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과거의 인연 (1)
이때 주헌의 앞에 스쳐 지나갔다.
검은 깃털.
그리고 인간의 모습을 한 그 녀석이.
순간적으로 주헌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까마귀?'
행단보도를 건너오던 주헌은 뒤를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파란불에 길을 건너고 있었다.
백인, 흑인, 동양인,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모두 뉴욕거리를 걷고 있는 평범한 시민들.
저 중에 유물은 없다.
하지만 분명히 놈의 기척을 느꼈는데.
아마도 검은색 긴 머리.
나이는 20대쯤?
그럴 때였다.
위험해! 위험해!
동아줄이 황급히 주헌을 잡아당겼다.
그 사이에 신호등의 불이 적색으로 바뀐 탓이다.
위험천만하게 자동차에 치일 뻔한 주헌은 횡단보도 너머를 보았다.
괜찮아? 괜찮아?
주헌은 자신을 살피는 동아줄을 쓰다듬어주며 그대로 인파를 헤치고 놈을 따라갔다.
심지어 약속장소와 반대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음침한 놈, 스토킹 하고 있을 줄 알았다.'
물론 동아줄이 낑낑거리면서 시간을 살폈다.
약속시간까지는 5분 전.
약속 장소에 안 가도 돼? 안 가도 돼?
하고 주헌의 볼을 살짝 두드렸다.
하지만 약속이고 자시고.
'이쪽이 먼저다.'
하물며 아쉬운 건 약속한 상대지, 알게 뭐람.
그리 생각한 주헌이 훌쩍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그 무렵.
'젠장. 서주헌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먼저 약속장소에서 대기 중인 율리안은 시계를 보며 동동 굴렀다.
그리고 눈앞에는 아름다운 미녀가 있었다.
그녀는 헐리웃 배우로 유명한 엘레나 코튼.
동시에 유혹왕이라고 불리는 독식자.
과거엔 클레오파트라 유물을 사용하던 유물사용자이기도 하고.
하물며 눈이 멀 정도로 엄청난 미인이었다.
타입은 좀 다르긴 해도, 아이린과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쑥맥 율리안의 옆에 다가와 앉으면서 말했다.
"어머. 서주헌은 어쩌고 당신이 왔어요?"
"... 곧 올 겁니다."
아이고 머리야.
율리안은 골치 아픈 듯 미간을 찌푸렸다.
독식자 중 한 명과 약속을 했으니 같이 가자고 한 게 누군데 지각이야. 지각은!
'애초에 유혹왕이 나온다는 말은 안 했잖아!'
그리고 뭐?
2:2 소개팅?
서주헌 이자식이!
곧 유혹왕이 웃었다.
"정말 서주헌 씨 오긴 와요? 벌써 20분이나 지났는데?"
"옵니... 큭!"
율리안은 허벅지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
엘레나는 매혹적으로 웃으면서 율리안의 손을 붙잡았다.
"할 일도 없는데, 제가 손금이나 봐드릴까요?"
그러더니 꼬고 있던 다리의 방향을 돌렸다.
순간적으로 매끈한 허벅지의 아찔한 안쪽이 보인 것 같아 율리안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서, 서주헌 이 자식아, 빨리 오라고!'
확 그냥 가버릴까 보다!
독식자 놈들의 유물을 빼앗을 거라면서 같이 좀 가자고 해서 기껏 쫓아와줬더니.
이러다가 자신이 비보를 빼앗길 판이었다.
곧 엘레나의 가슴이 자꾸만 율리안의 팔을 쿡쿡 찌를 때였다.
"...자꾸 이러시면 서주헌이 오기 전에 전 돌아가겠..."
그렇게 율리안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 순간이었다.
'!'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어머, 왔어?"
엘레나에게 오는 사람을 보고 율리안은 기겁했다.
자, 잠깐만. 왜 저 사람이!
***
그리고 그 무렵.
공원까지 온 주헌은 주변을 살폈다.
약속장소하고는 한참 멀어졌지만 틀림없었다.
이 근방에서 까마귀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쯤 갔을까.
'찾았다.'
주헌은 공원에서 검은 머리의 여자를 발견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여자의 어깨를 잡았다.
"야, 너."
[용케도 날 찾아왔구나.]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여자는 주헌을 반가워했다.
주헌은 미간을 좁혔다.
"똥개훈련 시키냐? 나타나려면 집에 있을 때 나타나지, 왜 이런 곳에서?"
[다른 방해가 없는 장소가 필요했...]
이때였다.
[꺄악!]
곧 여자의 목소리가 끊겼다.
주헌이 사정없이 여자의 옷을 찢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부욱!
[?!]
곧 드러난 새하얀 알몸.
여자는 당황했다.
[무, 무슨 짓이야!]
그러나 주헌은 같잖다는 듯이 자신이 찢은 옷을 보았다.
"어딨어."
[뭐?]
"너, 내 까마귀 아니잖아?"
[!]
옷 안쪽에는 까마귀의 깃털이 꽂혀 있었다.
주헌은 그 깃털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까마귀의 기운을 이 옷에 묻힌 것 같은데."
곧 주헌의 몸에서 스멀스멀 검은 오라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상대를 집어 삼키기 위한 포식의 오라.
"이딴 거 말고. 진짜 내 까마귀는 어디에 있냐?"
[큭!]
그녀는 급하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곧 주헌에게 짓밟혔다.
당황한 여자 유물이 외쳤다.
[까, 까마귀는 우리도 몰라! 옛날에 그놈을 만났을 때의 힘을 묻힌 것 뿐...!]
"그으래?"
곧 공원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헌의 검은 오라는 무섭게 여자를 물어뜯고 집어 삼켜버렸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당황하는 무리가 두 명.
[제, 젠장!]
그들은 까마귀인 척해서 주헌에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왜?
'까마귀는 서주헌의 근처에 없다.'
확실했다.
다른 비보들은 늘 주인의 근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
기생형 유물이니까.
그 증거로 다른 주헌의 멤버들의 신체엔 기생형처럼 유물들의 본체가 들러붙어 있었다.
하지만 서주헌은 다르다.
'어딜 봐도 까마귀의 본체는 없다.'
그래서 주헌의 앞에 까마귀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뭐, 그러면서 어떻게 까마귀의 힘을 가지게 된 건지는 의문이지만.
어쨌거나 몸에 비보가 기생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까마귀로 위장해 주헌의 몸에 기생할 수도 있는 일.
그렇게 까마귀인 척 기생해 주헌의 몸을 지배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놈을 낚는 건 실패했다!]
[철수다 철수! 총수님께 실패했다고 알려!]
그런데 이때였다.
"어이쿠, 여기 유물 놈이 또 있었네?"
뒤에서 들린 소름끼치는 목소리.
뒤이어 또다시 공원에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국 주헌의 몸에 기생하려 시도했던 총수의 첩자들은 주헌의 손에 들어갔다.
결국 주헌은 까마귀 깃털을 던지며 돌아섰다.
"칫, 내 유물 놈은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그렇게 주헌이 약속장소로 가려는 순간.
[어디긴. 여기 잘 붙어있지 않느냐.]
"!"
주헌은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있기는 뭘 붙어 있었..."
하지만 고개를 돌린 주헌은 깜짝 놀랐다.
"!"
눈앞에는 웬 쭉쭉빵빵 여자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알몸으로!
***
주헌은 제 눈을 의심했다.
분명 이번엔 틀림없는 까마귀 놈이 맞았다.
하지만.
'알몸?'
턱을 괸 여자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주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몸을 감싸는 긴 흑발.
얼핏 차가워 보이는 붉은 눈.
주헌이 던진 깃털 위로 웬 쭉쭉빵빵 젊은 여자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너..."
곧 쭉쭉빵빵 미녀는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딱히 몸을 가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덕분에 탱탱하고 예쁜 가슴이 흔들렸고, 주헌은 이마를 짚었다.
"뭐야, 그 꼴은."
주헌은 눈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게 묘하게 자존심 상했는지 까마귀가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이냐? 기껏 인간 남자의 취향대로 맞춰줬더니.]
주헌은 뒷목을 잡았다.
뭐, 다른 남자들이야 저 모습을 보고 좋아서 난리를 쳤겠지만.
'그래봐야 유물인 것을.'
주헌은 손을 휘휘 저었다.
"됐으니까 그 모습 말고, 다른 모습으로 바꿔."
[다른 모습?]
"그 모습만 아니면 돼."
결국 까마귀는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이제 됐느냐?]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이번엔 쌍욕을 날릴 뻔했다.
이번에 까마귀가 변한 건 쭉쭉빵빵한... 남자 보디빌더였다.
아니... 울퉁불퉁이 맞겠지.
"야씨, 너 진짜 죽을래?"
그러자 까마귀는 심술궂게 불끈 불끈 근육 포즈를 잡으면서 한마디 했다.
[왜? 아까 그 모습만 아니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걸 콱 목 졸라 죽여버릴까.
"아무리 그래도 남자는 아니지..."
곧 까마귀는 적당히 검은색 도둑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아무래도 까마귀는 여러 유물을 잡아먹었던 만큼,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마 그 쭉쭉빵빵 여자도, 근육 쭉쭉빵빵 보디빌더도 까마귀 본래 모습은 아니리라.
"아무튼, 계약했으면서 왜 딴 데 싸돌아다니냐."
[계속 옆에 있었는데.]
"?"
곧 주헌이 됐다는 듯이 말했다.
"있으면 됐어. 다른 비보들은 죄다 주인 옆에 있다는데, 나만 계약이 잘못 됐나 했네."
[뭐, 정상적인 계약은 아니지.]
"...?"
까마귀가 가볍게 웃는 듯 했다.
[지금 나는 본체가 아니다.]
"뭐? 본체가 아니라니?"
[말 그대로야. 내 본체가 있는 곳은 다른 곳이다. 너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
확실히 주헌은 짐작되는 곳이 있는지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면 왕의 무덤에서 느꼈던 까마귀의 무덤.
그 무덤은 자신들이 죽었던 최후의 무덤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후의 무덤은 왕의 무덤보다도 더 무시무시하고,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던 곳이니까.
자신들조차도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나갔던 곳.
하지만 왕의 무덤은 그 정도라고 하기엔...
[왕의 무덤은 네 기준에서 좀 약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
"...그럼 넌 뭔데? 가짜냐?"
[아니. 쉽게 말하면 분신체다. 네놈이 7대 무덤의 유물을 얻은 덕분에 내 무덤에 틈이 생겨서. 그 틈으로 사념을 빼돌린 것뿐이지.]
"사념체?"
[그래도 계약을 한 건 맞으니 넌 내 힘을 쓰는데 지장은 없을 거다. 사념체라 해도 본체와 연결되어 있고.]
"그럼 됐어. 힘쓰는데 지장 없으면. 오히려 잘됐네, 네 본체까진 안 가지러 가도 되니까."
다시 그 무덤에 가는 건 사양이라고 했다.
그 말에 곧 까마귀가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
[그래도 만약 괜찮으면...]
하지만 까마귀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을 돌렸다.
[비보들을 독식한 건 좋지만, 총수와 프로메테우스를 조심해라. 비보를 빼앗겼기 때문에 계획을 앞당길 수도 있어.]
"계획을 앞당겨?"
[유물과 무덤이 네가 아는 종류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뭐?"
[네가 겪었던 전생. 그때 나왔던 유물과 무덤은 전체의 50% 정도야.]
"...!"
[그러니 비보들을 절대 빼앗기지 마라. 그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야.]
그 말을 하고 까마귀는 휙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주헌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놈은 지 할 말만 하고 사라지냐."
***
그리고 그 무렵.
주헌은 드디어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음, 좀 일찍 도착했군."
그리고 술집에 들어가는 순간, 주헌은 대뜸 멱살이 잡혔다.
"서주헌, 너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 이렇게 늦으면 어떡해!"
"음? 2시간 밖에 안 늦은 거 같은데."
율리안은 뒷목을 잡았다.
"죽을래?! 그리고 심지어 만나려고 한 게 유혹왕? 너 돌았어?"
"왜. 예쁘잖아. 그리고 마침 소개팅 형식 어떠냐고 하니 니 애인이나 만들어주려고 그랬지."
애인은 개뿔, 옆에서 낄낄대며 놀리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구만.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왜 아직도 집 안가고 있었냐?"
"그게... 왕급이라며 같이 나온 여자가."
"?"
곧 안쪽을 보던 주헌은 드물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녀석은...!'
주헌은 험악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거 공명이 니 여동생이잖아."
율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유혹왕의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다.
"저거 진짜 니 동생이야?"
"그게... 날 못 알아보는 것 같아서 확실하진..."
율리안은 동생이 죽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치지 앟았던 건, 주헌의 말 때문.
'걱정 마. 니 여동생,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야.'
실제로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을 목격했다는 정보도 얻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유혹왕이랑 같이 나타나다니.'
그렇다는 건 적이란 의미인데.
곧 동생을 보는 율리안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런 율리안을 보며 주헌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겨우 동생을 만난 건지도 모르는데, 그게 하필이면 적과 함께 있다니.
그래서일까.
주헌이 안심시키듯 율리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 마. 내가 니 동생 꼬셔서 빼내올게."
주헌은 사정없이 멱살이 잡혔다.
그리고 같은 시간.
"어? 단장님 어디 가셨어?"
설아의 질문에 복원작업을 하고 있던 유재하는 움찔했다.
주헌이 누굴 만나러 갔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유혹왕을 만나러 간 걸 알면 난리 나겠지. 그렇겠지.
'심지어 소개팅 형식이라고 들었는데.'
"어, 어... 단장님은 산책 가셨는데?"
"산책? 단장님이 이 시간에?"
이상하다는 듯 설아가 쏘아보자 유재하는 시치미를 뚝 뗐다.
그럴 때 일리야가 눈치 없이 한마디 했다.
"단장이라면 소개팅 갔는데."
그 말에 설아는 물론, 아이린의 눈이 번쩍였다.
지금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