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못된 놀부 심보 (5)
"아니, 왜 그렇게들 놀라시냐니까?"
놀라고 자시고, 왜 여기에 호구왕이 나타나.
TKBM의 단장들과 권 회장은 이를 갈면서 유재하를 보았다.
주헌에게 당한 것보다는 덜하지만, 유재하에게 사소하게 당한 것만 쳐도 엄연히 이가 갈리는 그들이었다.
직접적으로 당한 건 유재하가 클로에의 변장을 하고 권 회장의 병실을 찾았을 때.
나머지야 뭐 유재하의 복제기술로 몇 번 두들겨 맞은 것 정도였나.
뭐, 솔직히 말해서 유재하는 그렇게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친, 왜 하필 파산왕을 끌고 와...!'
가진 게 많을수록 파산왕이 무섭다고, 대기업의 총수인 권 회장의 표정의 표정이 정말 가관이었다.
그러나 아이린은 예쁜 얼굴로 웃을 뿐이었다.
나름대로 비즈니스 자리라고 커리우먼처럼 단아하게 입었을 뿐인데도 빛을 뿜어댔다.
그래서 유재하가 "저랑 악수 안 하실래요. 뽀뽀해주시면 더 좋은데."
그렇게 말을 했다가 유재하는 주헌에게 얻어맞았다.
평소와 다르게 머리를 살짝 묶은 스타일도 끝내줬다.
살짝 드러난 목선이 죽여준다고 해야 할까.
마치 그 자체만으로 이 자리의 수컷들에겐 빛나는 여신.
뭐 유재하야 땡 잡았다며 옆에서 좋아했지만, TKBM에게는 글쎄.
'미친,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왔냐.'
'저 눈부신 모습은 마지막 길 가는 선물이냐. 그런 거냐.'
이보다 더 무서울 수는 없었다.
심지어 파산왕은 그 존재만으로도 공포인데, 이번엔 비보까지 얻지 않았나.
'무슨 비보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유재하도 엄연히 비보 소유자지만, 이미 그들의 눈에 유재하의 존재는 잊혀졌다.
아니나 다를까.
"저, 커피 흘리셨는데요. 괜찮으세요?"
그들은 아이린을 보고 놀란 가슴, 마시던 커피를 흘리다 못해 테이블에 엎질러 핸드폰을 적시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보다 못한 아이린이 갸우뚱거리며 한마디 하자 TKBM의 단장들은 허둥지둥 거렸다.
"야, 괜찮냐고 하잖아!"
"죽고 싶어서 그러냐! 빨리 괜찮다고 해! 핸드폰님 괜찮다고 해!"
그렇게 허둥지둥 거리다가 이번엔 물통을 건드려 물을 쏟고 말았다.
쏟아진 물은 와장창, 권 회장의 바지를 적셨다.
하지만 TKBM의 단장들과 윤시우는 기겁을 해서 아이린에게 물수건을 들이밀었다.
"죄송합니다아아! 감히 물을 쏟아버렸습니다!"
"네? 네? 젖으신 건 회장님이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감히 물을 쏟았어요!"
물론 정작 홀딱 젖고 방치된 권 회장은 부하들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럴 때였다.
"야야, 거기 단장님들. 됐으니까 주문 안 해? 나 엄청 배고픈데."
그 말에 단장들은 유재하를 쏘아보았다.
주문은 개뿔이.
며칠 씩이나 바람을 맞히고, 레스토랑에서도 14시간씩이나 기다리게 한 주제에?
"니들 잘도 그딴 말이 나오는 구나."
"됐으니까 서주헌 불러와! 비보 가지고 오라고!"
그러자 유재하가 히죽거렸다.
"이거 왜이래. 우리 단장님은 댁들을 탐탁지 않아 하는데, 난 니들 생각해서 나온 거야."
"뭐야?"
"바람맞히기 미안해서 온 사람한테 이러면 쓰나. 어?"
"...!"
유재하는 얄밉게 웃었다.
"뭐, 내 입에 뭣 좀 넣어주면 단장님한테 말 좀 잘 해줄 수도 있고?"
"!"
그러자 단장들은 권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권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참 이딴 놈의 입에 먹을 넣어주는 것도 빡치는 일이거늘.
하지만 대충 해주라는 식으로 시선을 보냈다.
'대충 제일 싼 걸로 먹여.'
곧 부하들이 웨이터를 불러서 뭐가 주문하려고 할 때였다.
"아, 잠깐. 난 이걸로."
"?!"
유재하는 제일 비싼 요리를 주문했다.
심지어.
"아, 나 요즘 술이 땡겨서. 여기 이거랑, 이거랑. 아, 이것도."
하필 고르는 술들이 죄다 억 소리 나오게 비싼 술들이었다.
단장들은 얼굴 근육을 씰룩거렸다.
"야. 유재하..."
"왜에? 접대하는데 이 정도도 못 해주나? TKBM이 이것밖에 안 돼?"
"..."
결국 그들은 권 회장의 허락에 유재하가 시키는 모든 것을 주문해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럼 이제 비보에 대한 이야기를..."
"아, 비보? 가격은 대충 이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유재하가 서류를 내밀자 그들은 경악했다.
"미친, 이건 나라를 살 돈이잖아! 돌았어?!"
"왜. 싫어?"
"싫고 자시고...!"
"뭐 이거야 우리 대장이 정한 가격을 그대로 가져온 것뿐이고. 그리고 원래 비즈니스에서는 협상에 따라 가격이 바뀔 수도 있지이?"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던 유재하는 권 회장의 팔을 보면서 히죽거렸다.
"아, 거기 회장님. 그 시계, 유물 아니야?"
"뭐야?"
"그거 좋아 보인다? 내 손에 있으면 더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뭐야? 이게!"
윤시우와 단장들이 그를 쏘아보자 유재하는 태연하게 서류를 흔들어보였다.
"왜. 가격 깎기 싫어?"
권 회장은 이를 갈면서 귀한 시계를 풀었다.
하지만 유재하의 횡포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이야, 이거 우리 형수님한테 잘 어울리겠다아!"
2차, 3차, 4차를 끌고 다니던 유재하가 보석점에서 또 횡포를 저질렀다.
심지어 이미 손에 이런 저런 명품 선물과 유물 선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이린이 속삭였다.
"저, 저기 재하 씨. 이래도 괜찮은 거예요?"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유재하가 목걸이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건 무려 보석점에서 제일 비싼 목걸이.
"키야 이런 스타일, 단장님이 진짜 좋아하는데. 내가 단장님 취향 알거든. 이런 스타일 뻑가."
그 말에 아이린의 눈이 번쩍였다.
곧 아이린이 가격표도 보지 않고 제 카드를 꺼내려는 순간, 유재하가 스읍 아이린의 손을 막으면서 권 회장을 보았다.
"하여간 노친네가 눈치가 없어."
저걸 콱 그냥.
그 수작이 뻔히 보여 열이 뻗쳤다.
그뿐이 아니었다.
"거기 너! 그것도 가져와봐!"
"이, 이거?"
"그래 그거. 아, 거기 그것도! 이건 설아한테 가져가야지. 아! 이건 우리 단장님, 이건 우리 단. 이건 우리 부단장님, 이건 우리 클로에. 어... 삐약이는... 이거면 돼."
유재하는 자기가 먹다 만 사탕 한 개를 집었다.
결국 단장들은 울화를 삼키며 유재하의 시중을 다 들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의 호사로운 호텔, 마사지, 쇼핑, 먹거리.
거기에 질질 끌려 다니던 TKBM의 직원들이 식사를 하는 유재하를 쏘아보았다.
"자, 이제 해달라는 조건 다 채웠습니다. 이제 비보 계약을 하시죠! 유재하 님!"
권 회장도 못 마땅한 듯이 유재하를 보았다.
겨우 제 사비를 털어 유재하의 비위를 맞추고 맞춰서 비보의 가격을 무려 5억 달러까지 내릴 수 있었다.
'정말 그 사이에 든 돈만 얼마야.'
권 회장은 해외은행의 통장 하나를 탈탈 전부 까야만 했다.
뭐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처음에 제시한 거지 같은 가격을 생각하면.
'비보만 얻을 수 있다면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다.'
그리고 지금.
"자, 이제 비보를...!"
그런데 그럴 때였다.
"땡큐. 그동안 재밌게 잘 놀았어."
자리에서 일어난 유재하가 생긋 웃었다.
"...?!"
당황한 그들이 유재하를 붙잡았다.
"아니 잠깐! 비보 계약은?!"
"비보를 준다고 했잖아!"
그러자 유재하가 아, 하고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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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내 보물이야. 부디 아끼고 사랑해줘!"
"?!"
유재하는 냅다 도망쳤다.
곧 멍하게 있던 단장과 권 회장은 폭발했다.
"너 이 새끼, 이리 안 와?!"
"유재하 이 새끼, 호구왕 주제에 누굴 호구 취급해!"
결국 폭발한 그들이 유물로 유재하를 죽이려고 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하지만.
"꺄아아악! 아이린 형수님! 나 좀 살려줘요! 저 살해당해요!"
유재하는 아이린을 부르고 쌩 도망쳤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린이 나타나자 TKBM 사람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 재하 씨 해코지하려고 했어요?"
아이린의 눈빛에 TKBM의 사람들은 일제히 스톱했다.
"자, 잠...!"
"아냐! 잠깐, 해코지라니요. 그럴리가요. 우리 평화롭게, 평화롭게 이야기하죠."
"그래요, 우리 평화를 사랑해야죠. 다, 다시 차분하게 식사라도 대접을...!"
***
[TBKM, 상반기 막대한 사업 손해. 파산왕의 응징?]
[비보 얻으려다가 재정위기 겪나.]
[이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비보 안 넘긴다. "비보 블랙리스트에 TKBM 해당."]
[권태준 회장 분노. 유재하 고소.]
계속되는 주헌의 횡포.
특히 열 받은 TKBM은 결국 판도라에 이런 전화까지 했다.
[됐으니까 그냥 비보 안 얻으면 안 되나? 그냥 다 때려 치우면 안 되냐고.]
그 전화에 로스차일드, 아니 프로메테우스는 피곤한 듯 이마를 짚었다.
"글쎄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요. 권 회장님."
유일하게 인간과 접촉이 가능하다는 건 이래서 참 안 좋은 것 같았다.
거참 뭔 일만 생기면 이렇게 자신만 찾아대니 원.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인재들은 아껴줘야지.'
유일한 사황 후보들 중 하나니까.
그래서일까, 젠틀한 프로메테우스는 제법 친절하게 상대해주었다.
"비보가 없으면 신급 유물을 못 씁니다. 반드시 얻으셔야 해요."
[어째서? 지금까지는 비보가 없어도 신급 유물을 잘만 썼는데?]
도대체 얼마나 호구가 된 건지, 권 회장은 목소리만 들어도 깊은 빡침이 느껴졌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대답 대신 가볍게 웃었다.
"어쨌든 가지고 있는 신급 유물도 서서히 못 쓰게 될 겁니다. 길어봐야 일주일 정도겠죠."
[...]
"뭐, 아직 기회는 있어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서주헌이 그런 것처럼 우리도 빼앗아보면 그만 아닌가?"
그래봐야 비보는 특수한 유물.
보통 유물과는 달라서 적응하는데 보름은 걸린다.
'비보를 바로 쓴 서주헌이 미친 거고.'
"아무튼 너무 걱정 마세요. 서주헌이 까마귀 유물을 쓴 것도 우연입니다. 그 증거로 폭주해서 졸지에 다른 섬들까지 날려버렸잖아요?"
뭐, 폭주라기보단 거의 주헌의 의지로 섬을 날린 거지만.
"다들 아직 햇병아리 왕들이니 충분히 빼앗을 수 있어요."
[안 닥쳐? 이 무능한 판도라.]
그렇게 빡친 목소리로 통화는 끊겼다.
그럴 때 독수리가 프로메테우스에게 물었다.
[정말 놈들이 비보들을 빼앗아올 수 있을까요?]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탄식했다.
"혹시 모르니 그 열쇠를 가져와라."
독수리는 경악했다.
[서, 설마 진짜로 그놈들을 다시 불러낼 생각이십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놈들을 다시 꺼내주면 그 까마귀한테만 좋은 짓을 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빨리 왕급들을 갈궈서 비보를 빼앗아오라고 해."
부디 그 거지 같은 선택만큼은 하지 않게 되기를.
***
'이상하다.'
부름을 받고 약속장소로 향하던 주헌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을 부른 것은 보나마나 왕급 중 하나인 여자.
'이번엔 헐리웃 배우 유혹왕인가.'
하도 공들여서 자신을 불러내기에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잠시 카페로 향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한 점이 하나.
'까마귀 녀석은 역시 안 보이는 군.'
사실 주헌은 결국 아이린과 설아를 꼬셔서(?) 각자의 비보에 대해서 듣는데 성공했다.
특히 아이린의 비보가 가장 의외였고 솔직히 좀 놀랐지만 어쨌거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비보는 동물 형태인데, 그래도 늘 보이는 곳에 있어요.'
다른 녀석들만 봐도 비보를 얻으면 짐승 형태의 비보가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까마귀는 안 보인다.
어째서?
주헌은 미간을 좁혔다.
'물어볼 게 있는데.'
그럴 때였다.
[!!]
주헌의 어깨에 몸을 돌돌 말고 자고 있던 동아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치 뭔가를 감지한 듯이.
이때 주헌의 앞에 스쳐 지나갔다.
검은 깃털.
그리고 인간의 모습을 한 그 녀석이.