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잭 더 리퍼 (1)
사람들은 갑자기 가게의 조명이 나가버리자 당황했다.
"뭐야, 정전이야?"
"무슨 일이야?"
사람들은 조명이 나갔을 뿐,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헌 일행은 달랐다.
'평범한 정전이 아니다.'
주헌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그의 우려대로 유혹왕은 어둠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암전은 곧 잭 더 리퍼의 사냥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
'자, 어서 다들 죽여라, 잭 더 리퍼.'
유혹왕 엘레나는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다.
율리안의 동생인 니나를 만나게 되었을 때부터.
'서주헌은 내가 차지하고, 책략... 아니 약탈왕은 니나로 처리하면 된다.'
그녀 역시 왕급을 위해 비보를 노리는 맹수.
비보를 얻은 주헌 일행을 호시탐탐 노렸지만 글쎄.
서주헌은 그렇다 쳐도 그 멤버들은 도대체 뭔지.
CIA와 MI6등 국가의 첩보원들도 나섰지만 주헌은커녕 그 멤버들의 약점조차 찾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나마 일리야가 합류하기 전에는 유의미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지만...
'일리야란 놈이 합류하고 나서부터는 국가첩보원들조차도 손을 못 쓰다니.'
그들도 당황하는 눈치였다.
도굴단과 관련된 정보들은 귀신 같이 모든 매체와 공식 기록에서도 사라졌다.
그나마 만만한 게 호구왕 놈이었는데, 이상하게 주헌하고 호구왕만 건들려고 하면 자꾸 나쁜 일이 벌어졌다.
자꾸 주식이 떨어진다거나, 하고 있는 사업들에 손해를 입거나.
그래서 이번에 얻게 된 주헌과 율리안의 약점은 아주 소중했다.
'서주헌은 유물로 꼬셔낸다.'
애초에 서주헌이 유물성애자란 소문은 있었다.
물론 비보를 얻게 된 이후로 뭔가 더 특별해진 것 같지만.
'서주헌은 호텔로 데리고 간다.'
하룻밤만 같이 보내도 주헌을 뻑가게 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에게 붙은 스폰들이 그 증거.
하지만 그전에...
'자, 어서 죽여라. 잭 더 리퍼.'
게다가 천하의 주헌도 동료의 죽음 앞에서는 일시적으로 정신이 나갈테니!
그리고 이때였다.
"니나, 괜찮아. 무서워할 것 없어. 그냥 누전된 것일 거야."
율리안은 암전 속에서 니나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니나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품속에서 칼을 꺼냈다.
'누구인지 몰라도, 잘 가라.'
그렇게 그녀가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팟!
나갔던 불이 다시 들어왔다.
"?!"
니나는 당황했다.
왜 벌써 불이 켜졌지?
차단기를 조작했던 니나는 주변을 살폈다.
직원이 차단기를 올렸다기엔 너무 이르다.
이곳의 전기배선 위치는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뭐야, 금방 돌아왔네."
사람들도 별거 아니었나보다며 안도했다.
물론 유혹왕은 니나를 쏘아보았다.
'지금 뭘 하는 거야.'
결국 기회를 보던 니나는 눈을 감고 다시 사이킥 관련 유물을 사용했다.
그러자 다시 꺼진 조명!
"꺄악! 뭐야! 또 정전?"
니나는 이번에야 말로 율리안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팟!
또 켜졌다!
니나는 당황해서 재빨리 칼을 숨겼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러나 그 답은 두꺼비집에 있었다.
야, 그러면 안 돼! 안... 컥!
그렇다. 누전차단기가 있는 곳에 동아줄이 있었던 것이다.
동아줄은 차단기가 떨어지면 다시 올렸다.
달칵! 달칵!
긴 몸을 이용하면 차단기와 스위치를 거의 동시에 조작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니까!
그러니 사이킥 유물로 전기 배선을 조작하면 뭘 하나.
팟! 팟! 팟!
전기가 나갈 때마다 계속 전기가 들어오고.
또 나가고 들어오고.
물론 인간이 죽는 냄새를 눈치챈 유물들은 그런 동아줄을 나무랐지만.
야, 기껏 인간이 죽을 것 같은데 뭐하는 거야!
그러나 동아줄은 듣지 않았다.
퍽! 퍽! 퍽!
도리어 나무라는 유물들을 때렸다.
그리고 이쯤 되자 가게 안은 무슨 사이키 조명을 튼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뭐야, 도대체 이거?"
"이봐요, 무슨 일이에요?"
이 황당한 상황에 사이킥 유물을 쓰던 니나는 이를 갈았다.
'젠장, 이러면 좀 무리해서라도 배선을 끊어야...'
하지만.
"니나, 왜 그래? 어디 아파?"
"...?!"
도리어 율리안의 집중을 사고 말았다.
그리고 유혹왕은 그런 니나를 보면서 답답해했다.
'도대체 지금 뭐하는 거야!'
결국 참다못한 유혹왕이 주헌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머, 가게가 좀 별로다. 우리끼리 나가서 이야기 할래요?"
그러나 그 순간.
톡톡.
누군가가 유혹왕의 등을 쳤다.
그리고 누군가 싶어서 뒤돌아보는 순간...
퍼억!
유혹왕은 안면을 두들겨 맞았다.
그곳엔 코브라마냥 무섭게 몸을 흔드는 동아줄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주헌을 데리고 뭘 하려는 거냐는 시선으로.
***
주헌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유혹왕은 어처구니없었다.
"이건 또 뭐... 꺄악!"
또 맞았다.
퍽!
이번엔 뺨이었다.
그리고 졸지에 밧줄한테 맞은 유혹왕은 거품을 물었다.
"이 미친 유혹이 진짜!"
빡친 유혹왕이 동아줄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 손 안 치워? 안 치워? 안 치워?
퍽퍽퍽퍽퍽!
"꺄아악!"
도리어 폭풍 구타를 당했다.
아마도 계속 주헌에게 달라붙은 유혹왕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리라.
하물며 불을 끄다니.
수작이 너무 훤했다.
그리고 그 무렵.
"여기 가게 배선이 좀 이상한가보네."
정작 죽을 위기의 율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니나는 이를 갈았다.
'불이 안 꺼지면 곤란한데.'
하지만 괜찮을지도 몰랐다.
'장소를 바꾸자.'
인적이 없는 장소로 유인하자.
그리 생각한 니나가 율리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기, 우리 나가서 이야기해요."
"어? 여기 불편하니?"
"네, 사람들도 많고, 차분히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서..."
율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헤이, 부단장님."
"!"
누군가가 율리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유재하였다.
율리안은 유재하가 나타나자 황당해했다.
"뭐야, 재하 네가 왜 여깄어?"
"그건 물으실 거 없고."
유재하는 슬쩍 율리안을 당겼다.
"됐으니까 잠깐 나하고 이야기 좀 합시다."
"?"
율리안이 호구왕에게 끌려가자 니나는 당황스러워했다.
어? 아니, 저거 데려가면 안 되는데?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유재하는 율리안을 끌고 갔다.
그 와중에 율리안은 니나를 놓고 갈 수 없다고 했지만, 유재하에게 얻어맞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유혹왕은 입을 떡 벌렸다.
'호구왕?!'
왜 저놈이 여기에 있어?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스크린으로만 보던 분이 여기 있네?"
"?!"
유혹왕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여인들을 보고 기겁했다.
'이설아, 아이린 홀튼!'
설아와 아이린은 번득이는 눈으로 유혹왕을 쏘아보고 있었다.
웃고 있지만 살의가 등등했다.
그리고 그들은 유혹왕에게서 주헌을 빼앗아갔다.
"우리 단장님하고 비.즈.니.스 이야기는 잘하고 계시나 몰라."
"이야기는 끝나셨어요?"
아니 끝나긴 뭘 끝나.
'이 방해꾼들이!'
유혹왕은 둘을 쏘아보았다.
아주 가증스럽다는 시선이었다.
"너희들을 초대한 적은 없어. 당장 돌아가."
유혹왕이 낮게 으르렁거리자 설아가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초대는 개뿔이, 니가 여기에 전세 냈어? 우리도 커피 마시려고 온 거거든?"
"괜찮다면 저희들도 합석해도 될까요?"
웃고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굉장히 무서웠다.
천사가 지옥의 불을 삼키고 있는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그들은 서로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럴 때였다.
"뭐야, 너희들이 왜 여기에 있어?"
"!"
주헌이었다.
주헌의 부름에 설아와 아이린은 순간 움찔했다.
"너희 오늘 일찍 잔다고 하지 않았어?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고."
둘은 난처한 얼굴로 주헌을 보았다.
"아, 그, 그게."
손가락을 꼬물거리는 그녀들은 주헌의 시선을 피하며 웃었다.
"어, 저기...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바람?"
주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시선을 받던 그녀들은 민망한 듯 눈을 또르륵 굴리다가 주헌에게 다가왔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주헌 씨."
"음?"
"재하 씨 말로는 여기에 잭 더 리퍼가 나타난 것 같다고..."
그 속삭임에 주헌은 더더욱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고? 유재하?
"그놈은 또 왜 여기에 있는데?"
아니, 그런 건 아무래야 좋았다.
보나마나 그 입 싼 놈이 자신이 유혹왕을 만나러 왔다는 걸 불었을 테지.
중요한 건.
'잭 더 리퍼라고?'
지금도 수많은 이야기의 소재거리가 되는 런던의 연쇄살인마.
그 전에도 살인마는 많았지만 잔혹한 살인방법, 도발, 여왕의 분노, 당시 언론의 보도 등 다양한 이유로 유명세를 탔다.
과학이 발전한 후대엔 DNA 추적으로 유대계 이발사가 범인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어느 역사적 사건에서 그러하듯 끊임 없는 논쟁이 이어졌다.
뭐 중요한 건 그 유물이 살인마로 유명한 만큼, 오딘의 궁니르 같이 상당한 암살유물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도 주헌을 비롯한 독식자들을 상당히 괴롭혔던 놈.
그 암살 실력이 상당해, 갖은 왕급들이 죽어나갔다.
'최근에도 나타난 건 알았지만.'
신문에서 보도되었고, 결정적으로 유재하가 잭 더 리퍼를 만났다고 했다.
오피셜 복원사들을 닥치게 하고, 영국 공주와 만나게 된 그 경매소에서.
그때도 장관과 영국왕자를 죽이는 둥, 유물사용자들을 죽였다고 들었건만.
'그놈이 이 가게에 있다고?'
"누가 그래?"
"재하 씨가요."
주헌은 납득하며 칼을 뽑아 들었다.
최근에 잭 더 리퍼와 만나봤으니 그의 감이 틀리진 않을 것이리라.
숨는 실력이 귀신 같은 암살자지만, 유재하 역시 그래보여도 왕급.
주헌은 급하게 말했다.
"설아야, 추적해."
놈은 나타나면 반드시 사람을 죽이고 사라진다.
하물며 주헌도, 심지어 단조차도 상당히 애먹었던 유물.
방심하면 골로 간다.
'목적은 뻔하군.'
아마 자신들이 가진 비보일 터.
냄새를 맡고 왔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네 짓이지?"
주헌은 유혹왕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유혹왕은 시치미를 뚝 뗐다.
"난 모르겠는데?"
하지만 주헌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그놈과 살 떨리는 전쟁을 치른 적 있으니까.
물론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재하 씨 말로는 여자래요."
"...?!"
뭔 소리야 그건.
***
여자라고?
미쳤나.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자신이 상대했던 잭 더 리퍼는 남자였다.
얼굴은 못 봤지만...
혹시 미래가 바뀌었나?
'아니면 유재하 놈이 잘못 안 걸 수도.'
잭 더 리퍼 유물은 남성용 유물이니까.
하지만 유재하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보여도 자기 목숨이 걸린(?) 문제에선 유독 생존본능이 뛰어난 짐승 비슷한 놈이니까.
그래서일까, 그는 급하게 율리안의 자리를 보았다.
하지만.
'없다.'
율리안도, 니나도 없었다.
'젠장.'
주헌은 재빨리 설아와 아이린에게 말했다.
"둘 다 따라와."
그리고 자신 역시 잭 더 리퍼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가긴 어딜 가요."
주헌이 지나치던 유혹왕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쪽. 그대로 진한 키스를 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