢었다.
그리고 속옷을 벗겨내고, 주물럭주물럭 온몸을 수색했다.
이 여자가 유물로 떡칠하고 있었다는 건 잘 아니까.
그런데.
"어?"
이상했다.
"뭐야, 유물이 몇 개 사라졌잖아?"
오라 탐지에 민감한 설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레나가 가지고 있던 유물은 한 20개 정도.
그래봐야 많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왜 비는 게 있는 거지? 기껏 단장님한테 전부 가지고 가려 했는데."
제 단장이 가져갔다곤 생각도 못하는 그녀들이 볼을 부풀렸다.
"에잇, 일단 이거라도 다 가져가요!"
"자, 잠까안! 꺄악!"
결국 엘레나가 홀라당 벗겨졌을 때였다.
"거기 뭐하는 거냐!"
"엘레나 씨!"
유혹왕을 섬기는 추종자들이 나타났다.
숫자는 대략 50명 정도.
그들은 가게에서 갑자기 사라진 엘레나를 찾으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엘레나 씨에게 손대지 마라!"
설아와 아이린은 좀 당황스러워했다.
왜?
"큭!"
유물의 힘을 쓸 수 없었다.
아주 못 쓰는 건 아니었지만, 신급 유물도 약간 먹통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왜.
하지만 곧 설아는 남자들의 손목시계를 보고 골치 아픈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레지스탕스가 주로 쓰던 유물.'
반 유물세력 노아.
클로에가 소속되어 있던 그 조직은 유물사용자들을 제압할 유물을 찾고 다녔다.
그리고 이것 역시 유물 사용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유물.
어디 그뿐인가.
"저, 저거!"
아이린의 옷자락을 잡은 설아가 입을 떡 벌렸다.
자신들을 향해서 우르르 달려오고 있는 건...
"엘레나님을 지켜라!"
"우오오오!"
"꺄악!"
사방에 있는 남자들이 몰려와 설아와 아이린, 동아줄을 습격했다.
그녀는 유혹왕.
주변에 있는 모든 이성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유혹왕은 웃으며 도주했다.
그리고 설아가 추적하려고 했지만 아이린이 막았다.
"힘도 쓸 수 없는데 무리하지 말아요."
"하지만!"
아이린은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
"아오, 진짜 그년들 다 죽여야지!"
알몸 차림의 엘레나는 경호원이 기다리고 있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가요. 그리고 파산왕이랑 염라왕의 비보는 늦지 않게 가져오라고 하고."
그리고 그녀는 설아와 아이린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하여간, 그런 것들이 무슨 왕급이라고. 비보도 어울리는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야."
하지만.
"뭐야. 왜 출발 안 해요?"
그러나 차를 멈춘 경호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였다.
"꺄악!"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추종자들이 엘레나를 쓰러트리고 팔과 다리를 억누르며 그녀를 덮쳤다.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기는.
"여기 유물이 몇 점 더 있다."
그들은 무서운 손놀림으로 엘레나의 물건을 빼앗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눈에서 유물 렌즈, 손톱에 붙인 인조손톱형 유물 등, 미처 아이린 일행이 회수하기 힘들어한 유물까지 깨끗이 빼앗기 시작한 것이다!
이쯤 되자 엘레나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봐! 미쳤어? 뭐하는 거야! 이거 놔! 으윽!"
자신들의 추종자들이 아닌 건가 싶었지만, 분명 자신들의 추종자가 맞았다.
그런데 왜!
"전부 아이린 님을 위해서입니다."
"뭐, 뭐라고?!"
아니나 다를까.
똑똑.
옆에서 누군가가 차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밖을 본 엘레나는 입을 떡 벌렸다.
'저, 저 여자들은!'
"빨리 안 내려? 이 여자야."
"꺄악!"
결국 엘레나는 추종자들에게 거칠게 끌려 차에서 내던져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엘레나에게 빼앗은 물건을 아이린에게 건넸다.
그뿐이 아니었다.
"여기 엘레나 코튼. 그 잭 더 리퍼를 고용한 흉악범이 있습니다. 잡아가십시오."
"뭐? 뭐라고? 너희들 미쳤어?!"
"네, 서주헌 일행을 잭 더 리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일반인들도요."
"뭐? 내가 언제! 너희 갑자기 왜이래!"
하지만 당황하는 것도 잠시,
띠링 띠링 띠링.
핸드폰으로 믿을 수 없는 메시지도 날아왔다.
[미안하네. 자네 스폰은 취소야. 아이린 님을 위해서 집도 재산도 팔아야 할 것 같아.]
[자네에게 일을 줄 수 없게 되었어. 화보일은 아이린 씨에게 맡기겠네.]
[미안. 내가 관리하던 네 전재산, 아이린 씨를 위해 잘 쓸게!]
"이, 이게 무슨!"
그러자 아이린이 방긋 웃었다.
"제가 새로운 비보를 얻어서요. 마침 시험해볼 곳이 없었는데 잘 됐네."
아이린의 뒤로 여우의 꼬리가 드러났다.
그건 무려 9개의 꼬리.
"뭐. 뭐야. 설마!"
그렇다.
아이린의 비보는 여우.
"유혹 기술이 유혹왕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소리죠."
바로 천년 묵은 구미호, 구미호 중에서도 탑이 된 천년호다.
그리고 이 천년호는 도교에서는 천계의 궁전에서 봉사하는 신선으로, 거의 하급신의 능력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사실 아이린은 왕의 무덤에서 여우 비보와 만났다.
그리고 그 유물은 처음엔 아이린을 무시하려 했다.
그런데.
[세상에, 서, 선배님?!]
천년호는 아이린과 함께 있는 달기를 보고 충격에 빠진 듯했다.
[세, 세상에. 옥황상제와 신들을 보좌하시던 호조사를 직접 뵙게 되다니!]
호조사(狐祖師).
천년호도 이미 하급신 단계에 이른 신급 유물이지만, 그 천년호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힘으로 상급신에 비견될 여우를 호조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달기가 그 호조사라는 것이다.
[까마귀한테 주신들께서도 거의 당하시고, 선배님도 총수한테 힘을 빼앗기셔서 다시는 못 뵐 줄 알았는데...!]
아이린은 놀라워했다.
'그러고 보면 주헌 씨가 그랬지.'
달기는 총수 세력에 의해 강등당하고 힘을 봉인당한 것 같다고.
그래서 주헌의 강한 양기를 흡수해 다시 신력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고.
어쨌든 그래서일까.
[가, 감히 선배님을 제압할 수 있는 인간이라니!]
아이린은 그때 폭주한 파산의 유물로 무지막지하게 달기를 굴려대지 않았었던가.
[호조사를 제압할 수 있는 인간이라니!]
천년호는 그런 아이린에게 경외심과 존경심을 품은 모양이었다.
[저희의 수장을 제압하신 분, 저 역시 따르겠나이다.]
그래서 아이린의 비보가 되었다.
달기는 그게 아니라며 미치고 환장했지만.
하지만.
[그리고 저 따위가 선배님을 두고 감히 비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선배님에게 비보의 힘을 넘겨드리겠어요!]
그렇게 이루어진 비보의 권한 양도.
결국 그 과정에서 달기가 황당하게도 아이린의 비보가 되었다.
비보와 계약을 했는데, 그 비보의 권한을 달기에게 넘겨버린 탓이리라.
달기는 이건 아니라며, 자기의 주인은 주헌이지, 이딴 여자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냥 아이린의 비보로 지내.'
'이, 이봐라, 주인 인간!'
'왜? 기껏 내 양기가 없어도 힘을 얻게 됐잖아?'
'그래요, 선배님. 제가 옆에서 지켜보며 배우겠습니다.'
'야!'
주헌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당분간 아이린에게 달기를 맡겼다.
아이린이 돌려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혹덩어리 뗄 겸(?) 재미 있겠다고 여긴 탓이리라.
무엇보다 비보로 나왔던 천년호 역시 아이린의 유물이 되었으니 좋은 것이었고.
뭐, 졸지에 아이린의 유물이 된 달기는 공포에 떨었지만.
'이, 인간 오, 오지 마라! 자꾸 그러면 정말 서주헌을 잡아먹겠다!'
'아, 잡아먹겠다고?'
'꺄아아아악!'
아무튼 아이린은 그 달기와 천년호의 능력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중 하나가 유혹.
자고로 너무 아름다운 미인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그야말로 파산의 힘을 가진 그녀에게 어울리는 비보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유혹의 힘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시험해볼까?"
아이린의 분노에 유혹왕은 비명을 질렀다.
***
그리고 그 무렵.
"세상에, 넌...!"
잭 더 리퍼의 후드를 벗긴 일행은 깜짝 놀랐다.
"니, 니나?"
율리안은 잭 더 리퍼의 정체를 깨닫고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째서, 왜 니나가!"
"봐, 내가 의심해봐야 한다고 했잖아."
주헌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잭 더 리퍼가 바뀌었다.
'혹시 미래가 바뀐 건가.'
하지만 그때였다.
"!"
주헌은 니나의 목 뒤에서 이상한 상처를 발견했다.
"이건..."
분명했다.
이건 과거 잭 더 리퍼의 목에도 있던 상처였다.
그것도 똑같은 상처.
"...설마 전생에도 잭 더 리퍼는 니나였나?"
그 말에 유재하가 황당해했다.
"네? 무슨 소리에요! 그럼 단장님이 왜 여자라는 걸 눈치를 못 채!"
그러자 한참을 고민하던 주헌이 진지하게 답했다.
"음, 가슴이 없어서...?"
결국 율리안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