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과거의 인연 (2)
"단장이라면 소개팅 갔는데."
그 말에 설아는 물론, 아이린의 눈이 번쩍였다.
지금 뭐라고?
물론 일리야의 태연한 말에 가장 기겁한 것은 유재하였다.
아니 지금 저놈이 뭐라고 한 거야!
"야, 이 눈치 없는 놈아! 그걸 여기서 말하면 어떡해!"
"왜? 소개팅 좀 나갈 수 있지."
"뭐, 뭐? 아, 아니 그게..."
유재하는 힐끔 뒤를 보았다.
그리고 그곳엔 아니나 다를까.
"유재하 씨, 왜 거짓말 했어? 단장님이 산채액?"
"왜 그걸 이제 말씀해주세요? 재하 씨?"
"?!"
흉흉한 오라가 치솟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오라에 유재하가 비명을 질렀다.
"둘 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특히 설아가 내뿜는 오라의 형태는 뱀!
그것도 평범한 뱀이 아니었다.
힌두교, 마야 문명권에서 숭배되고 동양과 서양 할 것 없이 자주 등장하는 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존재.
영원한 생명. 용왕.
설아가 얻은 비보는 나가였다.
하지만 흉흉한 살기를 뿜어대는 건 설아뿐이 아니었다.
"아아악! 내 유무우울!"
유재하의 유물은 파산의 힘에 작살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유재하가 거품을 물며 유물들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유물은 놀랍게도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사실 유재하의 비보는 피닉스, 즉 불사조였다.
이집트의 벤누, 봉황, 인도의 가루다, 주작과도 비교되는 신조.
죽은 뒤 다시 되살아나는 존재, 동시에 끊임없는 재생의 상징.
그래서 유재하는 번개에 맞거나 비행기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육신을 가진 것이었고, 동시에 사기적인 복원 스킬을 가지게 된 것도 있었다.
자신의 육체를 재생하는 것처럼, 유물 역시 재생할 수 있으니까.
결국 유물을 재생시킨 유재하가 두 여인을 보았다.
"아이고, 둘 다 걱정 마. 단장님 곧 돌아오실 테니까... 힉."
그러나 곧 그는 일리야를 던졌다.
"젠장, 부탁한다! 삐약이! 프렌즈 쉴드!"
"뭐, 뭐라고?!"
밀쳐지기가 무섭게 일리야는 비명을 질렀다.
콰앙!
결국 둘의 오라에 직격타를 맞은 일리야는 장렬하게 쓰러졌다.
"...너, 너 이 새끼. 죽여버리..."
"헉헉, 살았다."
비록 불사조 비보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고통까지 못 느끼는 건 아닌 법.
뭐 그래서 주헌한테는 죽어도 비보에 대해서 비밀로 했던 것이고.
왜?
'분명해. 단장님이 아는 순간 난 총알받이 행이야.'
그 성격에 그러고도 남지.
결국 유재하는 다급하게 두 여인을 달랬다.
"아무튼, 설명해줄 테니까 둘 다 기다리...!"
하지만 이미 아이린과 설아는 사라져 있었다.
***
그리고 그 무렵.
율리안의 시선은 앞자리에 있는 미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진짜 니나가 맞는 건가.'
나이는 20살.
율리안과 비슷한 짙은 금발, 갈색 눈.
아직도 그는 동생이 죽는 순간을 잊지 못했다.
몇 개월 전.
학교에서 고분화가 일어났을 당시, 유물에 지배당한 사람의 칼에 찔려 살해당한 것이다.
시신은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율리안의 이야기를 들은 주헌은 이렇게 계산 했었다.
'네 동생은 죽은 게 아니라 가사상태에 빠진 것일 수도 있어.'
'!'
찔린 유물이 인간을 가사상태로 만드는 유물이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그 뒤, 미국에서 니나를 목격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 동생이 율리안의 앞에 나타났다.
틀림없는 자신의 여동생, 니나였다.
하지만.
'케이트 알렌이라고?'
그녀는 독일인이 아닌 토종 미국인이라고 했다.
그러니 율리안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젠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니나가 아닌 건가.
반면 주헌이 빤히 케이트를 보았다.
'분명 공명이놈 동생이 맞는데.'
뭐 공명이랑 닮지는 않았지만 척하면 척이었다.
옛날에 공명이한테 여동생을 찾아준 것도 자신이고.
애초에 유물로 만든 가짜면 자신이 이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일부러 다른 사람인 척 하고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율리안을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고.
주헌은 힐끗 유혹왕을 보았다.
'혹시 이 여자가 기억을 지운 건가?'
가능성은 크다.
그리고 일부러 이 자리에 불러냈겠지.
왜?
'비보를 빼앗기 위해서.'
공명이가 동생을 잃었다는 건 알만한 놈들은 다 알았다.
그리고 그 동생을 어디서 어떻게 구해왔는지는 몰라도...
'동생을 이용해서 비보를 빼앗아가려고 했었나.'
하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다른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꾸만 율리안을 놀려댔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보나마나 이놈의 지배력을 흔드는 것뿐이겠지만.'
그러면 비보를 쉽게 빼앗을 수 있을 테니까.
실제로 율리안도 증거가 없어서 똥줄만 태우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어머, 왜 그렇게 케이트를 보죠? 아직도 케이트가 당신 동생 같아요? 그쯤 되면 심각한 시스콤 아닌가."
놀리는 듯한 말투.
결국 참다못한 율리안이 흥분해서 벌떡 일어섰다.
"...이봐요! 아까부터 계속 말했지만 이 아이는 케이트가 아니라 니나... 크윽!"
율리안은 졸지에 발이 밟혔다.
주헌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나 팔짱을 끼고 있는 주헌은 눈을 번득이며 낮게 읖조렸다.
"흥분하지 말고 앉아."
한국말이었다.
"휘둘리면 니 지배력만 흔들려."
이를 갈던 율리안은 미안하다며 도로 앉았다.
주헌은 달래듯 말했다.
"너무 걱정 말라니까. 정 안되면 내가 철저하게 꼬셔서 빼돌려준대도."
주헌은 또다시 멱살이 잡혔다.
"진짜 콱...!"
주헌에게 빼앗긴 건 약혼녀만으로 충분했다.
그럴 때 엘레나가 가증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자기들끼리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속닥이는 건 실례죠. 저도 그렇지만 케이트도 미국에서만 살아서 영어밖에 못 해요."
율리안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글쎄, 이 아이는 케이트가 아니라 니나...!"
"증거 있어요?"
"뭐라고?"
"증거 있냐고요."
그러자 주헌은 같잖다는 듯 웃었다.
'꼬시고 자시고, 그 전에 저 가증스러운 가면들부터 벗겨야겠군.'
일단 미국인인척 하는 그 가면부터.
그래서일까, 주헌이 대뜸 독일어로 이렇게 말했다.
"야, 율리안. 얘 아까부터 예쁜 척 하는 거 재수 없지 않냐?"
그 말에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케이트가 움찔했다.
율리안은 당황해서 무심결에 모국어로 답했다.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도굴단 멤버들과 있을 때도 70%가 영어, 30%가 한국어.
거의 실시간 영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잘 사용하던 영어도 때려치고 뜬금없이 왜 그딴 뒷담도 아닌 앞담을...
그러나 율리안은 아차 싶었다.
이 자식 설마.
아니나 다를까, 주헌이 신랄하게 비웃었다.
"난 이런 주제 파악도 못하는 타입 딱 질색이야. 그래도 몸매는 합격."
"..."
"아니면 네가 데려갈래?"
"야, 서주..."
"왜? 돈이면 좋다고 엉덩이 흔들면서 따라올 타입 같은데."
결국 율리안이 화를 내려는 찰나, 케이트가 벌떡 일어섰다.
굉장히 수치심이 어린 눈빛이었다.
"이봐요, 당신 그 말...!"
그러자 주헌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말?"
"...그래요, 방금 그 말!"
"뭐야. 너 영어 밖에 못 한다며?"
동시에 당황한 케이트가 눈알을 굴렸다.
"...그, 그 말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불쾌하니까 그만할래요?"
곧 케이트가 활짝 웃자 주헌이 독어로 한마디 했다.
"이빨에 낀 고춧가루는 빼고 말하시지."
"?!"
케이트가 반사적으로 제 입을 막았다.
주헌은 밉살맞게 웃었다.
"독일어 잘 알아들으시네?"
엘레나는 망했다는 듯 혀를 찼다.
***
"토종 미국인이라며."
"..."
"어디서 구라야, 구라는."
젠장.
엘레나는 다른 테이블에서 대화를 하는 율리안과 니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하필 거기서 들켜가지고.
'조금만 더 하면 약탈왕의 비보는 빼앗을 수 있었는데.'
할 수 없었다.
'다음 단계로 가는 수밖에.'
결국 한숨을 쉬던 엘레나가 활짝 웃으며 주헌의 옆에 앉았다.
향긋한 냄새가 날 것 같은 몸짓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주헌은 같잖다는 듯 쏘아 보았다.
"자리 많잖아. 딴 데 앉아."
그러자 무시한 엘레나는 슬며시 주헌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에이, 주헌 씨하고 좋은 이야기하려고 그러죠."
이때 주헌의 단단한 근육을 느낀 탓인지, 엘레나는 살짝 두근거릴 뻔했다.
'어머. 안 그렇게 보이는데 옷 속은 완전히 다르네.'
한 번 옷을 벗겨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주헌 씨는 내가 별론가 봐?"
"됐으니까, 단둘이 되면 저 여자에 대해서 알려준다며? 이제 말해봐."
그러자 엘레나는 슬그머니 주헌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쓸었다.
"말해줄 수는 있는데, 우린 우리만의 대화를 하는 게 좋지 않나."
엘레나한테는 좋은 냄새가 났다.
'유물인가?'
몸 곳곳에 유물의 기운이 아주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무렵.
"꺄악! 쟤 미쳤어?! 어디서 단장님 가슴에 안겨! 저게 죽을려고?!"
"세상에 손금이라니, 우리 부모님도 안 써먹으셨겠네요."
둘을 바라보며 불꽃을 뿜어내고 있는 여인들이 있었다.
아이린과 설아였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 변장까지 한 둘은 아주 엘레나를 씹어 죽이려고 했다.
그리고.
"꺄악! 저거 손, 손! 당장 치워!"
"어디까지 만지는 거야!"
그리고 그런 둘을 향해 민망하게 손을 뻗는 사람이 한 명.
"저... 커피 주문은 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끌려온 유재하다.
'아이고 내 신세야.'
설아하고 아이린이 사고치기 전에 따라온 건 좋은데, 도리어 설아에게 멱살이 잡혀서 내비게이션이 되다니.
유재하는 종업원의 눈치를 살피며 훌쩍였다.
"저기, 지금 종업원이 무섭게 바라보고 있거든? 주문을..."
"아 좀, 조용히 해봐!"
"아무거나 시켜줘요!"
"...어? 그래. 그럼 커피 3잔... 그런데 여기 선불..."
"꺄아악! 저게 어디서 감히 단장님한테 오리주둥이 같은 입술을 들이밀..."
"저 여자 사는 곳이 어디죠?"
아이고 내 팔자야.
유재하는 훌쩍이면서 커피를 세 잔 시켰다.
평소라면 이런 일도 없겠지만, 지금은 둘 다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뭐 그럴 만도 하지만.'
분위기 좋구만.
그리고 점점 엘레나는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마침내 그녀의 손이 주헌의 얼굴을 쓸고 입이라도 맞추려는 때.
콱.
엘레나의 팔이 거칠게 잡혔다.
주헌이 엘레나에게 말했다.
"은근슬쩍 개수작 부리지 말고."
물론 멀리서 보기엔 주헌이 터프하게 엘레나의 팔을 잡은 걸로 보였지만.
"시간 끌지 말고 말해. 저 여자애 어디서 거둔 거야?"
그러자 엘레나가 주헌의 얼굴에 가까워지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나한테 이래도 괜찮겠어요? 이제 슬슬 당신도 사냥당할 텐데."
"?"
그럴 때였다.
갑자기 카페의 모든 불이 꺼졌다.
깜짝 놀란 율리안은 동생을 안심 시켰다.
"니나, 괜찮아. 곧 불이 들어올 거야..."
하지만 그 순간.
유재하가 암전 속에서 움찔거렸다.
왜?
'이거 분명 그때 그 경매장에서...'
곧 니나의 눈이 번득였다.
잭더리퍼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